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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7월 11일 16시 27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07월 11일 17시 48분 KST

'사린가스'로 수출규제 명분 들고 온 일본은 또 제 발목을 잡았다

해명의 주체가 한국에서 일본으로 바뀌었다

 95년 지하철 테러, 일본의 트라우마

Getty Images via Getty Images

 

일본인들은 ‘사린가스’에 관한 끔찍한 기억을 갖고 있다. 지난 95년 사이비 종교집단인 옴진리교가 도쿄 시내 지하철에서 맹독성 화학물질인 사린가스를 살포했다. 이 테러로 13명이 사망하고 6200여명이 부상당했다. 일본 사회에서 사린가스는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기폭제와도 같다.

이 사린가스가 2019년에 다시 등장했다. 일본 NHK는 9일 자국 내 정부 인사의 말을 인용해 “(한국을 대상으로 수출 규제를 가한) 원재료는 화학 무기인 사린 등으로 전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NHK의 ‘사린가스’ 보도 다음 날, 바통을 이어받은 것은 후지TV였다. 후지TV는 10일, 한국의 ”수출 관리 체제에 의문을 던질 수 있는 자료”라며 ”지난 4년간 전략 물자가 불법 수출되었다가 적발된 건이 4년 동안 156건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이날 후지TV에 출연한 후루카와 가쓰히사 전 유엔 안보리 북한제재위원회 위원은 ”이런 정보를 보고도 한국을 화이트 국가 취급하기는 어렵지 않겠느냐”고 밝혔다.

 

느닷없이 등장한 사린가스?

일본은 그간 한국으로의 반도체 수출규제의 명분을 정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아베 일본 총리는 지난 7일까지만 해도 ”국가와 국가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가운데, 무역관리 역시 제대로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며 일본 전범기업의 강제징용에 대한 한국 대법원의 배상 판결이 반도체 수출규제의 배경임을 암시했다.

한국 정부는 지난 10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WTO 상품·무역이사회에서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를 추가 안건으로 긴급 상정했다. 일본이 주장하는 ‘신뢰 훼손’ 등의 사유는 WTO 규정상 경제 보복 조치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일본의 국내 여론도 좋지 않았다. 일본 언론은 자국의 수출규제로 한국의 전자제품 산업이 타격을 받으면 한국 기업과 거래하는 일본 기업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이런 상황에서 ‘사린가스’ 위협은 국내 여론과 대외적 명분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카드였다. 일본 국민들의 트라우마를 상기시키며 반한감정을 고조시키는 동시에 이번 수출규제가 정당한 명분에 의한 것이라고 WTO에 설명할 근거가 될 수 있었다.

 

자료 부풀려 명분 확보하려 한 일본

문제가 있었다. 후지TV의 보도는 상당히 부풀려졌으며 부정확한 내용이었다. 후지TV가 제시한 자료는 지난 5월 대한애국당 조원진 의원의 요청으로 산업자원부가 제공한 ‘연도별 전략물자 무허가수출 적발 및 조치현황’에 들어 있는 내용이었다. 정확하게 따지자면 불법수출된 건수가 아니라 불법수출이 적발된 건수였다.

산업부도 11일, “한국은 전략물자 무허가 수출 적발 및 조치 현황을 매년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으며, 국정감사 등을 통해 상세 내역을 수시로 국회에 제출하고 있다”며 “이는 우리나라 전략물자 수출관리제도가 효과적이고 투명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설명했다.

자료를 공개했던 조원진 대표도 자신의 자료가 일본의 수출규제 근거로 사용되었다는 여론을 의식했는지 “일본이 적반하장으로 그걸 이용해서 경제 보복한다는 것은 대단히 문제가 있다”며 “일본은 사실 전략 물자에 대한 밀반출 부분을 공개를 안 한다. 일본 스스로는 발표를 하지 않고 한국 정부가 발표하는 데 대해서 경제적으로 보복을 한다든지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대단히 불쾌한 일”이라고 해명했다.

또다른 문제도 있었다. 일본이 ‘사린가스로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소재는 에칭가스다. 이 에칭가스는 순도 99.999%의 고순도 불화수소다. 전문가들은 이 불화수소로 사린가스 등 생화학 무기를 만들 수 있는 것은 맞지만 ‘고순도 불화수소‘를 쓸 이유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순도가 비교적 낮은(97%) 불화수소는 국내에서도 생산 가능하다. 굳이 ‘비싼 돈을 들여’ 일본산 불화수소를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국내 한 반도체 회사 관계자는 중앙일보에 “수입 원료 중에서도 불화수소 같은 독성물질은 주문량·입고량을 완벽하게 대조한다”며 “불화수소가 외부로 흘러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오히려 북한에 전략물자 불법수출한 것은 일본?

일본 측이 부풀려진 자료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가운데 바른미래당 하태경 의원은 11일, 일본이 오히려 북한에 불화수소를 ‘밀수출’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뉴스1

 

하태경 의원은 일본의 비정부기구인 안전보장무역정보센터(CISTEC)가 발표한 자료를 토대로 “1996년부터 2013년까지 일본이 북한에 불화수소를 밀수출한 사건이 30여건에 달한다”며 ”수출하려다 적발된 게 아니라 수출된 것을 확인한 사례가 30여건”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하 의원은 ”일본 일각에서 ‘한국의 대북전략물자 밀수출설’ 같은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지만, 이런 음모론과는 구별되는 ‘일본의 전략물자 대북 밀수출 사실‘이 확인된 것”이라며 ”일본의 주장대로라면 일본은 ‘블랙리스트 국가’를 자인한 셈”이라고 말했다.

하 의원은 ”일본 방송이 어제 한국이 전략물자의 수출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고 했지만 그것은 다 막은 것이고, 외국에 수출돼도 다 회수한 것을 보여주는 자료”라며 ”오히려 한국은 대북 물자(수출을) 제대로 관리하고 일본이 관리를 못해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태경 의원이 의혹을 제기함에 따라 해명의 주체가 바뀌었다. 일본이 먼저 꺼내든 ‘사린가스’ 카드에 자신들이 발목 잡힌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