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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작가] 박상영은 "퀴어의 삶이 어떤지 묻지 말라"고 말한다

‘대도시의 사랑법’을 낸 박상영을 종로에서 만났다.

  • 박세회
  • 입력 2019.07.09 16:12
  • 수정 2019.07.09 16:54
ⓒ이윤섭/허프포스트코리아

박상영의 소설을 읽다가 전철에서 큰 소리로 웃어서 창피했던 적이 있고, 일요일 낮에 거실에서 혼자 운 적도 있고, 혼잣말로 욕지거리를 내뱉는 나 자신에게 두려움을 느낀 적도 있다. 누군가는 ‘너무 가볍다‘라고 말하지만, 그런 말을 듣는 건 어쩌면 그의 노림수가 통했다는 의미다. 가벼움이란 대체 무엇인가? 웃기면 가볍고 슬프면 진중한가? 하긴 너무 진중하면 슬프기는 하다. 허프포스트가 그를 현대보다 가까운 ‘현재 작가‘로 선정한 것은 꼭 그가 퀴어의 목소리를 대변해서만이 아니다. 그의 소설이 여러 면에서 현재의 감각에 찰싹 붙어있기 때문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데버러 스미스의 회사에서 출간도 전에 신작 판권을 사 간 이유 역시 비슷할 것이다. 6월 28일 연작 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을 낸 소설가 박상영을 종로의 한 골목에서 만났다. 너무 더워서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소설집을 읽고 친구들이 자기 얘기 썼다고 항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거 내 얘기 아냐?”라고 따지는 경우는 없나요?
친구는 원래 끼리끼리 놀잖아요? 제 친구들이 약간 관종들이에요. 자기 얘기 써주면 좋아하고, 소설에 쓸만한 거리가 있으면 와서 알려줘요. 또, 한 사람의 얘기를 하나의 캐릭터에 담지 않아요. 예를 들어 실제 우리 엄마가 기독교 신자고 암에 걸린 적이 있기는 하지만, 소설 속의 엄마는 몇몇 설정을 빼고는 완전히 새로 창조된 캐릭터에요. 그럼에도 약간이라도 개인이 드러날 걱정이 있으면 쓴 걸 보여주고 동의를 받아요.

대단한 친구들이네요.
예 용기가 있는 친구들이죠. 예를 들자면, 20대 때부터 실제의 저와 가깝게 지내는 여자 친구들이 여럿 있고, 그 친구들이 30대에 접어들면서 결혼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느낀 감정에서 모티브를 얻어 탄생한 캐릭터와 이야기가 ‘재희’에요. 혜화동에서 대학 시절부터 살고 있는데 그 공간에서 자취하던 친구들과 반찬 나눠 먹으며 살던 시절이 그립고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쓴 것 같아요. 누가 물어보면 캐릭터 중에 재희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해요.

퀴어 소설 작가로서 부딪히게 되는 문제도 있겠어요.
당사자성에 대해서 밝혀야지만 퀴어 소설을 쓸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아요. 트위터에서도 그런 피드백을 받은 적도 있어서 명확하게 얘기하고 싶어요. 지금까지 한국 소설에서는 퀴어들이 대상화된 존재로만 그려졌고, 이제 슬슬 1인칭으로 당사자성이 생기고 있어요. 제가 그런 소설을 썼고, 그 흐름에 저를 끼워 주셔서 감사하지만, 퀴어 소설을 쓰려는 사람들이 커밍아웃이나 당사자성에 대한 압박을 받지는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도 커밍아웃한 줄 알았어요.
그렇게 많이 오해하시더라고요. 심지어 어떤 소설가가 한 강연에서 저를 소개할 때 ‘커밍아웃한 소설가’라고 소개했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그러나 (커밍아웃은) 어디까지나 제 선택의 문제여야 하는데, 이 시장에서의 포지셔닝을 위해서 작가에게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기분 나쁜 건 절대 아닌데, 괜히 반골 같은 기분이 드는 거 있잖아요.

소설이 아닌 작가 개인의 삶에 대한 질문도 좀 싫겠어요.
저는 그런 질문이 좀 동물원 구경 같다고 느껴요. 언론은 사건이나 인물의 특별한 점을 캐치해야 하는 생리가 있죠. 하지만 ‘퀴어의 삶은 어떤가요’라는 질문이 합당한 지는 모르겠어요. ‘퀴어의 삶에 대해서 묻는 게 이상하지 않나?’라는 문제의식이 소설집을 쓰고 엮은 목적이에요. ‘이 소설책을 읽고 (퀴어도) 우리랑 똑같다는 걸 알았다’는 식의 독자평이 많아요. 노렸던 반응이기도 하고 무척 기뻐요. 하지만 그 이면에는 씁쓸한 마음도 있어요. ‘아, 퀴어를 정말 되게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왔구나’라는 마음이죠.

기억에 남는 다른 평은 없나요?
어떤 독자평 중에는 “난 이 소설이 별로인데, 너무 현실적이고 날 것의 언어를 쓸 줄이나 알았지 동성애자의 슬픔이나 아픔 같은 걸 섬세하게 그려내지 못했다”라는 얘기가 있었어요. 슬픔이나 아픔을 섬세하게 그리지 못해서 싫다는 건 좀 싫었어요.

‘동성애자의 슬픔’이라고 하니 떠오르는 소설이 있네요. 전작 중에 동성애자 캐릭터들에게 슬픔이 없다고 비판하는 영화 평론가가 등장하는 소설이 있죠?
실제로 들었던 말이에요. 등단하자마자 ‘중국산 모조 비아그라와 제제, 어디에도 고이지 못하는 소변에 대한 짧은 농담‘이라는 작품을 발표했거든요. 그걸 보고 어떤 평론가가 “상영 씨 소설이 수다스럽고 일기 같아서 재밌는데, 동성애자를 그릴 때 우린 아직도 발랄한 게 이상해”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상영 씨 세대는 안 그렇겠지만, 우린 아직 그게 너무 이상하고 어색해”. 그 얘기를 바탕으로 쓴 게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라는 작품이에요.

‘게이’라는 단어 자체에 밝다는 의미도 있는데, 게이가 왜 슬프지 않냐고 물어본 게 아이로니컬하네요.
그렇죠. 퀴어 영화 중 일부는 울고불고 짜고 난리를 치다 끝나잖아요. 심지어는 섹스 씬에서도 울고. 꼭 그래야하만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요. 물론 그게 마냥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저도 신파를 좋아하는데, 퀴어의 세계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매체를 통해서 그런 신파만 접하게 된단 말이죠. 그러다 보니 퀴어를 슬픔의 표상이나 상징으로 생각해요. 그런 대상화된 시선에 저항하는 마음으로 소설을 썼어요. 원래 퀴어 작가로 포지셔닝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데뷔작도 헤테로 섹슈얼 서사고, 첫 작품집 일곱 편 중에서 다섯 편이 헤테로 섹슈얼을 다루고 있거든요. 이번 소설집을 계기로 독자분들이 ‘이게 작가의 이야기일 수도 아닐 수도 있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면 좋겠어요. 독자분들의 열린 독서를 위해서라도 배수의 진을 치는 마음입니다.

ⓒ이윤섭/허프포스트코리아

그렇게 보니 소설을 끌고 나가는 방식도 지금 얘기한 주제 의식과 매우 닮은 것 같아요. 소설을 쓸 때 주인공이 특수한 상황에 있는지, 아니면 보편적인 상황에 있는지를 갈라서 많이들 생각하잖아요. 상영 작가의 소설은 특수한 상황인 것처럼 시작하지만 사실 보편을 다루고 있어요.
그게 제 정서이기도 한 것 같아요. 사실 소설 작법을 가르칠 때 특수와 보편을 나눠서 가르치는 게 저는 잘 이해가 안 됐어요. 문예창작과 대학원에 다닐 때도 그런 말을 들으면 “모든 일이 특수하고 모든 일이 보편적이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진짜 그렇지 않아요? 모든 일이 특수하다는 건 모든 게 보편적이라는 거잖아요. 모든 사랑도 그렇다고 생각하거든요. ‘다 똑같은 사랑’이라고 말하잖아요. 근데 사랑은 내가 해도 어제 한 사랑과 오늘 한 사랑이 다르고 같은 사람이랑 해도 매일 달라지고, 다른 사람이랑 하면 하물며 너무 달라지는데, 어떻게 남과 나 사이에 있는 감정의 형태를 같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이번 소설집의 제목이 ‘대도시의 사랑법’인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모성, 우정, 연애 같이 관계를 규정하는 감정들이 그렇게 하나(의 단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해요.

전작에서의 제제나 왕샤만큼의 비중으로 나오는 게 규호와 95학번 운동권 출신의 키 190짜리 형이에요. 규호와 운동권 형에 대해서 소설 속의 주인공 ‘영’은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궁금해요.
이번 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에 실린 중단편의 순서를 보면 ‘재희’는 영의 20대 초반에서 시작하고, ‘우럭 한점 우주의 맛’은 영의 20대 중반의 얘기가 담겨 있어요. 규호는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을 관통하는 영역이에요. ‘우럭 한점 우주의 맛’에 등장하는 형은 육체적 욕망에 이끌려 살던 정욕이 강한 캐릭터 ‘영’이 엄마가 암에 걸려 병시중을 들어야 하는 와중에 취업 준비까지 하는 특수한 상황에서 (어딘가에) 내몰린 듯한 기분으로 육체적으로 깊이 빠져드는 첫사랑의 대상이에요. 20대 중반에 첫사랑을 만나서 자신의 감정에 대해 탐구를 하는 거죠. ‘우럭 한점 우주의 맛’에서는 내 모든 일상이 그로 인해서 망가지는 사랑의 관계를 보여주고 싶었다면, ‘대도시의 사랑법’의 규호는 좀 더 많은 연애 경험을 겪은 상태에서 만나는 연애의 대상이죠. 불타는 사랑에도 끝이 있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는 상태에서 시작된 소위 (제가 싫어하는 표현이긴 하지만) ‘알콩달콩 꽁냥꽁냥’한 종류의 관계죠. 거대한 네러티브 없이 담백하게 정말 평범한 연애사처럼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야만 그 소설이 성공할 수 있겠다고 믿었어요.

스토리가 단순해서 좋아요. 예를 들면 ‘재희’는 ”영이라는 남자 게이가 재희라는 여자 이성애자 친구와 동거를 했고, 재희가 결혼을 해서 떠났다”라고 요약할 수 있죠. 단순한 줄거리인데 감상은 복잡해요.
줄거리로 따지면 정말 별 내용이 없죠. 그나마 ‘우럭 한점 우주의 맛’은 소설이 다루는 시간대가 3개여서 층위가 좀 있긴 해요. ‘재희’도 그렇고요. 수미쌍관이기도 하고 여러모로 장치와 설정이 단단하게 짜여 있어요. 단편소설로서 정합성을 갖춘 소설이죠. 반대로 ‘대도시의 사랑법’은 대단한 내러티브나 구조의 맛을 보여주고 싶었던 소설이 아니에요. 미농지에 검은 물이 한 방울씩 떨어져 번지듯이 대단한 계기 없이 사소한 사건을 계기로 헤어지는 연애를 그리고 싶었어요. 전 대부분의 연애가 그렇다고 생각하거든요.

쉽게 쓰는 것 같은데, 소설의 구성이 탄탄한 경우가 많아요. 은근히 적재적소에 장치들도 많이 들어가 있고요.
그럼요. 저 대학원까지 나왔는데요.(웃음) 농담이고요, 다소 보수적인 장르인 소설의 장치를 공부하기 위한 수련의 시간이 꽤 길었죠. 어려서부터 책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애였어요. 문학, 특히 소설을 사랑했고, (소설에 있어서는)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더 쉽게 읽히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해요. (장치에 대해서는) 오랜 시간 동안 (소설에서) 장치나 내러티브의 구조가 만들어져 온 이유는 그것이 독자들에게 깃발을 꽂아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에요. ‘이런 상징이 숨겨져 있어’라고 드러내는 건 그 기저에 뭔가가 숨겨져 있다는 걸 독자들이 감각하게 도와주는 거죠. 장치를 두는 건 독자가 소설의 스토리를 읽으면서 감정이나 이지로 뭔가를 더 얻어갈 수 있게끔 만드는 작업이라고 생각해, 게을리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소설의 분위기가 청승맞지 않아서 좋기도 했어요.
신파나 청승이 아예 없는 건 아니고 꽤 많은데, 표현의 차이인 것 같아요. 저보다 조금 앞선 세대만 해도 ‘싸이월드 감성’이 대세였잖아요. 슬픈 건 슬퍼 죽겠다고 쓰고, 자기 연민을 얼마나 잘 드러내는지가 관건이었죠. 제 세대는 그런 걸 잘 드러내지 않는 것 같아요. 슬픔을 선명하게 드러내봤자 아무도 쳐다봐주지 않고, 오그라든다고 말하는 시대가 왔어요. 시대 감각인 것 같아요. 슬픈 어조로 슬픈 얘기만 하는 게 오히려 독자를 청자를 멀어지게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화자인 영이가 매력적인 이유 중에 하나죠. 슬프다고 얘기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걸 안다는 점. 구김이 없다는 점도 마음에 들어요. 유복하게 자란 느낌이랄까요?
그건 제 가정환경과도 연관이 있어요. 저는 사실은 유복하게 자라지 못했어요. 집안이 여러 번 망한 적도 있고요. 그래서 영의 캐릭터에서 중산층의 평균 같은 느낌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대한민국에서 중산층으로 살아왔다면 아무런 파고도 거치지 않을 수는 없거든요. 어려움이 뭔지는 알지만 일어서지 못할 정도의 어려움을 겪지는 않은 캐릭터죠. 적당히 망해봐서 공포와 불안을 내재화한 채 자라났지만, 초중고대학을 나와서 소시민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캐릭터에요.

한국 소설에 그런 캐릭터가 정말 부족해요. 가장 많은 부류인데 지금까지는 너무 없어서 심지어 갑갑할 지경이었어요.
맞아요. 그게 어려워요. 문학이 좀 보수적이고 느린 장르니까 재현이 좀 늦었던 것 같아요. 저는 제가 그린 인물들이 제 세대의 평균 감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1980년대 후반 태생이니까 80년대와 90년대생의 감성을 고루 체화한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두 가지 어디에서도 어색함을 느끼지 않아서요.

번역이 나온다면서요.

한강 작가의 소설을 번역했던 데버러 스미스 씨의 회사에서 번역하기로 했어요. 스미스 씨가 직접 하시지는 않고 퀴어 번역가와 함께 작업할 예정입니다.

과거에는 소설가들이 사소설이라고 얕잡아 봤던 영역이 오히려 요새는 당사자성이라는 무기로 바뀐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당사자성도 좀 폭력적인 표현일 수 있어요. 당사자인 사람과 당사자가 아닌 사람 모두에게 말이죠. 당사자가 아니면 퀴어 소설을 쓸 수 없다는 얘기가 될 수 있으니까요. 요새는 이런 흐름을 좀 달리 부르는 추세가 있어요. ‘자신 만의 목소리’라는 표현이 그것이고요, ‘1인칭의 역습’이라는 표현이 등장할만큼 많은 분들이 내면화된 1인칭 화자를 쓰고 있어요. 저뿐만 아니라 아주 많은 작가가 본인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에세이처럼 읽히는 글을 쓰고 있으니까 시대가 원하는 흐름, 유행이라고 생각해요.

ⓒ이윤섭/허프포스트코리아

솔직한 규호를 두고 ‘계곡물이야? 왜 이렇게 투명해’라고 말하는 화자의 표현이 너무 웃겨요. 공공장소에서 읽다가 현웃이 터져서 민망했던 적도 있어요. 그런 표현은 어디에다가 따로 적어놔요?

제 일상의 말투예요. 제가 의도하고 ‘내 소설을 보고 사람들이 웃다가 죽게 만들리라’라고 작정하고 쓰는 건 아녜요. 원래 사람 웃기는 걸 좋아하고 친구들도 다 웃긴 애들이거든요. 애들끼리 같이 있으면 서로 얘기하고 싶어서 서로 번호표를 뽑아요.

근데 저는 영이가 자기 자신을 인식할 때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좀 내성적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아 웃겼어요. 예전에 저는 세상에서 제일 웃기고 끼가 넘치는 게이 선배랑 잠깐 일한 적이 있는데, 그 선배가 하루는 ‘게이 중에 끼부리는 애들 너무 싫지 않니?’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정말 귀를 의심했어요.

그럴 때가 제일 웃겨요. 동공이 떨리잖아요. 근데 영은 그렇게 객관화가 안 된 캐릭터는 아녜요. 일상의 저는 사실 엄청 외향적인 사람이지만, 영은 저보다는 좀 더 꼬여있고, 좀 더 내성적인 캐릭터로 그리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안 읽혔다면 실패한 거네요.

영의 외모에 대한 묘사는 ‘뚱고’(뚱뚱한 고양이)나 평균보다 큰 키라는 점을 빼면 거의 없어요.

맞아요. 일부러 많이 넣지 않았어요. 점점 살이 찌는 상태만 묘사해놨죠. 주변의 누구라도 대입할 수 있게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하도 자연인 박상영이라고 생각하니까, 그게 좀 싫어요.

걸그룹 취향에 대해서도 좀 궁금한 게 있어요. 전작의 왕샤는 유채영의 노래를 부르고 이번에는 영이 재희의 결혼식에서 핑클의 ‘영원한 사랑’을 부르죠.

유채영을 쓴 이유는 제가 그녀와 그녀의 음악을 정말 좋아해서예요. 그녀가 병으로 돌아가셨을 때 너무 슬펐어요.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최진실 씨가 사망했을 때 느꼈던 공허감을 유채영 씨가 돌아가셨을 때 똑같이 느꼈어요. 쿨의 원년 멤버였고 솔로로 나와서 이모션이라는 테크노 음악에 길이 남을 명곡을 내 놓았죠. 비록 곡의 성적이 대단히 좋지는 않았지만. 저는 유채영이 한국의 카일리 미노그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보면 둘이 닮기도 했어요. 사실은 한국 가요의 엄청난 팬이고 S.E.S. 팬클럽에 가입하기도 했어요. 실제로 결혼식 축가를 할 때 S.E.S.의 ‘러브‘랑 ‘너를 사랑해‘를 많이 불렀어요. 소설에 핑클의 ‘영원한 사랑’이 들어간 이유는 그 둘의 관계를 보여주기에 그 노래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해서예요. 핑클을 안 좋아한다고 말하긴 하지만, 근데, 또 사실 핑클을 좋아하기도 하거든요. 초등학교 때는 친구들에게 알리지는 못한 채 몰래 들었어요. 당시에는 SM(S.E.S.의 소속사)과 DSP(핑클의 소속사) 간에 반목이 너무 심했고, 저는 S.E.S.를 좋아하는 거로 정평이 난 상태여서 친구들에게는 알릴 수가 없었어요. 근데 사실 샤이하게 클레오, 핑클, 베이비복스 다 좋아했었죠.

카일리(소설 속 인물이 HIV로 짐작되는 바이러스에 붙인 이름) 얘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제 짧은 식견으로는 ‘대도시의 사랑법’이 프렙(HIV 예방 요법)이 나오는 첫 한국 소설 같아요.

사람들은 보통 그런 게 있는 걸 전혀 몰라요. 그들에게 프렙이란 게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썼어요. ‘사실은 이게 예방이 되는 거야’라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너무 직접적인 정보의 전달이라 소설이 할 기능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기는 했어요. 소설을 구리게 만드는 건 아닐까. 그러나 이 소설의 지향점을 생각해볼 때 어색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아까 얘기했던 개인에 밀착된 소설들, ‘역습의 1인칭’이 가진 특징 중 하나가 이런 식으로 매우 정치적일 수 있다는 점이죠.

맞아요. 그렇게 읽히기를 바랐어요. 계속 커밍아웃 하지 않은 작가라고 강조하는 건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들지 않기를 바라서예요. 일단은 보통의 연애 소설인 것처럼 유통 시켜서 많은 사람에게 충격적으로 읽혔으면 좋겠어요. 처음에 소설을 낼 때는 독자에 대한 고려가 없었어요. 벽을 바라보며 나를 웃기려고 쓴 거였는데, 두 번째 소설집을 쓸 때는 퀴어 당사자들로부터 피드백을 정말 많이 받았거든요. 우리 얘기를 써줘서 너무 고맙다. 당신 같은 사람이 나타나기를 바랐다. 그때 깨달았어요. 내가 대중을 향해서, 아주 많은 사람을 향해서 이야기를 쏘아 올리고 있구나. 이렇게 책을 팔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유통하는 순간 나는 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구나. ”작가님 소설 읽고 제가 커밍아웃할 용기를 얻었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받고는 대중매체인 소설의 가치와 책임감을 깨달았어요. 두 번째 소설집은 그런 걸 고려해서 썼고, 책을 낼 때도 많은 걸 생각했어요. 동네 서점 판형을 따로 만든 것 역시 그런 맥락에서입니다.

다른 판형이 있어요?

예, 동네 서점에서만 파는 판형을 따로 만들었어요. ‘올랜도를 위한 기도’(Pray for Orlando)라는 전나환 작가의 작품을 표지로 썼어요. 2016년 게이 클럽에서 100여명이 사상한 총기난사 사건의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한 그림이에요.

ⓒ이윤섭/허프포스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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