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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생이 간다’는 안 나오나

90년생에 대해 그만 좀 떠들어라.

ⓒEri Miura via Getty Images

<90년생이 온다> 열풍에 대한 저격 칼럼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80년대생인 그에게 책 내용은 자신이 겪어온 요즘 젊은것들의 모습과 매칭하기 어려웠다. 그의 한 지인 역시 책의 과도한 일반화를 지적했는데, 책 속 90년생의 특징은 ‘사무직 90년생 남성’이라는 젠더적 분석이었다. 90년대생 카테고리에 묶인 집단의 일원 혹은 요즘 젊은것들의 감수성을 공유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스테디셀러요, 화제다. 책의 저자는 꼰대 상사들을 위한 신입사원 공부 교재를 썼다는데 어째 청년세대에서 더 말이 많다. 어찌 보면 다행이다. 책을 안 읽는 사람보다 책 한권만 읽는 사람이 더 위험하다. 이 책 하나 읽고 청년세대와의 소통 문제는 이제 끝났다고 자신할 사람들이 많아지느니, 차라리 읽지 마시라고 부탁하고 싶다. 하지만 불행히도 아예 읽지 않은 사람은 없나 보다.

<90년생이 온다> 성공 이후 청년세대와 소통하기 위한 회장님의 간담회, 90년생을 위한 업무 환경, 세대 간극을 줄이기 위한 각종 방지책이 더 자주 언론에 나온다. 그 기사 속 노력하는 사람들이 보내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젊은이를 위해 이렇게 노력하는 ‘으른들’이에요! 기업뿐 아니라 정치권도 청년과의 소통에 항상 관심이 많다. 심지어 청와대는 최근 청년소통정책관 자리까지 신설했다. 청년이 더 잘 일하도록, 더 잘 살도록 돕기 위한 자세. 기성세대는 자신들이 관찰한 청년 문제의 현실에 공감하려고 노력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하지만 청년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지 오래다. 바뀌는 게 없다.

90년생에 대해 그만 좀 떠들어라. 자기 성찰 없는 공감은 위선이다. 권한도 권력도 없는 젊은 세대를 품평하는 이야기는 그만 듣고 싶다. 지금과 같은 사회 구조에서 청년기를 보낸다면 당신은 어땠을 것 같나. 으른의 눈으로 청년세대를 보지 말고, 지금 90년생의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길 바란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돕고 싶다면, 변화를 만들고 싶다면 자기 성찰이 우선이다. 내가 직접적으로,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해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아픔에 나 역시 책임이 있다는 큰 차원의 연대와 연민이 타인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귀속시킨다. 청년들의 미래가 너무 걱정돼서 한마디 안 할 수 없다고? 그렇다면 더더욱 자신의 과거를 성찰해야 한다. 미래는 현재의 일상이고, 현재는 과거의 결과다.

<60년생이 간다>를 읽고 싶다. 여전히 한국 사회 경제와 정치 권력의 중심인 베이비붐 세대들의 집단 회고기 및 성찰기다. 경제 호황과 성장, 정치 제도 변화를 겪어온 베이비붐 세대의 청년 시절을 지금 청년의 눈으로 평가한다면 어떨까? <90년생이 온다>를 둘러싼 으른들의 경악만큼 경악스러울지 모른다. 지금의 ‘90년생의 특성’이라는 걸 만든 윗세대들이시여, 이제 과거를 돌아볼 시간이다. 오해 말길 바란다. 죽음을 대비하란 말이 아니다. 미래를 위한 회고다. 자기 성찰은 시간의 영향을 받는 모든 존재에게 필요한 생존 도구다. 우리 사회의 물질적 풍요를 어떻게 지속 가능하게 만들 것인지, 풍요만큼 커진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지금 청년세대와 어떻게 연대할지 고민해보길 바란다.

<60년생이 간다> 1장 배경으로 국회를 제안한다. 20대 국회의원의 82%가 50대 이상이다. 이들이 달려가는 미래에 청년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설마 미래에도 청년을 시다바리나 보좌관으로만 쓰진 않겠지? 기대된다.

* 한겨레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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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90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