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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5월 28일 16시 48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05월 28일 16시 48분 KST

새내기에게 정말 필요한 것

솔직함을 퍼올리는 자신만의 우물이 절실한 시대다.

Boonyachoat via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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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서울 소재 한 대학의 디자인학과에 출강 중이다. 올해 해당 디자인학과의 커리큘럼을 개편하며 새로 생긴 1학년 과목인지라, 스타트를 끊는 입장에서 나름의 수업 목표를 설정해봤다.

디자인을 폭넓게 이해하기 위한 인문 지식을 습득한다. 자신의 작업부터 시작해, 필드에 실제 출현한 디자인 작업의 생애를 정리한다. 자신의 생각과 정보를 글로 바꾸면서 궁극적으로 글쓰기에 대한 공포심을 해소한다.

말이야 쉽지! 조형 능력을 갈고 닦기에도 시간이 늘 부족한 신입생이 잠시라도 언어로 사고하는 기회를 갖고, 글을 매개로 감각과 의견을 명징하게 전개하는 시도를 통해, 훗날 다양한 사람들과 원활히 소통하는 기반을 다질 수 있길 소박하게 소망 중이다.

얼마 전 디자인 다큐멘터리 3부작을 보여주고 감상문 세 편으로 중간고사를 대체했다. 오타나 비문은 신경 쓰지 않을 테니 다큐멘터리 내용을 충실히 요약하고 자신이 느낀 감정과 생각을 솔직히 밝히라 종용하며 감상문을 받았다. 모으고 보니 그 수가 무려 186편이었다. 어쩌면 일종의 빅 데이터일수도 있겠다 싶어 결과를 전체적으로 분석해보았는데 흥미로운 흐름이 포착됐다. 경험이 많아 유리할 거라 생각했던 고학년보다 갓 들어온 신입생의 평가가 상대적으로 좋았던 것이다.

원인은 바로 솔직함이었다. 1학년은 의식의 흐름을 적거나, 편지처럼 의견을 말하고, 좋고 싫음에 대한 감정을 무작정 표출하는 등 그 형식은 중구난방이었지만 내용 면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감정, 경험, 생각, 교훈에 이르기까지 아주 명확하고 정직하게 내뱉는 반응은 무척 신선했다. 정형화된 감상문에서 느낄 수 없는 기쁨이었다. 그런데 고학년은 형식 면에서 정갈하고 유려했지만 생기가 없는 글이 자주 보였다. 신입생과 1년 차이인 18학번에서도. 심지어 다큐멘터리 자막을 모아 기술적으로 재배열한 경우까지 있었다.

어쩌면 나는 한국 고등교육의 큰 비밀을 엿본 것 아닐까. 고등학생이 대학교에 들어와 기존 질서에 순응하고 동화되는 데 1년이면 차고 넘친다는 사실 말이다.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학점을 체크하며, 어느새 ‘눈치’와 ‘노하우’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개성 넘치는 주관과 목소리는 얼마나 쉽고 허무하게 사그라드는가. 자유롭기로 학교 대표 격인 디자인학과에서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면, 과연 다른 단과대학은 어느 상황일지 감히 생각하기도 두렵다.

사람들은 요즘 대학생이 너무도 자유분방하다 흉보지만, 어쩌면 진실로 자유로운 순간은 입학 이후 단 몇 개월일지도 모른다. 솔직함이 샘솟는 곳에 미리 우물을 파고 관리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땅은 굳어 단단해지고 훗날 순수한 주관을 퍼올리기란 영영 힘들어진다. 지식과 지혜, 스킬과 노하우 모두 좋지만, 새내기에게 정말 필요한 건 거칠고 서툴지라도 비정형적 사고의 틀을 자유롭게 유지하는 것 아닐까. 스스로에게 솔직한 ‘사유의 방’을 마련할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의 이해와 독려가 필요하다.

harry.jun.writer@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