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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맨 떠난 뒤 거미인간의 홀로서기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이번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의 도입부 마블 로고 장면에는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 ‘아이 윌 올웨이스 러브 유’가 깔린다. 그 센스에 감탄하는 동안 이어지는 것은 ‘블립’(blip)이라는 자체 용어로 명명된 생명체 절반 삭제 사건과 <엔드게임>에서 자신을 희생하고 사라져 간 슈퍼히어로들의 면면, 그리고 그들에 대한 추모다. 그리고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토니 스타크(아이언맨)의 부재와 갑자기 그의 후계자로 공식지정을 받는 부담을 안은 피터 파커(스파이더맨)가 있다. 우리는 <파 프롬 홈>이 이 둘을 극복하기 위해 분투하는 피터 파커의 이야기가 될 것임을, 영화 시작 5분 이내에 파악할 수 있다.

이것은 <엔드게임> 뒤 아이언맨과 거물 마블 히어로들을 잃은 마블팬들을 위해 마련된 상실감 치유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이 치유와 함께 새로운 주력 슈퍼히어로들을 앞세운 이후의 마블 영화들(이른바 ‘페이즈 4’)로 넘어갈 매끈한 다리를 놓아주는 것이야말로 <엔드게임> 개봉 뒤 석달 만에 또 개봉되는 이 마블 영화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은 또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팬 아닌 영화팬들(이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판 ‘블립’ 이후에 얼마나 남아 있을진 모르겠지만)에게도 눈길이 가는 이름이다. 물론 샘 레이미 감독과 토비 매과이어의 <스파이더맨> 시리즈 덕분이다.

악당 ‘엘리멘탈’의 지구 습격

그런데 아시다시피 ‘여러분의 다정한 이웃’이던 그 스파이더맨이 얼마 전 우주, 그것도 상당히 머나먼 우주까지 다녀왔다. 그러니까 이번 스파이더맨에 붙은 ‘파 프롬 홈’이라는 부제는 이미 훨씬 전에 화끈하게 실현되었다. 그런 마당에 새삼 무슨 ‘파 프롬 홈’? 잘 아시다시피 이번의 ‘파’(far)는 광년 단위가 아니라 킬로미터 단위로 논할 수 있는 거리, 즉 대서양 너머 유럽이다. 즉 ‘스파이더맨/피터 파커’(톰 홀랜드)는 우주 수호가 아닌 수학여행차 유럽으로 떠나는데, 이 기초 설정에서 우리는 관광 무비를 향한 주최 쪽의 강력한 의지를 본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스파이더맨은 아이언맨이 물려준 인공지능 무기통제 시스템인 ‘이디스’(EDITH)를 받아(이디스를 볼 때마다 필자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커다란 안경 그림 아래에 ‘이것은 안경이 아니다’라고 적은 마그리트 패러디다) 어벤져스의 주축이 돼야 할 막중한 사명을 지니게 되었다. 그런데 기껏 수학여행? 더구나 <파 프롬 홈>의 수석 나쁜 놈(들)인 ‘엘리멘탈’들은, 이곳과는 다른 차원의 평행우주에 있는 지구를 절멸시킨 뒤 우리 차원의 지구까지 도륙 내려 드는 초시공간적 규모의 나쁜 놈들이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기껏 수학여행에 간 피터 파커를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면서?

물론 무성의한 설정이 있을 리는 없어서, 피터 파커가 처음 도착한 도시 베니스에 엘리멘탈이 때마침 편리하게도 나타나준 것을 빼면, 수학여행 코스와 엘리멘탈의 출몰 코스는 일치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피터 파커의 청소년적 고뇌가 등장한다. 수학여행지와 작전지역의 불일치는 수학여행이라는 찬스를 활용해 ‘엠제이’(MJ, 젠데이아)에게 꼭 흠모지심을 고백하려던 피터 파커에게 엘리멘탈의 내습에 준하는 재앙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동선 불일치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 유럽 각국을 넘나드는 스파이 액션물(대표적으로 <007>과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향취를 살짝 뿌린 이번 영화에서 ‘닉 퓨리’(새뮤얼 L. 잭슨)는 <007>의 ‘엠’(M)쯤에 해당되는 역할을 맡고 있는데, 그가 모종의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 공짜란 없는지라 닉 퓨리는 자신이 살던 지구를 엘리멘탈들에게 잃고 우리 차원의 지구로 넘어오게 된 난민 슈퍼히어로 ‘미스테리오/쿠엔틴 벡’(제이크 질런홀)과 협력하여 임무를 완수할 것을 부담스럽게도 자꾸만 명령한다.

전편에서 그 유명한 아이언맨과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얻은 듯 자체 발광하며 어떻게든 슈퍼히어로 판에 끼어보려 분투했던 피터 파커가, 이제 임무수행에서 느끼는 부담은 두 방향에서 온다. 하나는 엠제이와의 시간을 방해받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절친 네드(제이컵 배탤런)마저도 여행길에 여친을 만들어 우리 자기 놀이를 만끽하고 있다. 게다가 경쟁자 브래드(레미 히)까지 남학생들에게 그리 인기 있지 않다고 알려져온 엠제이에게 적극적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자신이 아이언맨 없이도 과연 이디스 같은 무시무시한 시스템이나 지구 수호 같은 거대한 임무를 맡아도 될까 하는 부담감이다.

두 문제는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해결된다. 전자는 엠제이 역시 피터 파커에게 관심을 보이며, 오히려 그녀 쪽에서 피터 파커를 따라오는 것으로 해결된다. 처음에는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했던 브래드는 어느 순간 시야에서 사라지고 엠제이는 피터 파커에게 관심을 집중할 충분한 이유를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까지 한다.(물론 그것이 꼭 본격 로맨스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설정은 샘 레이미-토비 매과이어 판 스파이더맨 특유의 사춘기적 동경과 갈망의 여지를 거의 휘발시키는 설정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보다 <파 프롬 홈>의 로맨스의 밀도를 떨어뜨리는 결정적인 요소는 엠제이-피터 파커 관계에 할애된 비중 자체가 작다는 것이다.

돌아온 직물 슈트 반가움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 이 영화의 주요 목적은 거기에 있지 않다. <파 프롬 홈>에서는 피터 파커의 두번째 문제가 훨씬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데, 영화가 채택하는 해결책은 피터 파커가 그냥 그 부담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얘기하도록 하고, 아무튼 <파 프롬 홈>도 예외 없이 마블 영화에서 기대되는 것들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다. 영화는 채 로고가 뜨기 전부터 새 슈퍼히어로인 미스테리오를 확실하게 소개해 올리고, 베니스, 프라하, 런던의 명소를 각 도시의 특색에 맞춰 파괴한다. 특히 물의 도시 베니스를 도륙 내는 엘리멘탈을 표현하는 각종 물 컴퓨터그래픽(CG)의 품질은 이젠 새삼스러울 것도 전혀 없지만 그래도 놀랍다.

또한 <홈커밍>만큼 높은 밀도는 아니지만, 작가들(크리스 매케나, 에릭 서머스)이 일정 간격으로 심어두고 있는 각종 다양한 조크 역시 평균 이상의 타율을 보여준다. <킹스맨>의 멀린(마크 스트롱)을 다분히 연상시키면서 코믹 훈훈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아이언맨의 오른팔 해피 호건(존 패브로)의 역할도 재미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언맨스러운 금속 슈트에서, 피터 파커 본인의 선택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직물 슈트가 주는 반가움은 크다. 이것은 물론 피터 파커의 정신적 홀로서기를 상징하는 설정이고, 그것은 영화 도입부에서 예고되었던 목적지에서 한치도 벗어남이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러닝타임 1시간 경과 시점쯤에 던져지는 피터 파커의 ‘부담 내려놓기’와 그것이 몰고 온 반전, 그리고 그 이후에 이어지는 안타까움에 의해 상쇄되고 만다. (잠깐! 이하 스포일러 경고) <인크레더블>의 ‘신드롬’을 다분히 연상시키는 ‘미스테리오/쿠엔틴 벡’ 캐릭터는 마블 영화에서 볼 것이라 예상하기 어려운 현란하고도 컨셉스러운 컴퓨터그래픽을 몰고 오는데(원작 코믹스에서 미스테리오는 영화 시각효과 전문가다), 이는 얼마 전 개봉했던 소니픽처스 애니메이션의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가 보여줬던 것 같은 높은 시청각적 쾌감과 그 끝에 이어지는 정서적 폭발력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결국 모든 게 가짜라도, 그래도 너희들을 보고 싶은 것만 보잖아?’라는 마블의 자기비판스러운 메시지의 공허함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홀로그램과 드론이라는 식상한 기술을 나쁜 놈의 주력 무기로 채택한 데 따른 진부함과 지루함이 반전 이후를 지배한다.

뭐, 어떻건 팬들은 케빈 파이기의 슈퍼파워가 약속하는 밝은 미래를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야말로 마블 스튜디오의 진정한 슈퍼파워이겠다. 하지만 그의 “(시네마틱) 유니버스 걱정은 접고, 영화 한편 한편을 걱정하라”는 지당하지만 잊기 쉬운 충고를 떠올리는 지금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겠다. 그 129분은 꽤 길게 느껴졌다. 최소한 그중 절반은.

* 한겨레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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