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
2019년 06월 02일 15시 53분 KST

강간범을 고소해 4억7600만원을 받아낸 과정에서 내가 배운 것

그는 나를 무력한 시체로 만들었으나, 나는 그 몸에서 솟아난 무시무시한 유령 같은 존재가 되어 그를 괴롭히고 또 괴롭혔다.

KAI PARVIAINEN

2014년이었다. 20살이던 나는 로펌의 접수담당자로 일하고 있었다. 같이 살던 남자친구의 학대가 점점 심해졌고, 우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다행히도 친절한 지인이 생겼다.

그는 내 자리에 자주 들렀고, 우리는 밖에서도 만나기 시작했다. 퇴근 후 같이 인도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려주기도 했고, 나는 그를 멘토이자 친구로 신뢰하게 되었다.

어느 날 밤, 그의 집 거실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내 집안일 이야기를 하며 울었다. 취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술을 두잔 반 마시고 비틀비틀 화장실로 갔을 때도 나는 위험 신호를 깨닫지 못했다. 나는 곧 의식이 희미해졌다.

일어났을 때 그는 나를 강간하고 있었다.

제정신이 돌아오자 곧바로 탈출했다. 나는 경찰서에 달려가, 녹음되는 전화로 그에게 전화했다. 콘돔을 썼느냐고 묻자 그는 “나는 늘 보호 도구를 쓴다”고 답했다. 그 날밤 경찰은 그에게 수갑을 채워 데려갔다.

상황이 복잡해졌다. 계속되는 경찰 수사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었다. 충격을 받은 나는 수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2016년에 수사가 끝났다. 내 몸에서 DNA 증거가 발견되었는데도, 검찰은 수사를 그냥 종결하려 했다. 검사는 이런 형태의 강간을 기소하려면 사회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내게 말했다.

 

참담했다. 나는 복수를 원했다.

 

형사 사건의 경우 피고는 법적 책임을 져야 하며, 벌금이나 투옥 등의 처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타인으로 인한 상해나 금전적 손실 등의 부당한 피해를 받았을 경우 민사 소송이 가능하다. 감정적, 의료적 피해를 본 강간 피해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가능했다. 그래서 나는 강간범을 고소하기로 했다.

 

*****

 

변호사 빈스가 말했다.

“모두가 궁금해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라는 거겠죠?”

아, 그래. 돈. 솔직히 돈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다. 고소하는 것 자체가 내게는 상징적인 일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 그건 배상이 아니라 복수였다.

“솔직히, 나는 우리가 이 사건에서 돈을 잃어도 괜찮아요. 이 자는 벌을 받아야 해요.” 빈스는 역겹다는 듯 내 파일을 책상 위로 던지며 말했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당신이 원하는 게 그거라면요.”

 

*****

 

몇 달이 지나갔다. 나는 7시간 동안 강간범과 그의 변호사 앞에서 나에게 벌어지는 일을 증언해야 했다. 녹초가 되었고, 거의 유체이탈의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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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강간범도 증언해야 했다. 그는 거짓말이 탄로 날 때마다 움찔거리며 땀을 흘렸다. 내 변호사가 그를 몰아붙이는 걸 보며 즐거움을 느꼈다.

며칠 동안이나 서류를 찾았다. 내가 강간 피해에 대해 사람들과 주고받았던 내용 등을 모두 찾아냈다. 변호사들과 서류, 증거, 나의 익명성등을 놓고 옥신각신했다. 지루한 시간들이었다.

강간범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희망으로 움직였으나, 나는 조용히 고통받고 있었다. 중추수면무호흡이 생겨 잘 때 숨을 잘 쉬지 못했다. 극도로 예민해졌다. 집중하기 힘들었고, 기본적인 것을 기억하는데도 문제가 생겼다.

그리고, 거의 4년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

 

법정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를 강간한 그가 보였다. 불안해하는 그를 보며, 내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다. 주먹으로 벽을 쾅 쳤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정말 오랫동안 분노를 품고 있었다.

잠시 사라졌던 변호사가 나타나 건물 아래층의 작은 카페로 나를 데리고 간다. 변호사가 말했다.

“이렇게 하죠.”

변호사와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았다. 40만 달러였다(한화 약 4억 7600만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연봉은 200만 달러(한화 약 23억 8300만원)가 넘는다. 나는 변호사에게 그를 더 힘들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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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로 온몸을 떨었다. 그는 내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나의 인생, 나의 인간관계, 나의 직업. ‘야생동물을 궁지에 몰아넣지 말라’는 말에는 이유가 있었다. 다른 선택지가 없다면 야생동물은 생존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 테니까. 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궁지에 몰려 있었다.

“받아요. 재판하면 더 많이, 혹은 더 적게 받을 수도 있어요. 이건 무언가를 쟁취하고 끝낼 수 있다는 의미예요.” 변호사의 말이었다.

도박을 하는 기분이었다. 내 삶의 트라우마가 한순간으로 압축되었다. 종이 위의 글자, 통장의 숫자. 정말 무미건조하다. “OK.”라고 말했다. 패배한 기분이었다.

‘정의를 실현한다’는 건 잘못된 믿음이다. 기껏해야 내가 겪은 트라우마에 대한 위로 정도밖에 안 된다.

트라우마 때문에 잘못 배열된 뇌 회로가 고쳐지지 않는다. 일하지 못한 시간, 심리치료에 쏟은 시간, 소송하느라 써버린 여러 날은 되돌려질 수 없다.

강간범을 고소하는 게 마치 나의 두 번째 직업처럼 느껴지던 나날들이었다. 적대적인 낯선 이들에게 내가 겪은 일을 또다시 말해야 했다. 트라우마 속 이야기에 스스로 갇히곤 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나서도, 객관적으로  긍정적인 결과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합의한 지 1년이 넘었다. 돈이 많아졌다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딱히 더 행복한 것도 아니다. 피로하다. 육체적으로 녹초가 된 기분이다. 합의 서류에 서명했을 때, 내가 기대했던 것 같은 성취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고소를 후회한다는 뜻은 아니다.

결국 내가 알게 된 것은 합의 그 자체보다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중요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패배하고도 강력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실 내가 진정 강력한 힘을 느꼈던 순간은 강간범이 궁지에 몰리는 것을 보았을 때, 그가 창백한 얼굴이 되어 동요하는 것을 보았을 때였다. 법원에 낸 모든 서류는 그의 삶에서 지울 수 없는 얼룩이고, 그가 내게 굴복하게 만든 힘이었다. 나는 맞서기로 결정함으로써 막강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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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를 표적으로 삼고 괴롭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나를 무력한 시체로 만들었으나, 나는 그 몸에서 솟아난 무시무시하고 강력한 유령 같은 존재가 되어 그를 괴롭히고 또 괴롭혔다.

내가 서서히 통제력을 되찾아갈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힘의 행사 때문이었다. 판사의 판결도, 현금도 아니었다.

* 허프포스트 US의 을 번역, 편집했습니다. 

성폭력 피해 관련 상담을 받고 싶다면 아래 기관들에 연락할 수 있다.

- 한국성폭력상담소 (전화: 02-338-5801, 평일 10시~17시)

-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전화 상담 혹은 전화로 직접 상담 예약: 02-335-1858, 평일 10시~17시)

- 한국 여성의 전화 (성폭력: 02-2263-6465, 가정폭력: 02-2263-6464, 이메일 상담: counsel@hotline.or.kr)

상담 시간 외에 긴급 상담이 필요한 경우 국번 없이 1366(여성긴급전화), 117(교내 폭력 및 성폭력)로 전화할 수 있다. 장애인과 아동의 경우 지역에 따라 장애인성폭력상담소, 아동성폭력상담소인 해바라기센터가 운영돼 더 전문적인 상담을 받을 수도 있다. 처음 상담 의뢰한 곳에서 심리 지원, 법적 지원, 의료 지원, 쉼터 연계 등 모든 절차를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