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스타일
2019년 05월 29일 16시 07분 KST

여자인 나를 퀴어 섹스의 세계로 입문시킨 건 이성애자 남자였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모른다

PHOTO COURTESY OF KELLI DUNHAM
티셔츠에는 "Love in any language"라고 쓰여있다. 샌디 패티가 부른 노래 제목으로, 당시 기독교계 고등학교들은 반드시 이 노래를 졸업식 때 불러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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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시절 나는 ‘지옥에는 서핑이 없다’(no surfing in hell)고 프린트된 티셔츠를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입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은 기독교 신앙을 드러내는 프린트 티셔츠였다. ‘파티하자’(Let’s party, dude)고 쓰인 검은 티셔츠를 입은 경악한 듯한 표정의 젊은 남성이 그려진 섬뜩한 티셔츠였다. 그는 혀를 내민 채 불꽃에 둘러싸여 있었다. 불타는 그의 몸 아래에는 ‘불의 연못에는 파도가 없다’(The lake of fire has no waves)라는 문구도 쓰여있었다. 신약에 나오는 표현들이다.

나는 이 옷을 입고 해변으로 가는 17A 버스를 타곤 했다. 운이 좋으면 내 옆자리에 앉은 서퍼들이 이 셔츠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완전히 갈 길을 잃었다고 느끼던 시절에 모든 인간이 구원받거나(천국으로 간다) 구원받지 못한다는(지옥으로 간다) 극도로 이분적인 세계관을 받아들였다.

강경한 무신론자였던 아버지는 내가 13세 때 돌아가셨다. 1년 뒤에 어머니는 ‘거듭난 기독교인’(born-again Christian)이 되었고, 위스콘신주의 시골에서 갑자기 플로리다주 데이토나 비치로 이사를 했다. 즉흥적으로 결정한 것 같았고, 나와 형제들은 놀랐다.

우리는 어머니가 이사한 이유를 나중에야 알았다. 괴짜 새아버지와 함께 지내기 위해서였다. 새아버지는 자기 어머니와 비슷한 실내복을 입은 악마들이 밤에 자신을 공격하곤 한다고 말했고, 식탁 매너가 나쁜 사람을 보면 실제로 구역질을 하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열심히 새아버지의 행동을 두둔했지만, 그는 사실은 엄마를 아주 슬프게 만드는 것 같았다.

나도 어머니를 따라 거듭난 기독교인이 되었고 그 라이프스타일을 따르게 됐다. 나는 여유 시간은 거의 모두 교회나 종교 관련 행동에 쏟아붓게 됐는데, 교회활동은 사실은 실내복 입은 악마들과 싸우는 가족들로부터 멀리 도망칠 구실이 되기도 했다. 교회의 어른들은 내게 너무나 친절했다. 수십 년이 지났고, 지리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지금도 그들을 생각하면 나는 눈물이 맺힐 정도다.

그러나 거듭난 기독교인의 하루는 단지 ‘멋진 옷‘을 입고 어른들로부터 ‘오늘 하루는 어땠느냐’는 다정한 인사를 듣고 대화를 하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많은 규율들이 있었다.

일단 춤은 금지였다(눈으로 범하는 죄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음주(안돼), 마약(절대 안돼), 성행위(안돼 안돼 안돼 지금 장난하니 절대 안돼) 역시 금지였다.

내 또래들과는 달리 나는 육체적 유혹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자위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고 남자아이들은 그냥 지루하기만 했다. 고등학교 배구팀 여자아이들과 노는 건 아주 좋았다. 나는 이게 내가 운동을 아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교회 밖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교회 사람들은 내게 ”레즈비언이 되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몸이 드러나는 옷을 입는) 필라테스 강사가 되지 말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누구도 누군가가 레즈비언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내게 가장 친절했던 교회 사람들은 모두 오클라호마 시티의 아주 작은 성경 대학 출신이었다. 내게 그 학교에 가라고 압력을 주거나 다른 학교에 가지 말라고 말린 사람은 없었지만, 그 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곧 내 꿈이 되었다. 진보 성향의 예술 학교인 스미스 컬리지에 가겠다고 했다면 아마 그들은 말렸을 것 같다.

작은 성경 대학은 겉보기에는 볼품이 없다. 폐업한 편의점과 잡초 농장 같아보이는 곳 사이에 있는 2층 벽돌 건물 몇 채로 구성된 곳이었다. 조금 손보면 그때에야 드라마 ‘오피스’에 나오는 제지 공장 촬영 로케이션으로나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교가는 장례식에서 부르는 장송곡과 비슷했다.

“영원한 영혼들이 죽어갈 때 / 주는 쉬려하지 않으실 것이다”

농구 경기에서 부르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이 학교에서는 음주, 흡연, 춤, 춤추기 위한 장소 방문, 마약 사용이나 사용 장려, 포르노 소지나 사용을 금지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얼굴이나 혀 피어싱도 금지였다. 학생 생활 가이드에서는 동성애를 완곡하게 ‘성적 혼돈’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퇴학 사유였다.

입학 후 한 달 정도 후에 내가 별로 대화도 나누지 않았던 선배가 세탁실로 나를 따라와 ‘동성애: 친밀함의 장애물’이라는 작은 흑백 책자를 주었다. 이 책자에서는 동성애가 사악하고 죄스러우며 미국적 생활 방식을 몰락시킬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의존, 효과적이지 못한 육아, 악마가 동성애의 원인이라고 했다.

나는 내 스스로도 동성애자라는 걸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아마 내 자신이 가장 몰랐을 것이다) 불쾌하기보다는 혼란스러웠다.

PHOTO COURTESY OF KELLI DUNHAM
대략 1987년, 내가 퀴어라는 사실과 헤어 컨디셔너의 존재를 몰랐던 어린 시절.

호르몬은 끓어넘치지만 섹스는 반드시 결혼 후에 해야 한다는 이례적인 믿음을 가진 젊은이들이 많은 학교였기 때문에, 이곳 학생들은 대다수 빨리 결혼하려고 했다. 신이 골라준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데이트를 하는 것은 이 학교 학생들이 가장 열심히 하는 과외 활동이었다.

2학년 때 ‘친절한 켄’(Kindly Ken)을 만났다. 내가 그 학교에서 사귄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그는 재미있고 다정했으며 나보다 나이는 조금 더 많았다. 오클라호마 시골 출신이었다. 오클라호마에서 가끔 오일 붐이 일 때면 채굴일을 해서 학비를 벌어 돌아온 사람이었다.

가끔 “우리가 육체적인 시간을 좀 더 많이 가졌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그는 우리가 성적인 행위를 절대 하지 않는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어느 날 밤, 학생회관 가스불로 핫도그를 굽다가 그는 내게 쪽지를 썼다.

“내년 5월에 별일 없으면 나랑 결혼할래?”

그가 제시하는 삶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의 아내로 살고, 아기들을 낳고 오클라호마 서부 시골로 가서 사는 삶. 하지만 어떤 다른 삶이 있을지도 상상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너무나 따뜻하게 물어왔다. 나는 승낙했다.

우리는 약혼했고, 성경 대학의 전통을 지켜 페니스를 버자이너에 삽입하는 섹스는 결혼식 이후로 미루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삽입)만 아니라면 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학교 기숙사의 남녀분리 원칙이 엄격했기 때문에, 우리가 육체적 관계를 갖는 것은 대부분 친절한 켄의 차에서였다. 어느 날 밤 폐업한 편의점과 동네 교회 사이에 차를 세워두고 있다가, 그는 다정하지만 기대감을 품고 물었다. “너 혹시 바지 내려볼래?”

친절한 켄은 내게 오럴 섹스를 해주며, 내 클리토리스를 찾아 보여주고 매력적이게도 ‘마담 클리토리스’라고 불렀다. 나는 그날 밤 처음으로 오르가즘을 느꼈다.
다음 날 아침, 나 혼자 마담 클리토리스를 더 효과적으로 자극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조직 신학‘, ‘신약 연구‘, ‘문학으로서의 성경’ 수업을 빼먹고 23시간 동안 장엄한 자위를 즐겼다.

다음날 나는 친절한 켄과 헤어졌다. 그의 착한 마음에 축복이 있기를.

돌아보면 비교적 열정적이었던 우리의 밤은 거의 만화 같은 미국 중부 이성애자들의 일탈이었지만, 나로선 퀴어로서의 미래를 처음으로 엿본 순간이었다. 친절한 켄이 내 클리토리스에 관심을 가진 것은 뜨거운 브로콜리 쥬스를 큰 컵으로 받아든 것 같은 일이었다. 뜨거운 브로콜리 쥬스는 내가 좋아하는 음료가 절대 아니지만, 내가 목이 말랐다는 걸 깨닫게 해준 계기가 됐으니 말이다.

섹스가 끔찍한 죄가 아니라 쾌감이라는 것에 눈을 뜨자 즉시 여성들에게 느꼈던 감정이 애정임을 깨달았고, 세라피를 받기 시작했고, 커밍아웃 지원 단체에 들어갔고, 지역 사회에서 소프트볼 팀을 만들었다ㅡ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데는 10년이 넘게 걸렸고 그 사이 종교적 방황도 많이 겪었다. 그러나 섹스가 생식만을 위한 게 아닌 즐거움일 수 있다는 그때의 깨달음이 없었다면 10년이 아닌 수십년이 걸렸을 것이다.

친절한 켄은 스위치를 켜듯 나를 일깨워주었다. 오클라호마주의 따뜻한 어느 날 밤, 사육장과 옥수수밭 사이에 세워둔 올즈모빌 안에서 지극히 이성애적 섹스를 통해 내 퀴어성으로 가는 문을 열어준 내 전 약혼남에게, 나는 언제나 고마운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허프포스트 미국판의 독자 기고  How A Straight Man Introduced Me To The World Of Queer Sex를 번역, 편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