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인 직장인 ㄱ(26)씨는 2015년부터 서울퀴어문화축제(이하 퀴어축제)에 참가해왔다. 처음엔 퀴어퍼레이드의 행진만 했는데 2~3년 전부터는 행사의 주축이 됐다. 굿즈(기념품)를 만들어 축제에 온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지난해에는 모터바이크를 타고 행진하는 ‘레인보우 라이더스’에도 참여했다.
ㄱ씨는 “저희끼리는 퀴어축제를 ‘명절’이라 부른다. 그야말로 1년에 한번 치르는 ‘대명절’”이라며 “소수자로 살면서 1년 동안 일상에서 여러모로 버티기 힘든 순간이 많은데, ‘명절’ 때는 안전하고 다수가 된 느낌”이라고 말했다. 성소수자들은 “‘퀴어뽕’ 맞고 1년을 버틴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성소수자부모모임의 활동가 지인(50)씨도 2014년부터 꾸준히 퀴어축제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축제에 나가면서부터 성소수자인 아들(22)을 이해하게 됐다. 지인씨는 “퀴어축제에 한번 나가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우리 애가 남한테 피해주는 것도 아닌데 왜 미워해야 하나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5년간 꾸준히 축제를 지켜본 지인씨는 “해를 거듭하며 축제에 나오는 인파가 늘어나고 분위기도 평화적으로 변하는 것 같다”며 “성소수자 당사자들만의 축제가 아니다. 시민들, 외국인 관광객, 자녀를 데려오는 부모들도 많다”고 했다.
2015년부터 매년 초여름, 서울 중구 시청 앞 서울광장은 무지갯빛 축제의 장이 된다. 친구들과 나온 학생들, 엄마와 딸, 할머니와 손주, 외국인 관광객 부부, 일상에 지친 직장인까지 수만명 규모의 시민이 탁 트인 광장의 초록 잔디에 모여 흥겨운 음악 속에 행사를 즐긴다. 평소에 입지 못한 화려한 무지개색 의상을 입기도 하고 머리에 과감한 장식의 모자를 쓰는 것도 어색하지 않다. 얼굴에 오색빛깔 물감을 바르기도 한다.
서울 관악구 신아무개(28)씨는 성소수자는 아니지만 ‘앨라이’(지지자)로서 광장에 나간다. 신씨는 퀴어축제에서 외치는 구호들이 남의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사랑하라, 저항하라’(2015). ‘우리 존재 파이팅’(2016), ‘지금 우리가 바꾼다’(2017), ‘평등을 향한 도전’(2019) 같은 말들이 자신에게도 확 와닿는 느낌이다. 신씨는 “해방감이 터져나오는 축제라서 그런지 나도 그 해방감을 같이 경험한다”고 말했다.
성소수자(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등을 통칭하는 표현)의 인권 향상을 목표로 2000년 시작된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올해로 20회가 됐다. 지난 5월21일부터 본격 시작된 올해 축제는 세번의 연속 강연회, 광장에 분홍빛 대형 불빛을 밝히는 점등식 ‘서울핑크닷’(5월31일), 서울퀴어퍼레이드(6월1일), 영화제(6월5~9일)로 꾸려졌다.
축제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퀴어퍼레이드가 열리는 1일에는 서울광장에 준비된 부스 80여곳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이 펼쳐지고 오후 4시부터 행진이 진행된다. 역대 최대 규모인 11대의 퍼레이드 차량과 함께 을지로입구역, 종각역, 광화문역을 돌아 서울광장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퍼레이드 이후에도 오는 5~9일 한국퀴어영화제가 열려 74개 작품이 서울 대한극장에서 상영된다.
‘그들만의 명절’에서 ‘모두의 축제’로
퀴어축제는 19년 전인 2000년 8월26일 종로구 대학로에서 70여명이 “크게 외쳐라 ‘나는 동성애자다’”라는 슬로건에 맞춰 행진하며 처음 시작됐다. 그사이 지난해에는 6만여명이 참가하는 대형 행사가 됐다.
직장인 박아무개(38)씨는 “몇년 전 축제에서 7살짜리 자녀를 데리고 나온 엄마를 만났다. 그가 아이에게 이렇게 다양하고 넓은 세상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는데, 많이 공감했다. 올해엔 나도 생일을 맞은 8살 딸과 함께 나가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젊은층뿐 아니라 나이가 많은 이들도, 종교가 있는 이들도 축제에 함께한다. 기독교인 이아무개(61)씨는 같은 교회에 다니는 나이가 비슷한 50~60대 또래들과 함께 퀴어축제에 가곤 한다. 이씨는 “성소수자 차별이 없는 교회에 다닌다. 성소수자를 억압하지 말라고 응원하러 갔는데, 이젠 응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축제가 번창했다”고 웃었다.
2000년대 초반에만 해도 사회에서 ‘없는 존재’처럼 지내는 성소수자를 불러 모으는 것에 집중해야 했다. 이런 분위기는 축제 슬로건에서도 드러난다. 1회에서 4회까지는 “크게 외쳐라”(2000), “한 걸음만 나와봐”(2001), “멈추지 마, 지금부터야”(2002), “움직여!”(2003) 등 존재를 드러내자고 제안하는 문구가 중심이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퀴어 절정”(2005), “위풍당당 퀴어행복”(2006), “This is Queer!”(이게 퀴어야, 2007)처럼 세상 밖으로 나온 당사자들에게 당당하게 축제를 만끽하자는 내용들로 나아갔다.
20년간 퀴어축제의 흐름을 보면 한국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역사가 보인다. 법무부가 성소수자를 법 적용 대상에서 빼버린 차별금지법을 입법예고한 2007년과 이듬해엔 ‘작렬! 퀴어 스캔들’이란 구호를 내세웠다. ‘문제적 사건’을 뜻하는 영단어 스캔들을 넣어 “퀴어가 정말 문제인지 되물어보자”는 화두를 역으로 던진 것이다.
2010년부터는 더이상 ‘아우팅’(본인 의지가 아닌 타자에 의해 성소수자임이 공개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는 다짐으로 행진을 할 때 참가자들이 촬영을 거부하며 머리에 두르던 ‘빨간 띠’ 제도를 없앴다. 그동안 ‘아우팅’은 성소수자들에게 공포의 단어였기에 상당히 모험적인 일이었다.
2012년엔 ‘퀴어연가〔가족:연을 맺다’라고 슬로건을 짓고 성소수자의 가족구성권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했다. 올해 20회를 맞은 서울퀴어문화축제의 슬로건은 ‘스무번째 도약, 평등을 향한 도전’이다. 해마다 어려운 여건에서 도전하며 개최해온 축제가 지금의 성과를 뛰어넘어 더 도약해야 한다는 의미다.
퀴어퍼레이드는 2000년부터 2014년까진 대학로, 홍대 앞, 신촌, 이태원, 종로, 청계천 등지에서 열리다 2015년부터 서울광장으로 장소를 옮겼다. 2015년 홍대 앞, 신촌 등 그동안 개최해온 장소에서 마포구청, 서대문구청 등이 더이상 성소수자 관련 행사를 허가해주지 않았다.
대학로엔 동성애 반대단체들이 축제가 열리지 못하도록 미리 집회신고를 해놓았다. 마땅한 축제 장소를 찾지 못해 발을 구르던 조직위원회는 별 기대 없이 서울광장이 빈 날짜에 사용 신청서를 냈다. 조례상 불수리 사유가 없자 어렵지 않게 승인이 났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한채윤 서울퀴어문화축제 기획단장은 “시청 앞에서 성소수자가 다 함께 모인다는 것은 시민으로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한국에서 받아들여졌다는 뜻이었다. 축제가 상징성이 있는 서울의 가장 중심부 공간으로 나오면서 참가자들 스스로도 더 당당해졌다”고 말했다.
천의영 경기대 교수(건축학)도 “도시의 열린 광장은 다양한 생각과 이질적 문화를 수용하게 하는 공간적 장치 ‘샐러드 볼’(다양한 집단이 섞이는 공간)이 된다. 서울광장에 나와 축제를 즐기면 성소수자가 ‘완전한 타자’에서 ‘인지 가능한 타자’가 되면서 시민들이 성소수자를 이해하는 감수성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2000년 10명 규모였던 퀴어축제 조직위원회도 2015년 40여명을 넘어서 올해는 48명이 축제를 꾸리고 있다. 퀴어축제는 지역적으로도 서울을 넘어 2009년 대구, 2017년 부산과 제주, 2018년 광주·인천·전주, 올해 경남 등 전국 8개 도시로 퍼져 나갔다.
행사 규모가 커지면서 퀴어축제의 참가 부스 선정도 경쟁이 치열해졌다. 올해 140개 단체가 퀴어축제에 부스를 마련하고 싶다고 신청을 해왔지만 공간이 한정돼 74곳만 허용됐다. 선정되지 못한 단체 중 민주노총이 포함된 것을 두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성소수자와 노동자가 왜 연대하지 않느냐”는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축제 주최 쪽은 “해당 단체가 신청서를 허술하게 쓴 탓”이라고 해명했지만 논란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올해 대리모 사업을 하는 한 기업의 후원을 받다가 중단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기업 후원을 받고 있다”며 일부 시민들로부터 지적을 받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