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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죄가 없고 당신은 죄가 있다

왜 사람의 죄를 술이 뒤집어 쓰는가

ⓒOlekStock via Getty Images

조선왕조사에서 가장 술을 좋아한 왕인 세조는 홍윤성이란 신하를 매우 아꼈다. 홍윤성이 어느 여성을 강간하려고 한 일로 탄핵을 해야 한다고 상소가 빗발치자 세조는 홍윤성을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홍윤성은 술에 취해서 그 집에 잘못 들어갔을 뿐이라고 답했고 세조는 술에 취한 사람에게 무슨 죄를 묻냐며 끝끝내 홍윤성을 벌하지 않았다.

며칠 전 어느 지상파 방송사의 앵커가 지하철에서 타인의 옷 속을 불법촬영을 하다가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그는 과음한 상태라고 밝혔다. 여자친구를 때려서 숨지게 한 20대 남성도 술에 취한 상태였음이 감형 사유가 됐다. 여자기숙사에 들어가 성폭행을 시도했던 대학생도 만취로 인한 심신미약으로 집행유예를 받았다. 이쯤 되면 술에 취하면 성범죄를 저지르고 싶어지는지 궁금하다. 법원은 술의 죄를 물어 주류 판매를 전면 금지해야 할지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술에 취한 상태로 왜 집이 아니라 여자기숙사를 가게 되었는지를 따져야 한다.

근래 술이 감형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목소리도 높아서일까. 흥미로운 현상도 보인다. 정작 가해자는 가만히 있는데 여러 범죄 심리 전문가들이 나서서 열심히 가해자의 심리를 해명해준다. 언론인, 부유층, 의사, 판사 등의 사회적 지도층이 불법촬영과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가 높은 도덕성과 윤리를 기대하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억압된 욕구’를 ‘성적 일탈’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그럼 대학생이나 평범한 직장인들이 불법촬영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는 도덕성에 대한 요구가 낮기 때문인가. 재벌, 정치인, 연예인, 언론인, 성직자, 의사, 판검사 들의 범죄가 연일 신문의 사회면을 뒤덮고 있는데 어느 국민이 이들이 부담을 느낄 정도로 높은 도덕성을 기대하고 있는가. 일말의 염치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싶은데.

가해자가 왜 그런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다. 가해자의 이유를 아는 것이 우리에게 교훈으로 남지는 않는다. 이주민 아내를 폭행한 남성은 구속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언어가 다르니까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그것 때문에 감정이 쌓인 게 있다. 다른 남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버닝썬 클럽의 이문호 대표도 인터뷰에서 같은 말을 했다. “승리의 카톡 내용이 죄가 된다면 대한민국 남자들 다 죄인이지 않냐.” 오히려 이제는 궁금해진다. 대체 남자들끼리는 어떤 문화와 의식을 공유하고 있길래 이런 말들이 쉽게 나오는 것인가.

어느 자동차 정비공은 전 여자친구 차의 브레이크를 세번이나 고장나게 했지만 집행유예가 나왔다. 브레이크가 고장나면 자신에게 연락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을 뿐 ‘상당한 애정을 가지고 있던 피고인이 단지 헤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죽이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법원은 판단했다. 남자친구의 주먹에 맞아 쓰러져 뇌출혈로 피해자가 사망했지만 법원은 두 사람이 주고받은 문자를 보니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가해자에게 살해 의도가 없었음을 확신했다. 다른 남자에게 관심을 가져서 화를 냈다는 변명조차 피해자를 통해선 확인할 수도 없는데.

실연을 하면 마음이 아프고 죽을 만큼 힘들다. 이런 마음 상태를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상대를 때리고 죽일 만큼 힘들다고까지 이해해주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재범의 우려가 없다는 법원의 선처는 그가 다시는 연애를 안 한다는 확신인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확신인가? 책임은 누가 지는가. 그 누구든 잘못을 하면 예외 없이 처벌받는다는 것은 지켜져야 한다. 하지만 앵커는 재빠르게 자진퇴사 처리가 되었고, 불법촬영을 하던 판사는 변호사가 되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떠올려야 한다. 성범죄도 술 탓이라고 눈감아주던 세조는 나중에 홍윤성이 삼촌을 죽이고 암매장하는 것까지 모두 덮어준다. 홍윤성은 영의정까지 올랐다. 술이 사람 대신 죄를 덮어쓰지 않아야 할 이유다.

* 한겨레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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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유예 #음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