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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디터의 신혼일기] 로맨스 영화 속 주인공 같았던 적은 없지만

이 글의 마지막 문단을 남편에게 바칩니다.

ⓒAnna Semenchenko via Getty Images

허프 첫 유부녀, 김현유 에디터가 매주 [뉴디터의 신혼일기]를 게재합니다. 하나도 진지하지 않고 의식의 흐름만을 따라가지만 나름 재미는 있을 예정입니다.

몇 년 전, JTBC ‘청춘시대2’가 방송 중일 때였다. 그 당시 많은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청춘시대’ 명대사를 카드뉴스 식으로 정리해서 올리곤 했다. 주인공들의 고뇌 섞인 얼굴 위에 적힌 그 명대사들은 보기만 해도 가슴 저릿하게 공감이 갔다. 뭐 예를 들어 이런 것들 : “응, 회사원이 될 거야. 죽을 만큼 노력해서 평범해질 거야. 나는 지금 평범 이하다”, “그러고 보면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만했다” 뭐 이런 것들을 보며 새벽감성에 눈물 훔치던 날들이 있었다.

ⓒJTBC

며칠 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드러누워서 인스타그램 돋보기를 보던 중 한 페이지에서 저런 청춘시대 명대사를 줄줄이 늘어놓은 걸 봤다.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내가 몇 년 전 봤던 그 게시물과 똑같았다. 주인공들의 심각한 표정과 그 주변에 쓰인 멘트들.

근데 이상했다. 같은 게시물을 본 건데, 고작 몇 년 지났을 뿐이었는데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도 그땐 그랬었는데, 정도? 이제는 딱히 공감갈 부분이 없는 것이다. 취업하고, 결혼하고, ‘뉴디터의 신혼일기’도 쓰고, 아니다 싶은 인간관계는 미련없이 멀어지고, 뭐 그렇게 살다보니 몇 년 사이 고민이랄 게 없는 별일없는 하루하루가 완성된 모양이다.

아니, 이유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이렇게 감정이 메말라버린건 인생에 별일이 없어져서뿐만이 아니다. 남편의 영향이 상당할 것 같다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그는 내가 아는 인간 중에 제일 무던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일단 그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 공감을 느껴서 가슴이 저릿해본 경험이 정말 없는 사람이다. ‘라라랜드’를 보면서 내 귀에 대고 ”저거 포장만 잘 했지, 저 남자 주인공 완전 박진영의 ‘니가 사는 그 집’이잖아?”라고 속삭이는 산통깨기 전문가.

ⓒJYP

지금 니 옆의 그 남자의 자리, 그건 원래 내 자리잖아~~~

정확히 말하면, 그는 애초에 영화나 드라마 자체를 안 본다. 차라리 그 시간에 조선일보부터 허프포스트까지 좌우를 막론한 신문이나 뉴스를 읽는 사람이다. 가장 많이, 즐겁게 보는 건 축구지만. 감성이 담긴 콘텐츠를 굳이 찾아보지 않고, 팩트가 담긴 기사를 가장 편하게 보는 사람. 본능을 일깨우는 스포츠 경기를 가장 선호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그는 그의 고향 축구팀이 졌을 때를 빼면 감성의 폭이 늘 일정했다. 낭만적인 맛은 전혀 없었다. 로맨스뿐만 아니라 그 어떤 영화라도 기본이 될 기승전결·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구조가 이뤄질수가 없었던 것이다.

잘 차려입고 좋은 데 가서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우아하게 밥을 먹을 때도, 주말 아침 세수도 안 하고 떡진 머리에 수면잠옷을 입은 채로 집에서 짜장B쎄트를 시켜 입에 잔뜩 묻히고 볼이 터져라 우걱우걱 먹을 때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일관적이게 사랑이 느껴지기는 한다. 아주 작고 사소한 부분에서. 예를 들어 ”(휴지 건네줘서/헤어스타일을 칭찬해줘서/잘 먹어줘서 등등) 고마워”, ”사랑해”, ”정말 행복하다”고 계속 말을 해 준다든가.

ⓒMBC

나는 한예슬이 아니지만 이런 꼬라지로 먹어도 항상 사랑스러운 사람이 된 것 같달까...ㅎ

그러나 여기에 이벤트는 없다. 함께 있는 동안 내가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무슨 천생연분인지 여중여고여대 출신의 나와 남중남고남대(?) 출신의 신랑은 둘 다 주변에 이성이 없었기 때문에 질투할 껀덕지도 없었다.

근데 그 덕분에 모든 면에서 매우 안정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로맨스 영화 속 주인공들이 고군분투 하는 동안 가끔 나와서 웃다가 사라지는 조연 커플쯤 되는 느낌이랄까. 딱히 그들의 스토리는 알려진 게 없는데 얘네는 지들끼리 항상 행복한 것이다.

이상할 정도로 우리 둘은 싸움도 없고, 다툼도 없고, 그냥마냥 에블데이 어떤 상태든 간에 고마워. 사랑해. 행복해 라는 말을 들려주며 서로의 뺨을 부비부비했다. 볼살이 많아서 재밌달까?

어쨌든 나로서는 영화 속 주인공 같은 격렬한 사랑은 아닐지라도 무던하니 편안한 지금이 좋다. 누군가는 ”너무 사랑하는 사람과는 결혼하는 거 아니”라고 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편안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그때는 결혼밖에 답이 없지 않은가?

ⓒCSA-Printstock via Getty Images

어쨌든 나이를 먹고 나를 둘러싼 상황이 바뀐 것도 더 이상 ‘청춘시대’ 같은 드라마 명대사에 가슴 저릿하지 않게 된 원인이겠지만, 아무래도 생각할 수록 남편이 제일 큰 영향임은 자명하다. 매일 얼굴 보고 얘기하는 사람이 저렇게 감성이 없으면 내 감성마저 무뎌지는 것이 인지상정인 듯하다. 5년 동안 심심한 사찰음식만 먹고 살다가 부대찌개 한 입 맛보니까 와 이런거 나도 옛날엔 먹었지만 좀 지금 보니 너무 자극적인데? 싶은.

하지만 지금이야 이렇게 심심한 입맛에 만족하고 행복해하지만, 아마 육아가 시작되면 우리도 오락가락하는 매일매일 속에 감정의 자극가득한 똠양꿍을 억지로 삼켜야 할 터다. ‘청춘시대 명대사‘가 어쩌고, ‘라라랜드’가 어쩌고 하면서 여유 튕기면서 장문의 글을 쓸 시간이 있던 지금을 그리워하면서...

그래도 사람이 사찰음식만 먹고 살 수는 없으니, 가끔 먹는 라면같은 낭만으루다가 나에게 깜짝 명품백 선물 같은 걸 가끔 해주면 정말 일상에 자극이 되고 재미있을 같다. 보고 있지?

김현유 에디터: hyunyu.kim@huff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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