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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계급사회의 불안과 절망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봉준호의 영화 <기생충>은 하층민 가정이 상류층 가정에 흘러들어 경제적으로 기생하는 모습을 기상천외하게 그려내고 있다. 전도유망한 정보기술(IT) 회사 사장인 동익네에 기택의 아들 기우가 친구 민혁을 대신하여 영어과외선생으로, 딸 기정이 미술치료교사로, 기택이 운전기사로, 아내 충숙이 가사도우미로 들어간다.

흥미로운 것은 가족이 등장하는 이야기임에도 가족주의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기택네는 가족으로서의 유대는 고사하고 서로 간에 최소한의 예의도 차리지 않는다. 반면 동익의 아내 연교는 평상시에 남편에게 깍듯이 존대하며 재력가인 가부장을 철저히 섬기는 모습이다. 가족은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의 경제 공동체이자 계급의 은유로 작동한다.

동익네에 애초부터 기생하고 있던 문광네는 기택네와는 달리 끈끈한 유대를 보여준다. 이는 그들이 오랫동안 기생하며 상류층의 의식을 내면화한 결과로 보인다. 나아가 그들은 동익네를 비롯한 상류층을 동경하고 경배하기까지 한다. 문광의 남편 근세가 방공호를 나와 동익네가 아닌 기택네를 응징하는 후반부는, 자신과 다른 계급에 문화적으로 동일시하였을 때 같은 계급끼리 어떻게 분열하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하층민의 계급성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부정당하고 기만당한다.

그렇다면 상류층은 그들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영화에서 부각되는 것은 아무리 신분을 위장해도 감출 수 없는 특유의 ‘냄새’이다. 냄새에 대한 모멸감은 경제력이 없는 가부장으로서 억눌려왔던 기택이 폭발하는 계기로 작동한다. 이와 더불어 중요한 것은 동익의 아들 다송이다. 다송은 근세가 방공호에서 보내는 암호를 해독해내는 유일한 인물이지만 동시에 근세로 인해 심각한 트라우마를 앓고 있다. 다송은 그를 영원히 트라우마로 기억할 뿐 아니라, 그와 암호를 영영 연결 지을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계급 내부의 분열과 계급 외부로부터의 소외는 이들을 오로지 기생을 통해서만 공생할 수밖에 없는 닫힌 미로로 몰아넣는다. 근세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기택은 죽을 때까지 지하방공호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기우는 그의 희망과 달리 결코 기택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그의 희망이 담긴 편지는 기택에게 가닿을 수조차 없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신계급사회의 가장 익숙한 절망이다.

그러나 가망 없는 희망을 함부로 건네는 것보다는 당장 눈앞의 절망을 신중하고 정교하게 드러내는 편이 낫다. 나아가 이 영화는 절망에 충분히 집중하되 그것을 온전히 즐길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미덕을 발휘한다. 영화가 제시하는 절망에 대해 관객은 웃을 수만도 울 수만도 없는 실로 불안한 상태에 놓인다. 그리고 이 불안은 기택네가 감출 수 없는 냄새처럼 스크린을 넘어 현실에까지 침투한다.
영화가 끝나고 흘러나오는 참을 수 없이 경쾌한 음악은 영화 속의 불안이 영화에만 속하는 것이 아님을 충분히 예기하였다. 상영관을 나오자마자 마주친, 아마도 같은 영화의 관객이었을 다수의 곱게 차려입은 사모님들은 하나같이 어정쩡한 표정이었다. 한 재벌 총수의 야망으로 세워진 높디높은 타워를 빠져나와, 타워에 상권을 빼앗긴 낡은 지하상가에서 밥을 먹으며, 이 모든 경험이 실로 ‘상징적’이고 ‘시의적절’하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현실이야말로 그토록 기괴한 살풍경을 연출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영화 속 상징은 아이러니하게도, 혹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영화 바깥에 더욱 넘쳐나고 있다.

* 한겨레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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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