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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사고 현실 리포트 : 상산고만 의대 입시 사관학교인 것은 아니다

상산고만의 문제가 아니다.

ⓒ뉴스1

지난 3일 오후 서울 강남구에 있는 한 고등학교 앞에서 학생들이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기말고사 기간을 맞이해 시험 준비로 학교를 일찍 마친 학생들이었다. 이 학교는 학생과 학부모들 사이에 의대 진학 성적이 좋은 이른바 ‘의대 명문고’로 불리는 광역 단위 자율형사립고(자사고)다.

학교 앞에서 만난 고2 김아무개(17) 학생도 고등학교를 입학할 때 의대 진학을 목표로 이 학교를 선택했다고 했다. 이 학생은 “우리 반 35명 중에 10~20명 정도가 의대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의대 진학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냐고 물으니 “주로 어릴 때부터 수학과 과학 과목을 선행학습했다. 하지만 고2가 돼 보니 성적이 좋지 않아 (의대 진학은) 거의 포기했다”고 말했다. 그는 “수학 선행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했고, 과학은 중1 때부터 했다. 지금은 학교에서 하는 것 외에 8~9개 정도 따로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를 하고 있는데, 한달에 300만~400만원 정도 들어간다”고 했다.

같은 날 서울 강남구 학원가에 있는 입시 컨설팅 학원을 찾은 고1 학부모 ㄱ씨도 지난 3월 의대 진학을 위해 아이를 한 자사고(전국 단위)에 입학시켰다고 했다. ㄱ씨는 “무조건 자사고만을 고집한 건 아니었지만 ○○고가 의대를 많이 진학시키고 있고, 일반고보다는 학습 분위기가 좋아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며 “목표가 비슷한 친구들이 모여 공부를 하다 보면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ㄱ씨는 “아이에게 가능성이 보인다면 재수까지는 도전하게 할 생각”이라고 했다.

최근 전북에 있는 전국 단위 자사고인 상산고가 전북교육청의 자사고 재지정 평가에서 기준 미달 점수를 받으며 탈락해 파장이 일고 있다. 논란의 핵심은 이 학교가 입시 성과에 매몰돼 자사고 설립 취지와 동떨어진 교육을 하고 있는지 여부다.

김승환 전북교육감이 지난달 26일 국회에 출석해 “상산고 한 학년 숫자가 360명인데 재수생 포함해 275명이 의대로 간다”며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자사고는 교육과정을 다양화하고 다양한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설립됐다”고 말하면서 논란이 증폭됐다.

이후 상산고 쪽에서 “재수생과 삼수생 등을 제외하고 매해 60~70명 선”이라고 밝히면서, 의대 입학 숫자를 놓고 공방이 오가기도 했다. 상산고가 <한겨레>에 밝힌 올해 의학계열 진학 실적은 졸업생 386명 중 76명이다.

상산고 쪽 주장을 반영해도 재학생 약 20%가 의대에 진학한 것이어서 ‘의대 입시 사관학교’라는 세간의 별명에 ‘손색’이 없다. 하지만 의대 진학 실적이 중시되고 교육과정도 이를 위해 맞춰지는 것은 상산고만의 현실이 아니다.

 

의대 잘 보내는 ‘정시형 자사고’?

현재 전국에 자사고는 총 42곳이 있다. 이 중 전국적으로 학생을 모집할 수 있는 전국 단위 자사고는 10곳, 해당 지자체에서 학생을 뽑을 수 있는 광역단위 자사고는 32곳이다. 일반적으로 전국 단위 자사고에 상위권 학생들이 몰리지만, 강남 등 일부 지역의 광역 단위 자사고도 상위권 학생 비율이 일반고보다 높다.

흔히 입시업계에서는 학교의 교육과정이나 입시전략 등에 따라 자사고를 ‘수시형 자사고’와 ‘정시형 자사고’로 나눈다. 수시형 자사고는 토론과 발표 중심 수업, 다양한 비교과 활동 등을 중시한다. 학생부를 풍부하게 기술할 수 있어 상대적으로 수시 전형에 더 유리하다.

학생부 중심의 수시 전형이 전체 대입의 70~80%에 이르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반면 정시형 자사고는 수능 중심의 정시 전형에 방점을 두고 국영수 중심 교과편성, 강의식 수업, 수능 문제풀이 연습 등을 더 많이 하는 학교를 이른다.

상산고는 정시형 자사고의 대표 격으로 불린다. 우연철 진학사 입시전략연구소 평가팀장은 “상산고 학생 중 상당수는 3년간 수능을 준비해 정시를 노리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상산고 외에 서울의 ㅎ고, ㅅ고, 지역의 ㄱ고 등도 정시형으로 거론된다.
실제 상산고는 교육과정 평가에서 국영수 중심이어서 편성 비율의 시정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지난 6월 발표된 전북교육청의 ‘2019 상산고 재지정 평가결과표’를 보면, 상산고는 국영수 편성 비율에서 이과반의 경우 50%를 상회해 시정이 필요하다고 지적됐다. 또한 이과 10반, 문과 2반이어서 이과 쪽에 편중돼 있으며, 일부 인성교육과 진로교육 운영 형태나 내용도 부실해 보인다고 평가됐다.

상산고는 자사고를 준비하는 중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의대 많이 보내주는 학교’로 입소문이 나 있다. 상산고의 건학 이념인 ‘지성, 덕성, 야성이 조화된 사회 각 분야의 지도자 양성’과 상반된다.

ㅎ고의 경우도 비슷하다. ㅎ고는 고1 때부터 3년간 수업에서 평가까지 모든 과정을 수능에 최적화시켰다. 최근까지 이 학교 교장을 지낸 ㄱ씨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사실 고1은 교육과정 단계상 수능을 풀기 어려운 단계다. 하지만 학생들이 수능에 제대로 대비하도록 우리 학교는 고1 때부터 중간·기말고사 내신에 수능형 문제를 출제해 3년 내내 수능을 집중 대비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교장이던 때 ‘수능 중심 수업’ ‘수능 중심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했다. 그는 “아무리 학생부가 중요한 시대라도 우리는 수능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고 교사·학생들과 공감대를 이뤘다”고 말했다.

그가 설명하는 ‘수능 중심 수업’이란 이런 것이다. 예를 들면, 국어 시간에 그동안 수능에 출제됐던 비문학 문제를 인쇄해 학생들에게 읽게 하고 중심 문장을 찾아 밑줄 치는 방식을 훈련시킨다. 그는 “일반적인 독해와 달리 ‘수능 독해’는 지문과 함께 출제되는 4~5개의 문항을 모두 풀 때까지 해당 지문 내용을 기억해야 하는데, 이 지문을 암기하고 기억하게 하는 방식을 ‘수능 독해’라 이름 붙이고 학생들에게 훈련시켰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발표 수업을 하더라도 수능 문제를 늘 염두에 두고 수업하게 했더니 우리 학교를 ‘수능 잘하는 학교’로 불렀고, 어느새 ‘의대 잘 보내는 학교’로 이름이 나 있었다”고 말했다.

이른바 ‘정시형 자사고’가 의대 입시에 유리한 이유는 의학계열 학과들이 정시 전형 비중이 높고, 수시로 선발하더라도 ‘수능 최저학력기준’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입시업체 에스티유니타스가 집계한 ‘의학계열 2020학년도 모집현황’을 보면, 전국 37개 대학에서 수시 모집으로 1889명(63.2%), 정시 모집으로 1099명(36.8%)을 뽑아 수시 대 정시 비중이 6 대 4 정도였다. 서울 주요 대학 입시에서 수시 대 정시 비중이 8 대 2까지 이르는 상황과 비교하면 정시 비중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또 수시 모집 비중이 63.2%라 하더라도 2~3곳의 학교를 제외하고 대부분 수능 최저학력기준이 있다. 이 기준이 ‘3개 영역 2등급 이내’ 등으로 매우 높기 때문에 수능 성적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최종합격하기 어렵다.

재수는 필수 ‘4년제 고등학교’ 현재 고등학교 입시에서는 ‘의대 명문고’가 곧 ‘입시 명문고’로 통한다. 자연계 우수 학생들을 겨냥한 고등학교는 의대 진학 실적이 좋아야 학부모·학생들의 선택을 받는다. 이런 현상 뒤에는 현재 자연계 상위권 고등학생들의 의대 선호 현상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현실이 존재하고 있다.

서울 강남구에서 의대 입시 전문 학원을 운영하는 이아무개 소장은 “예전에도 이과 상위권들이 의대에 많이 가긴 했지만 물리학과, 컴퓨터공학과 등 자연대·공대 등으로 다양하게 진로가 갈렸다. 하지만 요즘은 성적만 되면 무조건 의대를 선택하고 본다”고 말했다. 자녀가 의대에 진학하길 희망한다는 한 고1 학부모는 “명문대 물리학과를 나와 유학까지 갔다온 동생이 연구직으로 일하며 박봉에 열악한 처우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 공부한 만큼 보상을 받는 의대에 아이를 꼭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심지어 입학 때 “의학계열 진학 시 추천서 미제공, 장학금 환수 등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에 동의하고 입학한 영재고·과학고에서도 결국 의대로 진학하는 학생이 늘고 있는 추세다. 서울과학고의 경우 올해 졸업생 130명 중 31명이 의대에 진학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고교 입시 전문 학원들은 중3 학생들을 상대로 “의대 진학을 희망한다면 자사고를 노려라” “정시에 대비하기 위한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다” 등의 조언을 하고 있다.

의대 선호 현상이 심화되다 보니 소위 ‘의대 명문고’로 불리는 자사고 등에서는 해마다 전교생의 상당수가 재수에 뛰어든다. 소위 ‘명문대’의 자연대나 공대에 합격하고도 의대를 가기 위해 재수, 삼수를 마다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학교 정보 공시 사이트 ‘학교 알리미’에 게재된 상산고의 졸업생 진로현황을 보면 올해 2월 졸업한 전교생 386명 중 대학에 진학한 학생은 202명(52.3%), 진학도 취업도 하지 않은 ‘기타’ 학생은 184명(47.7%)이다. 보통 입시기관에서 ‘기타’의 상당수는 재수생으로 해석하는데, 전국 평균이 21.7% 수준인 것에 견줘보면 상산고는 2배 이상인 셈이다. ㅎ고도 올해 2월 졸업생 중 대학 진학은 36.1%에 그치고, ‘기타’ 비율이 63.9%나 됐다.

일단 합격한 대학에 등록한 뒤 다시 대입 준비를 하는 ‘반수생’까지 합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이런 상황 탓에 정시형 자사고들은 ‘4년제 고등학교’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김은정 사교육걱정 없는 세상 연구원은 “일부 자사고들은 애초 설립 취지와 별도로 수능 위주 획일화된 교육을 하고 있고, 학생들은 의대 진학만을 목표로 재수, 삼수 계속 달려가고 있다”고 말했다.

정형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사무처장은 “몇몇 자사고가 도구가 되어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모아서 의대 보내는 데 집중하는 구조가 되다 보니 의사가 점점 영리만 추구하는 직업이 되고 있다. 국가경쟁력에도 도움이 안 되는 낭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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