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공유주방에서 친구들과 뵈프 부르기뇽을 만들었다

내가 고른 레시피, 우리가 함께 만든 요리

  • 홀로
  • 입력 2019.05.31 20:47
  • 수정 2019.05.31 20:49
ⓒhuffpost

누군가에게 요리를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쌀쌀해지는 계절 즈음이었다. 이전부터 음식과 요리에 관심을 두고 있었고, 심심찮게 집에서 요리를 해 먹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한 요리를 함께 먹어줄 가족도 없는데다 내 집에서 계속 원하는 요리를 하기엔 도구도, 공간도 모자랐다. 내가 혼자서 하고 혼자서 먹는 요리는 가끔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 자랑삼아 올리고 쌓이는 ‘좋아요’와 댓글에 잠시 뿌듯함을 느낄 뿐, 생존을 위한 수단에 가까웠다.

그러다 즐겨 보던 외국 요리 영상과 잡지에서 친구들과 함께 부담 없이 홈 파티를 여는 법에 대한 글을 접했다. 밖은 쌀쌀했지만 사진에서 보이는 집 안은 따뜻해 보였다. 노란 불빛으로 집 안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들어주고 있었고, 초대받은 손님 모두가 간단한 선물 하나씩을 들고 오며, 환영을 받고, 환대를 해주고 있었다.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맛있는 음식이 만들어지는 냄새가 물씬 나는 것 같았다. 그런 따뜻한 자리를 채우기 위한 좋은 레시피들도 소개되어 있었다.

추워지는 날씨 때문이었을까. 나는 좋아하는 사람들을 초대해 그렇게 따뜻한 자리를 만들고 싶어졌다. 노력해서 맛있게 요리를 만들어도 함께 먹고 감상을 나눌 사람들이 없으니 의욕이 생기지 않기도 했고, 혼자서 요리를 만들기 위해 온갖 식재료를 사기에는 양이 많아 늘 부담스러웠다. 평소에 엄두가 안 나 도전하지 못했던 요리들에도 도전해보고, 실패해도 그것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같이 먹는 것이고, 만약의 경우 우리에겐 치킨 배달이라는 비장의 무기가 있으니 걱정하지 않았다. 내가 만든 요리를 같이 먹고 칭찬을, 가끔은 냉정한 비판(!)을 해줄 친구들과 함께 즐기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나만을 위한 요리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한 요리를 대접해주는 자리를 만들어보기로 마음먹었다.

혼자서는 엄두 안 나는 요리

먼저, 친구들과 함께 모일 장소를 구해야 했다. 어딘가의 숙소를 빌리기엔 가격도 부담스럽고, 너무 본격적인데다가 주방시설이 내가 원하는 만큼 갖춰져 있을 확률이 낮았다. 그래서 찾은 것이 요즈음 하나둘 생겨나고 있는 공유주방이었다. 시간 단위로 빌릴 수 있어 비교적 저렴하고, 예쁜 인테리어에 좋은 식기와 주방기구들을 충분히 갖추고 있어 친구들을 초대해 요리를 대접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덥석 예약을 한 뒤, 본격적으로 무슨 요리를 해줄지 고민을 시작했다. 평소에 내가 집에서 해 먹는 생존 요리 수준의 음식을 대접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던 만큼, 모두에게 따뜻하고 편안한 음식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멋진 공간에 어울리면서도 포근한, 그리고 다 같이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요리를 고민했다. 여러 메뉴를 찾아보던 중, 문득 나중에 보려고 미루어두었던 영화 <줄리 & 줄리아>가 눈에 띄었다.

영화는 1950년대 남편을 따라 프랑스로 건너가 미국 내 프랑스 요리 붐을 일으킨 요리책을 쓴 줄리아 차일드와, 줄리아의 요리책에 실린 레시피대로 요리하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블로그로 정리하며 힘든 나날을 이겨내고 있는 2002년의 줄리 파월이라는 두 인물을 그린다. 그리고 둘 사이를 가로지르는 뵈프 부르기뇽이라는 요리가 있다. 큼직한 소고기를 와인과 각종 채소와 함께 오랫동안 끓여내는 프랑스식 스튜인 뵈프 부르기뇽은 파티 음식으로 딱이었다. 그리고 사이드 메뉴로는 곱게 간 감자에 버터를 넣은 매시트포테이토를 만들기로 했다. 평소에 혼자서 먹기 힘들고, 함께 먹을 때 더욱 좋은 요리였다.

모임 날, 이런저런 재료를 바리바리 싸 들고 예약해둔 공유주방으로 향했다. 마음 같아선 친구들을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주고 싶었지만, 인원이 많아 아마추어인 나 혼자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준비 과정을 친구들과 분담하게 되었다. 어떤 친구들은 재료 손질을 도와주고, 다른 친구들은 식탁 세팅과 설거지를 맡아주었다. 모임 주최자는 나였지만, 모두가 기꺼이 식탁을 완성시키는 데 도움을 주고 싶어 했다. 슬며시 옆으로 와 도와줄 것이 없느냐고 물어보고, 시킬 게 있으면 시켜달라고 했다. 여러 사람이 주방에 다닥다닥 붙어 서 있으니 예상보다 공간이 좁아졌지만, 같이 손으로 무엇인가를 만지고 만들면서 나누는 대화는 더 풍성했다.

처음 해보는 경험이라 함께 요리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해프닝이 있었지만, 다행히 큰 사고 없이 요리들이 모두 식탁에 안전하게 올라올 수 있었다. 뵈프 부르기뇽은 충분히 감칠맛 넘치고 따뜻했고, 매시트포테이토도 풍성하고 부드러웠다.

우리만 있을 수 있는 좋은 공간을 빌리고 모두가 요리 과정에 기쁘게 참여하고 같이 만든 요리를 함께 맛있게 먹었다. 서로가 들고 온 소박한 음식들과 술, 기념품 등을 꺼내 놓으니 자연스럽게 서로의 취향, 지금 하고 있는 일, 미래에 대한 걱정과 기대감 등에 관한 깊이 있는 이야기가 나왔다. 비록 음식 자체의 맛과 서비스는 전문가의 레스토랑보다 떨어지겠지만, 어느 좋은 레스토랑에서도 느껴볼 수 없었던 우리만의 친밀함과 유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따뜻한 기억으로 남은 저녁

자리가 모두 끝나고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몸은 꽤나 지쳐 있었지만 내 마음은 어느 때보다 포근하고 충만했다. 요리를 먹고 돌아간 친구들도 그때 먹은 요리의 기억은, 맛은 차치하고,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말해주었다. 어설픈 요리를 먹어준 친구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모임의 분위기를 상상하며 적절한 레시피를 찾고, 메뉴를 짜고, 재료를 사고, 준비를 하는 과정은 행복한 경험이었다. 그날 날씨와 기분, 오는 친구들의 선호와 분위기를 생각했다.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행복감과 비슷했을까. 그리고 여행이 그렇듯, 어디를 가느냐보다는 누구와 그 자리를 함께하느냐가 더 중요했다. 그래서 사실 그 자리에서는 무엇을 먹어도 충만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우리가 만든 요리였으면 했고, 우리가 만든 요리는 그 자리를 더 소중하게 만들어주었다.

내가 고른 레시피였지만, 우리가 차린 식탁이었다. 나는 최대한 자주 이런 일들을 내 삶에 끼워 넣고 싶어졌다. 맛있는 음식이 먹고 싶다면 식당을 찾기보다는 레시피를 먼저 찾아보고, 여건이 된다면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 일을 말이다.

글 · 준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공유주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