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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발은 껍질만, 치킨은 다리만' 마이크로 짜증 유발자의 사례를 모아봤다

단무지는 제발 개인 접시에

ⓒMBC 영상 캡처

대학 동기 여럿이 모인 메신저 창에서 약속을 잡는다. 한 녀석이 말한다. “난 상황 봐서 되면 갈게.” 아주 옅은 분노가 치민다. 온다는 거야, 안 온다는 거야? 이런 사례가 또 있는지 주변에 물어봤더니 한 후배가 “다섯명 이상 모이면 한 명은 꼭 그런다. 그건 그 집단의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라며 울분을 토했다.

또 다른 후배는 “그런 사람은 결국 다른 약속 생기면 잡겠다는 것”이라며 “그런 사람과는 약속을 안 잡는 게 상책”이라고 말한다. “5분 늦는다고 말해놓고 15분 늦는 사람”, “주말 약속 잡아놓고 당일에 취소하는 사람”, “단체 창에 공지로 올렸는데 꼭 다시 물어보는 사람” 등이 비슷한 부류에 속한다. 화는 나는데 화를 낼 수는 없는 이런 ‘마이크로 짜증’ 나는 상황이 세상에 참 많다.

처음엔 나와 내 주변 사람들만 유별나게 까칠한 줄 알았는데, 취재를 시작하자마자 수백 건의 제보가 모였다. 사례가 쌓이다 보니 겹치는 것들이 있어서 범주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그중에서 위생에 무심한 사람들 때문에 짜증이 난다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립스틱이나 립밤을 빌려줬더니 입술에 대고 바로 눌러 쓰는 사람”, “먹던 군만두를 한입 베어 물고 공용 접시에 침이 닿도록 다시 내려놓는 사람”, “화장실에서 용무를 마치고 세면대를 그냥 지나쳐서 나가는 사람” 등이 이 영역에 속한다. 이 영역에 속한 ‘짜증’ 중 최고는 “단무지 한입 먹고 식초 뿌린 단무지 그릇에 다시 놓는 사람”이다.

제발 침이 묻은 단무지는 개인 접시에 놓아 주길 바란다. 립스틱이나 립밤은 면봉으로, 면봉이 없으면 양해를 구하고 손가락으로 발라주길 바란다. 특히 “립스틱 바른 입술에 립밤을 대고 바르면 립밤 끝이 시뻘게지는데, 정말 싫다”고 한다.

먹는 거 때문에 짜증이 나는 경우도 의외로 많았다. 한 후배는 “남자친구가 냉채 족발을 시켜놓고 자기는 해파리가 맛있다며 다 골라 먹었다”라며 “냉채족발은 해파리가 핵심”이라고 화를 냈다. 비슷한 예로 “치킨을 시켜놓고 닭가슴살은 퍽퍽해서 못 먹겠다며 다리와 날개만 먹는 사람”, “족발 먹을 때 살코기는 싫다며 야들야들 껍질만 골라 먹는 사람”, “피자 먹을 때 테두리를 버리는 사람. 그러나 치즈 크러스트 피자를 먹을 때는 테두리부터 먹는 사람”이 있었다.

편식은 본인에게도 안 좋고 다른 사람의 정신 건강에도 안 좋으니 자제할 것. 또 다른 친구는 “뭐 먹고 싶으냐고 물어봤을 때 ‘아무거나’라고 대답하는 건 괜찮다”라며 “그러나 ‘아무거나’라고 말해서 김치찌개 먹으러 가자 그랬더니 ‘매운 건 싫다’고 하면 옅은 분노가 인다”고 밝혔다.

‘아무거나’라는 대답은 선택권의 포기를 의미한다는 걸 명심하자. 이와 비슷한 짜증을 유발하는 예로는 “나는 짜장면도, 짬뽕도 먹고 싶은데”라고 말꼬리를 흐리면서 “나눠 먹자면서 짬뽕시키라”고 종용하는 경우다. “메뉴판의 지휘자처럼 여러 메뉴를 혼자 고르는 사람”도 짜증을 부른다. 식탁 위의 민주주의는 ‘개인당 한 접시’부터 시작이다.

요새는 많이 사라졌지만, 출신 지역에 대한 편견 역시 짜증을 유발한다. 강릉 출신인 한 후배는 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그 말을 할 때마다 “강릉 사람이 왜 회를 싫어해?”라는 말을 듣는다고 한다. 옆에서 이 말을 듣던 속초가 고향인 동료는 “정말 울화가 치민다”라며 “회가 나오면 꼭 나한테 자연산인지 양식인지를 물어보며, ‘속초사람이니까 알 거 아니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밝혔다.

너무 당연하게도 경주 사람이라고 한우만 먹고 사는 것은 아니다. 포항 사람이라고 다 과메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거제가 고향인 한 후배는 “사투리 안 쓰는 게 신기하다며 사투리 좀 써보라고 하는 사람이 꼭 있다”고 말했다.

이런 ‘마이크로 짜증’이 갑갑한 이유는 그 옅은 분노를 풀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학교가 아니니 선생님께 이를 수도 없고, 이런 작은 일을 인사과에 찌를 수도 없고, 범죄가 아니니 경찰서에 신고할 수도 없다. 게다가 대놓고 얘기했다가는 갑자기 분위기만 얼어붙기 십상이라고 한다. 한 후배는 “말도 못하고 속만 썩이다 보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이 미워 보인다”고 말했다.

사례를 모으다 보니 인생에 대한 자신감이 조금 옅어졌다. 공지로 올린 회식 약속을 자주 잊어버려서 매번 당일 오후 5시에 “헉, 오늘이에요?”라며 놀라는 사람이 바로 나다. 혹시 군만두를 접시에 내려놓은 적이 없었는지, 족발을 먹을 때 껍질만 골라 먹지는 않았는지, 속초 친구에게 강원도 감자 칭찬을 한 적은 없었는지 인생을 찬찬히 돌아본다.

* 해당 칼럼은 한겨레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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