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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력 ‘만렙’에도 여전히 혼자하기 어려운 것은

불편한 순간들은 사소한 일상에서 발생한다.

  • 홀로
  • 입력 2019.07.22 16:39
ⓒDeborah Cardinal via Getty Images

2008년에 방영된 드라마 <달콤한 나의 도시>(SBS)의 첫 장면은 이렇게 시작한다. 주인공 은수(최강희)는 아침에 바삐 출근 준비를 하다 “앗! 휴대폰!”을 외친다. 휴대폰을 어디에 뒀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휴대폰 없이 집 밖을 나서는 것은 ‘커리어우먼’의 본분이 아닌지라 정신없이 휴대폰을 찾지만 온 집을 뒤져도 이 조그만 디지털 기기가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이럴 때 동거인이 있다면 전화 좀 걸어 달라 부탁해 전화벨 소리를 울리게 해서 손쉽게 찾아보련만, 혼자 사는 은수에게는 전화 걸어줄 사람이 없다. 은수는 휴대폰을 포기한 것처럼 미친 듯이 집 밖으로 뛰어나간다. 은수가 도착한 곳은 공중전화 부스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유희야, 나한테 전화 좀 해줘. 급해, 급해!”라고 외치고, 이른 아침 별안간 전화를 받은 유희(문정희)는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란 듯이 “아, 또야? 알았어, 끊어봐”라고 말한 후 은수에게 전화를 걸어준다. 다시 집으로 달음박질친 은수는 울리는 전화벨 소리를 듣고 침대 밑에 파묻혀 있던 휴대폰을 찾았다…는 숨 가쁜 오프닝.

무슨 납치나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혼자 사는 여자가 아침 출근길에 휴대폰을 못 찾아서 공중전화 부스에 달려가 친구에게 에스오에스(SOS)를 보냈을 뿐인데, 나는 이 오프닝이 어느 장르 드라마의 사건보다 긴박하게 느껴졌다. 혼자 살아본 사람이라면 ‘바빠 죽겠는데, 휴대폰이 어디 있는지 도저히 찾을 수 없었던’ 외출 전의 순간이 한두 번은 꼭 있었을 것이다. 사실 휴대폰 전원만 꺼지지 않았다면, 그것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전화를 해서 벨을 울리게 하는 것이다. 2008년이야 집 근처에 공중전화 부스라도 있었던 것 같지만, 요즘처럼 공중전화 부스 찾기가 어려울 때에는 친구에게 전화 좀 걸어 달라고 냅다 달려갈 수도 없으니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 나는 그럴 때 컴퓨터를 켜서 ‘PC 카톡’으로 친구에게 말을 건다. “○○야, 나 휴대폰을 도저히 못 찾겠어. 나한테 전화 좀 해줘.” 살다 보니 나름의 요령이 생긴 것이다.

아플 때 혼자면 서럽다고요?

혼자 산다고 하면 흔히 듣는 걱정이 이런 것이다. “에휴, 아플 때 간호해줄 사람 없으면 서럽잖아.”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도리질 치며 “혼자 아픈 게 더 편해요”라고 답한다. 정말이다. 너무 아파서 기절을 하거나 당장 응급실로 달려가야 할 정도의 유혈 사태를 겪어본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내 경우에는 몸살감기 정도는 혼자 앓는 것이 편하다. “응? 감기가 올 것 같은데?” 싶은 낌새가 몸에 느껴지면 퇴근길에 오렌지 주스와 과일과 물, 나에게 잘 맞는 약을 몇 가지 산다. 물론 병원에 일찌감치 들러서 주사를 맞는 것도 방법이다. 열이 높아 새벽에 깨서 물수건을 차게 바꾸고 오렌지 주스를 먹고, 원기를 회복하려고 혼자 냉동실에서 갈비를 찾아 구워 먹기도 한다. 그럴 때에는 “나를 살려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가 육신을 움직이게 한다.

보송보송한 건조 기능을 강조하는 세탁기 광고에서 4인 가족 카피에는 긍정적인 단어만 쓰다가 1인 가족 카피에는 “비록 혼자 살지만 보송보송”이라며 ‘비록’이라는 부사를 쓸 때, 조립용 가구를 판매하는 사이트 고객 리뷰에서 “여자 혼자서는 무거워서 조립 못하겠네요. 저는 남편이 해줬어요”라는 글을 볼 때에는 나도 ‘혼자 사는 게 그렇게 불편한 일인가’ 싶어지지만 사실 건조 기능이 있는 신상 세탁기든, 가구 조립이든 돈만 있으면 해결되는 일들이다.

그보다 혼자여서 정녕 불편한 순간들은 좀 더 사소한 일상에서 발생한다. 휴대폰을 도저히 찾을 수 없을 때, 에어컨 설치, 방송 케이블 설치, 냉장고 수리 등을 위해 기사분들과 방문 일정을 잡을 때, 원피스의 지퍼에 손이 안 닿아서 옷을 벗을 수가 없을 때, 창문 다 열고 출근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질 때, 가스 불을 제대로 끄고 나왔는지 불안할 때 등등.

누가 나 대신 우리 집에 잠깐만 머물러 방문자에게 문을 좀 열어줬으면 하는 순간들이 특히 그러하다. 에어컨 설치 기사님이 주말에는 일정이 다 찼고, 평일에는 6시 이전까지만 업무를 한다고 할 때 혼자 사는 직장인은 휴가를 내지 않고서야 그와의 일정을 맞추기가 어렵다. 냉장고나 가구와 같이 “문 앞에 놔주세요”라고 답할 수 없는 물품이 배달될 때에도 집에 사람이 있어야 한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때에는 그런 자질구레한 방문 약속까지 내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집에는 항상 누군가가 대기하고 있었으니까. 하다못해 동생이나 친구와 함께 산다면, 좀 더 여유가 있는 쪽에서 시간을 내어 집에 남아 문을 열고 방문자를 맞이할 수도 있지만 정말이지 집에 인간이라고는 나뿐인, 홀로 사는 사람에게는 에어컨 설치도, 인터넷 케이블 설치도, 고장 난 가전제품 수리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럴 때에는 동거하고 있는 고양이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지만, 고양이는 집에 낯선 이가 오면 소파 밑으로 숨기 바쁘다. 정말이지 귀여움 말고는 별 쓸모가 없는 녀석이다.

바로 와줄 누군가의 전화번호 하나 정도는

몇 달 전 ‘혼자 사는 자취방에 요정을 키울 수 있다면?’이라는 리스트가 에스엔에스(SNS)에서 돌았던 적이 있다. 화장실 청소 요정, 벌레 퇴치 요정, 아플 때 나타나 위로해주는 요정, 생필품이 언제 떨어졌는지 점검해주는 요정, 쓰레기 대신 버려주는 요정, 집밥을 배달해주는 요정 등등이 예시에 있었다. 집안일 중 누군가 대신 해 줬으면 하는 일들의 목록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내 경우엔 바퀴벌레나 꼽등이가 나타나도 맨손으로 잘 때려잡고, 비위가 강해 음식물 쓰레기도 잘 만지고, 혼자 집밥을 해 먹는 것에도 어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어서 내 집에 초대하고픈 요정이 없었다.

물론 나라고 날 때부터 바퀴벌레와 음식물 쓰레기에 강했던 것은 아니었다. 혼자 오래 살다 보니 비위가 강해지고, 경험에 의해 각종 기술이 길러진 것이다. 전구를 갈거나, 깨진 타일을 보수하거나 하는 정도의 일은 이제 식은 죽 먹기다. 웬만하면 혼자 모든 일을 해결하며 살아야 하는 상황이 되면, 일종의 초능력이 생긴다. 물건을 움직이게 하는 염력이나 멀리에서 자물쇠를 조종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능력은 당연히 아니고. 내 몸의 변화를 빠르게 감지할 수 있는 능력, 등 뒤의 원피스 지퍼를 내리기 위해 등허리 중간까지 손가락을 닿게 하는 유연성, 수리 기사분께 읍소하고 일정을 조정하기 위한 약간의 연기력과 임기응변, 위급 상황에 연락하면 좋을 친구 연락처 외우기 등의 지극히 사소한 능력들이다.

혼자 사는 것은 편하다. 밤늦게 혼자 옷을 훌훌 벗고 돌아다닐 수 있고, 밤새 좋아하는 드라마를 이어폰을 끼고 보지 않아도 된다. 내가 뭘 해도 참견하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혼자 사는 것은 불편한 일이기도 하다. 집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대소사를 책임져야 하고, 모든 일을 직접 알아서 해야만 한다. 누가 도와줬으면 좋겠고, 누군가의 도움이 간절한 순간도 종종 발생한다. 그런 순간순간들을 겪어가며 나에게는 ‘혼자여도’ 괜찮은 기술들이 습득되었고, 더불어 나를 보살피는 방법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물론, 위급 상황에 도움을 청하면 “내가 지금 바로 갈게”라고 선뜻 답해줄 누군가의 전화번호라는 안전장치 하나 정도가 있으면 더 든든하지만 말이다.

글 · 늘그니

* 한겨레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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