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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축제 20년, 촛불정권은 응답하라

″동성애 반대” 공언하는 황교안을 향한 게 아니다.

“광신자들이 열성을 부리는 것도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지혜로운 사람들이 열성을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다. 신중해야 하지만 소극적이어선 안 된다.”

볼테르의 이 말은 광신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던진 것이다. 애당초 광신자들에게서는 수치심을 기대할 수 없거니와, 수치심을 느낄 줄 모른다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은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동성애를 반대한다”고 공언하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등을 향한 게 아니라 정의와 공정의 ‘촛불 정권’을 자임한 집권세력을 향한 것이다.

“19세기가 노예 해방의 세기, 20세기가 보통선거권, 여성 참정권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성소수자들의 해방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역사의 시각으로 볼 때, 이 사안에 대한 문재인 정부와 여당의 태도는 신중하기는커녕 소극적이지도 않으며 차라리 ‘비겁하다’는 표현이 가장 어울린다. 금태섭 의원(더불어민주당)은 “민주당은 진보적 가치를 표방하고 소수자 보호를 중시하는 정당이다. 우리 당이 적극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는데, 그가 가령 “동성애 반대” “차별금지법 반대”를 밝혔던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나 김진표 전 경제부총리 등을 설득하기 위한 토론회를 열었다는 소식은 아직 듣지 못했다. 국회에서는 각종 토론회가 많이도 열리는데 말이다. 차별금지법은 2007년 이래 국회 부근에서 표류한 채로 있다.

내가 ‘적극적인 앨라이(Ally, 성소수자들(LGBTQ)이 겪는 차별에 반대하고 평등사회를 위해 연대하는 사람)’가 된 것은, 이 땅에 만연한 무지와 편견 때문에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고 있는 성소수자들에게 동시대를 사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함이 앞서기 때문이다. 또 “한 사람이라도 자유롭지 못한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며, 18세기 영국의 보수주의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의 “선한 사람들의 무관심이 악을 키운다”는 말을 새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릇 잘못된 언행은 비난할 수 있지만 존재 자체를 비난할 수 없는 법이건만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마땅한 기독교인들을 비롯하여 인간존재의 사랑을 ‘음란’으로 덧칠하면서 손가락질하는 적반하장을 보이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여기에 방관하거나 침묵하는 정치인들의 얼굴에서 ‘위선의 민낯’을 보고 있어서일 것이다. 지난 5월17일 대만 입법원이 아시아 최초로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특별법안을 통과시켰다는 소식에 그들의 사회, 그들의 정치에 대한 부러움이 앞섰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타이베이 입법원 앞을 지키고 있던 동성결혼을 지지하는 시민들과 인권운동가들은 법안 통과 소식이 전해지자 환호성을 지르며 서로 끌어안고 눈시울을 붉혔다”는 보도를 읽을 때엔 그 광경이 선하게 다가오면서 나도 모르게 가슴이 복받쳐왔다. 법안 통과 직후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2019년 5월17일 대만에서 사랑이 이겼다. 진정한 평등을 위한 큰 걸음을 내디뎠고 대만을 좀 더 좋은 나라로 만들었다”고 트위터에 썼다. 법안이 발효된 5월24일에 대만 전역에서 혼인신고를 한 동성 커플은 총 526쌍으로 이 중 여성 커플 341쌍, 남성 커플 185쌍이었다고 한다. 이 땅에는 언제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Tyrone Siu / Reuters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소수자들의 해방을, 유럽과 미국에서 시작된 동성결혼권의 흐름을 막을 수 없다는 점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시각과 태도는 오늘 인종차별, 여성차별과 함께 ‘정치적 올바름’의 차원을 넘어 세계시민의 결격사유가 되고 있다. 이번 스무번째 퀴어 축제를 맞아 “미국은 성소수자들에 대한 모든 종류의 폭력을 단호하게 반대한다”고 강조한 주한 미국대사의 언명이나, “다양한 사회가 강한 사회다” “모든 사람은 그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든 누구를 사랑하든 간에 공정한 기회를 제공받아야 한다”면서 퀴어 축제 지지를 표명한 영국·미국·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뉴질랜드·유럽연합(EU)의 6개국 대사의 공동입장 성명도 이런 국제적인 추세를 반영한 것이다. 동양문화권인 대만이 이 흐름에 동참하면서 앞으로 문화상대주의 주장도 조용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힘겹고 오랜 민주화 과정을 거쳐 촛불로 이룬 정권 아래 있음에도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멀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이 땅은 오랫동안 공포 마케팅이 관철되었다. 정치사상가 레지스 드브레는 “정치는 공포와 희망의 두 요소로 구성된다”고 말했다.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정치의 공포 마케팅은 더욱 강화된다. 유럽의 극우정치세력은 난민, 이민자, 무슬림 등 외부자들에 대한 공포 마케팅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한국의 극우세력이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해온 북한에 대한 공포 마케팅은 이민자, 난민 등 외부자들로 확장되어 혐오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이질적 내부자인 성소수자들로 확장되어 “피땀 흘려 세운 나라, 동성애로 무너진다”는 공포의 구호를 낳는다. 이런 모습은 개신교세의 확장성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자유한국당이 오늘 경제 문제까지 공포 마케팅의 근거로 삼는 것도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의 확장성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반영한다. 그런데 우리가 기독교문화의 유럽이나 동양문화권인 대만과 다른 점은 무엇보다 “개신교 역사상 가장 타락”(손봉호 교수)한 한국 교회의 존재다. 서글픈 점은 대다수 사회 구성원들이 공포 마케팅 정치에 워낙 오랫동안 노출되어 익숙해졌다는 점이며, 이들의 표를 의식해야 하기에 개혁적인 정치인들조차 희망과 사랑의 정치로 공포 마케팅을 낙후시킬 줄 모른다는 점이다.

이번 퀴어 축제의 주제는 “스무번째 도약, 평등을 위한 도전”이었다. 강명진 조직위원장은 “다양성이 존중되는 평등한 사회를 이루는 데 정부와 정치권이 좀 더 의지를 갖고 움직여달라는 바람을 주제에 담았다”고 말했다. 퀴어 축제의 구호는 성소수자들이 처한 실존적 현실에서 출발하여 이를 극복하여 해방에 이르자는 ‘외침의 역사’가 담겨 있다. 초기에 “크게 외쳐라” “한 걸음만 나와 봐!” “멈추지 마, 지금부터야!” “움직여!” 등으로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외쳤다면, 최근에는 “사랑하라, 저항하라” “지금 우리가 바꾼다” “평등을 위한 도전” 등으로 변화를 외치고 있다. 성소수자들에게 퀴어 축제는 대명절이다. 그들은 “‘퀴어뽕’ 맞고 1년을 버틴다”고 말하기도 한다. 왜 아니겠는가? 일년 내내 존재를 부정당하고 차별, 배제당하는 고통과 설움을 날려버려야 하겠기에. 20년 동안의 외침, 이제 촛불은, 정권과 시민은, 성소수자들에게 응답해야 한다.

* 한겨레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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