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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희는 ‘불가항력적인 비참’ 속에서도 쉽고 따뜻한 글을 썼다

비현실적 낙관론이 아니라, 아주 강하고 단단한 현실의 마음을 거기서 읽는다.

고 장영희 교수
고 장영희 교수 ⓒhuffpost

2009년 5월9일 장영희 서강대 교수가 세상을 떠났다. 대학 시절 내 친구는 군에서 장 교수의 에세이를 읽고 팬이 되어서, 복학을 한 첫 학기에 서강대까지 가서 그녀의 수업을 청강했다. 어떤 사람이길래 친구가 저럴까. 나는 그녀에 대한 기사를 보고 당시 베스트셀러이던 에세이집을 읽었다.

솔직히 나는 서울대 영문과 교수 아버지 아래에서 태어나 미국 유학을 마치고 서울의 유수 사립대 교수로 있는 그녀의 글에 공감하기가 쉽지 않았다. 목발을 짚는 그녀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는 동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글이 너무 말랑해 보였고 낙천적이었다. (집안 좋은) 장애인이 긍정과 희망을 말하는 이야기는 내게 새롭지 않았다. 20대의 나는 까칠한 글을 좋아했다.

우리가 삶에서 겪는 많은 문제는 잘못된 정치적 의사결정, 공동체의 무관심, 체계적으로 불평등하게 배분된 자원에서 비롯된다. 장영희 교수는 중학교 시절부터 대학까지 입학을 거부당했는데 그때마다 서울대 교수인 아버지가 발로 뛰며 입학을 사정한 덕에 공부할 수 있었다. 그녀의 ‘오뚝이 같은’ 삶은 그녀의 사회적 지위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장 교수의 이야기에 ‘정치’가 빠져 있다고 생각했다.

내 친구가 수업을 청강하던 2006년 1학기는 장 교수가 두번의 암치료를 받고 강단에 복귀한 때였다. 얼마 되지 않아 세번째로 암이 발병했다. 나는 장 교수의 글을 다시 읽었고, 그녀가 살던 시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장영희 교수는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그녀가 젊었던 때는 여성이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으면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취급하던 시대였다. ‘지독한 길치’였음에도 목발을 이용하는 그녀는 대중교통을 타기 어려웠고 스스로 운전을 하다 녹초가 될 때까지 길을 헤매고는 했다.(내비게이션도 없던 시절이다) 연세대 대학원에 진학하려 했을 때는 “우리는 학부에서도 장애인은 안 받는다”며 단칼에 거절당했다. 비로소 한국 사회의 장애인들이 지하철과 버스를 조금씩 탈 수 있게 되고 대학이 장애학생을 거절할 수 없게 된 2000년대에 그녀는 세번 암에 걸린다.

인문학 박사 장영희 교수는 쉬운 글을 썼고 평범한 방식으로 희망과 긍정을 설파했다. 나는 그녀의 ‘인생 난도가 낮아서’ 말랑말랑한 글을 쓴다고 생각했다. 사회적 차별의 피해자로서 나 자신을 확고히 정체화할 때였다. 하지만 그녀는 세번째 암이 재발했을 때 쓴 마지막 책의 에필로그에서도 여전히 순수하게 희망을 말한다. 여느 때보다 어두운 기색이 짙지만, 병원 천장을 바라보며 쓴 글에서도 그녀는 물이 차오르는 섬 꼭대기에서 가능성 없는 구조를 기다리는 소녀의 노래가 왜 소중한지 강조한다.

내 삶이 부당하게 취급받는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타인의 곤경을 과소평가하고, 그들의 용기를 유치하다고 냉소하기 쉽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삶의 도전들을 모두 사회정치적 문제로 해석하기도 어렵고, 실제로 개인도 사회도 어쩔 도리가 없는 곤경이 사람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기도 한다. 우리는 정치적 부정의만큼이나 이유를 알 수 없는 비극으로 가득한 삶을 산다.

지난 세월 동안 한국 사회에는 명백한 사회적 부정의를 불가항력의 비참으로 규정하는 자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그에 저항하며 민주주의를 진척시켰다. ‘정치적으로 각성한’ 어떤 사람들에게는 따뜻하고 쉬운 글과 희망 서사에 열광하는 대중의 반응이 때로 낭만적이고 순진해 보인다. 그러나 쉽고 따뜻한 글을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쓸 수 있는 사람보다 더 삶에 ‘각성한’ 존재가 있을까? 나는 10년 전 장영희가 쓴 글을 다시 들춰 본다. 비현실적 낙관론이 아니라, 아주 강하고 단단한 현실의 마음을 거기서 읽는다. 부정의를 불가항력의 비참으로 위장하는 자들에게 맞서는 일은 중요하지만 불가항력의 비참도 때로 있는 것이 삶이라는 점을, 그리고 그럴 때조차 우리가 쉬운 말로 노래하며 서로를 위로할 수 있음을 기억한다.

* 한겨레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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