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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6월 13일 23시 17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06월 13일 23시 17분 KST

신의 뜻에 따른 트랜스젠더

교황청이 '현대의 성별 정체성 개념'에 대한 문서를 발표했다

FernandoPodolski via Getty Images

로마 바티칸 교황청이 지난 10일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하느님 아버지’라는 공식 문서를 발표했다. 외신에 따르면, 앞으로 전세계 가톨릭 학교에서 성교육 자료로 쓰일 이 문서에는 인간이 자신의 성을 선택할 수 있다는 현대의 성별 정체성 개념이 자연의 섭리를 어기는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다양한 성별 정체성은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자유의 개념을 혼동하여 생기는 순간적인 욕망의 증상이며,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출산을 위한 보충 관계임을 성교육에 일관성 있게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뉴스를 접하고 깊은 한숨이 나왔다. 처음엔 성적 소수자의 인권에 진일보한 발언을 했던 교황은 왜 갈수록 뒷걸음을 치시는 것일까. 무엇보다 성별 정체성 개념과 트랜스젠더의 삶에 대해 제대로 한번이라도 알고자 했다면, 그런 과정을 거쳤다면 교황청은 결코 저런 문서를 발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치 대부분의 사람은 선천적으로 결정된 성별에 따라 살고, 트랜스젠더들만 후천적으로 성별을 선택한 것처럼 다룬다. 하지만 신과 자연이 미리 결정한 것을 어떻게 한낱 인간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트랜스젠더에게만 왜 그런 능력이 있단 말인가. 오히려 트랜스젠더가 마음대로 성별을 바꾼다고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신이 주신 선천적인 인간의 성별 자체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신이 모든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믿음으로 본다면, 신 앞에서 트랜스젠더는 성을 바꾼 사람이 아니라 신이 주신 대로, 타고난 성별 정체성대로 사는 사람들이다. 고작 생식기 모양을 두고 남자와 여자를 정한 건 인간이 아닌가.

생물의 분류 체계를 배울 때 사람들이 가장 신기하게 생각하는 건 고래가 어류가 아니라 포유류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고래의 신비한 능력 때문은 아니다. 포유류라는 분류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고, 그 인간들이 포유류는 땅 위에 산다고 선입견을 가졌기 때문일 뿐이다. 포유류인 고래가 물속에 산다고 해서 신의 창조 질서나 자연의 섭리를 어긴다고 주장한다면 어리석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인간이 만들어낸 분류 기준은 결코 신의 그것과 같을 수 없는데.

교황청의 주장대로 신이 인간에게 성별을 부여하셨다면, 나에게 주신 성별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깨닫고 느끼는 과정 없이 어떻게 자신의 성별을 알 수 있을까. 가령 당신이 하리수씨에게 신이 부여한 성별은 남성이며, 여성은 절대 아니라고 확신한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신께서 인간에게 성별을 부여하실 때 염색체나 자궁, 고환 등에 뜻을 심으셨다고 주장해야 할 텐데 그렇다면 인간에게 뇌는 왜 필요한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아갈지를 고뇌하고 성찰하는 삶의 자세는 왜 필요한가.

우리는 인간의 성별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토록 중요한 나의 성별을 타인이 마음대로 결정하고 규정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더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는 태어나면서 단지 구분될 뿐이다. 외부 생식기 모양을 보고 주위에게 아들 혹은 딸이 태어났다고 알린다. 만약에 클리토리스라고 하기엔 크고 페니스라고 하기엔 작은 외부 생식기를 가지고 태어났다면 의사와 부모는 수술을 결정한다. 특정 크기 이상이 되거나 이하가 되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이렇게 부여받은 성을 무리하게 끼워맞추기도 한다. XX 염색체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두 자궁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도 아니며, XY라고 해서 페니스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지난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전쟁과 학살이 신의 뜻이란 거짓 명분으로 저질러졌는지를 떠올려볼 때, 편견과 폭력을 신의 선택으로 포장하는 인간의 오만함이 너무 지겹고 또 한없이 슬프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단 하나다. 이 모든 억압과 차별에도 불구하고 트랜스젠더는 역사상 단 한번도 사라지지 않고 존재해왔다. 인간으로 태어나 자기 자신다움을 지키라는 것, 이것이 교황청보다 더 강력한 신의 뜻이라고 나는 믿는다.

* 한겨레에 게재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