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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일, 지정생존자'가 말하는 정치에 대해서

이만한 리메이크 드라마가 있을까?

<60일, 지정생존자>(티브이엔)는 2016년에 만들어진 미국드라마 <지정생존자>의 리메이크작이다. 국회의사당 테러로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요인들이 사망하고, 졸지에 한직의 장관이 국정 운영을 떠맡는다는 설정이 원작에 이어 한국판에서도 펼쳐진다. 미국과 한국의 정치, 군사, 외교 상황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한국으로 배경을 옮기려면 많은 내용이 바뀌어야 한다. 한국판은 국내외 정세를 꿰뚫는 통찰력으로, 한국의 특수성을 녹여냈다. 전세계 어느 나라에서 리메이크를 하더라도 이보다 생생할 순 없으리라.

일단 한반도를 둘러싼 전쟁 위기가 각별한 긴장을 빚어낸다. 북한이라는 항시적인 적과 마주한데다,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교차되는 곳이라, 테러 이후 국제정세가 요동친다. 또한 쿠데타, 외환 위기, 탄핵 등 굵직한 환란을 겪고도 민주주의와 헌정 질서를 이어나간 역사가 있기에 드라마 속 위기와 대응 상황에 개연성이 느껴진다. 여기에 미디어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발달로, 여론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사회라는 점도 드라마 속 상황에 걸맞다. 이처럼 대한민국 자체가 제공하는 콘텐츠가 독보적일 뿐 아니라, 드라마의 만듦새도 탁월하다.

공간감이 별로 없었던 원작에 비해, 한국판은 원거리 촬영과 독특한 앵글로 시각적 쾌감을 높인다. 첫 회부터 국회의사당이 붕괴되는 모습을 탁 트인 시야에 펼쳐놓는다. 그 놀라운 광경을 한강다리에서 목격한 박무진(지진희)이 하필 국회의사당으로 현장학습을 간 어린 딸을 구하러 달린다. 스펙터클의 측면으로 보나 감정의 측면으로 보나, 극적인 긴박감을 제대로 살린 장면이다. 청와대 곳곳을 널찍한 입체감으로 담아낸 솜씨도 수려하다. 하지만 <60일, 지정생존자>가 볼거리에 치중한 드라마는 아니다. 테러범을 잡으려 군사작전을 펴던 군인들과 교신이 끊긴 장면에서, 드라마는 박무진의 관점에서 결과를 통보받고 전사자를 애도하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테러범을 생포하는 장면을 굳이 재현하지 않는데, 이는 드라마의 본질이 액션의 쾌감을 전하는 데 있지 않음을 분명히 하는 태도다.

ⓒtvN

드라마가 치중하는 것은 아무런 준비 없이 국난의 시기에 대통령 권한대행이라는 막중한 자리에 던져진 인물이 겪는 중압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칙과 상식에 입각해 힘든 결정을 해나가는 인물의 윤리다. 박무진은 원작에 비해 훨씬 개성이 두드러지는 존재다. 원작의 주인공도 선출직을 맡은 적 없는 교수 출신의 장관이고, 해임 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관료적인 편이고, ‘지정생존자’라는 유사시를 대비한 제도 안에서 대통령의 남은 임기 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할 자이다. 즉 경험은 없지만 조금은 준비된 자이기에, 황당함 속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박무진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존재임이 몇몇 설정을 통해 보강된다. 그는 카이스트 교수 출신으로 환경부 장관직에 올랐다가 미국과의 통상 협상에서 바른말을 하려다 6개월 만에 해임 통보를 받는다. 정치인도 관료도 아닌 ‘이과 출신’ 과학자인 그가 난생처음 국가안보회의에 들어가 어리둥절한 눈과 덜덜 떨리는 다리로 전쟁 위기와 마주하는 초긴장 상황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그는 자신이 감당할 그릇이 못 된다며 물러서지만, 대선을 치르기 전 60일 동안만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권력의 공백을 메워, 쿠데타를 저지해야 한다는 “시민의 책무”를 부여받는다.

그런데 “권력 의지”도 지지 기반도 없으며, ‘현상을 유지하는 권한’만 지닌 그가 통치를 시작한다. 6회까지 그가 보여준 통치 행위는 전쟁을 막고, 쿠데타를 막고, 소수자 혐오와 내부 분열을 막고, 외교 분쟁을 막으며, 참사 현장을 방문하고, 영결식을 치르고, 테러범을 생포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미국에 맞서고, 군부에 맞서고, 지자체장을 만나고, 국회를 만나고, 유가족을 만나고, 작전에 투입될 장병들을 만났다.

이러한 그의 행위는 ‘대통령이란 무엇인가’를 사유하게 만든다. 즉 장관조차 생각해본 적 없는 국가원수이자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라는 ‘극한 직업’을 ‘체험 삶의 현장’ 수준으로 익히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다. 실로 ‘대통령학’의 텍스트로 읽힐 만한 이 드라마에는 정치에 대한 근본적인 긍정이 담겨 있다. 정치는 전혀 모르지만 과학자의 뇌를 지닌 박무진이, 밤새 헌법을 읽고 편견과 사심이 없는 맑은 이성으로 사고하여 올바른 결정을 내린다. 그는 권력을 욕망하지 않지만, 권력을 욕망하는 다른 이들에게 주권자의 자리를 침탈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을 쓴다. 사실 이는 박무진뿐 아니라, 주권자인 시민 모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다. 자신을 권력과 무관한 존재로 여기며 정치를 회피하는 순간, 주권자의 자리는 외세, 군부, 차별주의자, 극우세력 등에게 침탈당한다. 따라서 정치혐오와 무관심에 빠지지 말고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시민의 책무’를 다해야 한다. 한편 드라마는 대통령비서실의 역할과 정무적 판단을 진중하게 보여주며, 정권 재창출이 단지 ‘밥그릇’ 때문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국정의 연속성’을 위해 요구된다는 뼈 있는 말을 들려준다. 5년 단임 대통령제의 가장 취약한 대목도 이 지점이리라.

“정치를 몰라도 정책은 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대통령의 약속은 틀렸다. 정책을 위해서는 반드시 정치가 추구되어야 한다. 환멸에 빠지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고, 주저하지도 말고, 주권자인 나에게 주어진 정치의 몫을 감당해야한다. 헌정사의 환란을 겪으며 살아남은 시민으로서,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

 

글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이 칼럼은 한겨레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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