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땔감 저널리즘과 구경할 권리의 시대

고유정이 일상에서 웃는 모습까지 굳이 공개해야 하나

싸움 구경, 불구경, 물난리 구경을 3대 구경이라 한다. 이런 악취미는 근원이 무엇인지 아리송해도 광범위하게 유행해왔다. 하나 더 붙인다면 처벌 구경이 있다. 재난과 함께 범죄는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는 얘깃거리다. 어떤 이가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어떻게 처벌받는지는 중요하고 흥미로운 공적 관심사다.

전근대 시기에 처형은 훌륭한 구경거리였다. 부모는 좋은 구경감을 놓치지 않게 해주려고 아이 손을 잡고 나왔다. 시야가 좋은 건물은 돈을 받고 창가를 내줬다. 싸움과 처형이라는 두 흥행 요소를 결합한 게르만 사회의 결투재판의 스펙터클은 인기가 더 많을 수밖에 없었다. 끔찍했기로는 명말 장수 원숭환의 최후만한 게 있을까 싶다. 그는 베이징 방어에 총력을 기울인 명장이었지만 후금의 홍타이지의 이간책에 걸려 반역죄를 뒤집어썼다. 구경꾼들은 어찌나 이가 갈렸는지 잘게 자른 살점을 사서 씹어 먹었다고 한다.

현대문명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처형을 대중이 직접 보지 않는다. 현대인들의 평균적 심성은 그런 장면을 견디기 어렵다. 이슬람국가(IS)는 극히 예외적 사례다. 그렇다고 일반적 호기심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지는 않았다.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사건 자체뿐 아니라 범죄자 신상, 처벌 과정, 이런 것들과 관련된 갖은 에피소드를 소비한다. 언론도 처형을 참관하는 미국에는 400명 이상의 최후를 지켜본 기자도 있다. 사형수들은 마지막 메뉴로 무엇을 골랐는지, 어떤 말을 남겼는지, 집행은 순조로웠는지가 생생히 전달된다.

처형 모습을 시시콜콜 아는 게 권리일까? 권리라면 무엇을 위한 권리일까? 최근 떠들썩한 ‘고유정 사건’에 대한 사회적 몰입도 알 권리와 ‘구경할 권리’의 모호한 경계를 생각하게 만든다. 경찰서에서 우왕좌왕하며 언론에 그 얼굴을 공개한 게 어떤 측면에서 공익에 기여한다는 것인지 의아하다. 일상생활에서 웃는 모습으로 찍은 사진을 공개하는 언론은 더욱 납득하기 어렵다. 진상 파악과 악녀를 발견하려는 욕구가 엉켜 있다. 흉악범이 평범한 외모라면 놀랄 일이고, 그런 짓을 할 만하게 생겼다면 ‘역시나’라는 탄성이 나올 것이다.

텔레비전 자료화면으로 자주 나오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법정 출석 장면도 후진적이다. 초점 없는 눈으로 수갑을 찬 모습은 ‘잘못하면 저 꼴 된다’는 교훈을 던질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이미지는 죄형법정주의와 무죄 추정 등의 대원칙에 상처를 낸다. 알 권리를 위해서라면 그가 법정에서 검사, 변호사와 함께 유무죄를 다투려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족하다. 벌은 조리돌림이 아니라 잘못에 대한 엄정한 조사와 평가를 통해 가해져야 한다.

알 권리를 넘어 구경할 권리의 시대가 본격화하는 데는 ‘땔감 저널리즘’의 역할이 크다. 호기심과 분노의 불길에 장작을 계속 던져주는 게 이들의 역할이다. 스마트폰과 CCTV는 알 권리와 구경할 권리의 뒤섞임을 더욱 강화해주고 있다. ‘좋아요’나 ‘화나요’ 따위의 반응을 유도하며 클릭 수 장사에 골몰하는 포털사이트의 풀무질도 위력이 크다. 기성 언론과 포털의 합작품인 땔감 저널리즘은 정치에서도 맹위를 떨친다. 싫어하는 정파에 대한 견제와 비판보다는 비틀기와 저주가 분노의 상승작용을 부추긴다.

독 안에 든 피의자의 표정이나 엽기적 행태에 대한 지나친 관심보다는 다른 곳에 에너지를 쏟는 게 사회적으로 더 의미가 있다. 혹시 막을 수 있는 일이었는지, 대처와 조사에 미흡한 점은 없었는지, 재발 가능성을 줄일 방법이 있는지 말이다.
알 권리의 주체는 책임감이 있고 신중하지만 구경할 권리의 주체는 무책임하고 성급해지기 쉽다.

* 한겨레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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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정 #저널리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