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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앨라배마 출신이다. 낙태를 할 수 없어서 강간범의 아이를 낳았다

선택권을 빼앗긴 나는 추락밖에 할 수 없었다.

필자와 필자의 딸 조이 (2007년) 
필자와 필자의 딸 조이 (2007년)  ⓒCOURTESY OF DINA ZIRLOTT

경고: 일부 독자에게는 불편할 수 있는 자세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침묵은 인간의 내면에 뿌리를 내린다. 목소리가 있어야 할 곳에 잔혹하고 파괴적인 빈 공간만 남게 된다. 그게 어떻게 진행되는지, 내가 아는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나는 17세 때 학교 친구에게 강간당했다. 내가 신뢰하는 아이였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8개월 지나서야 강간으로 임신했음을 알게 되었다. 내 딸 조이는 선천적 장애를 가지고 내 안에서 커갔다. 생각도, 감정 표현도, 세상과 교류할 수 있는 능력도 전혀 갖지 못했다.

나는 미국에서 가장 엄격한 낙태법을 도입한 앨라배마에서 살았다. 앨라배마주의 정치인들은 언제나 거리낌 없이 여성을 통제했다. 그들에게 있어 우리는 정치 게임의 부수적 존재일 뿐이었다. 비록 그들은 내 경험담과 생각에 아무 관심이 없지만, 나는 말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 뒤의 여성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플로리다주 데스틴의 워터 파크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9살이었다. 한 남성이 지나가며 내 튜브를 잡고, 아래로 손을 넣어 내 가랑이 사이로 손가락을 넣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나를 문질렀다. 나는 충격을 받아 그를 쳐다보았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그는 내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눈으로 내 몸 전체를 훑었다.

안심하라는 듯 “네가 물에 휩쓸려 가는 것 같아서 도와주려 했지.”라고 말하며 나를 놔주었다. 나는 다리 사이가 불타는 듯하고 심장이 마구 뛰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날 도와주려던 거였으니까.

나의 자주성, 나의 존엄, 나의 안전감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때 나는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난 적 없는 남자아이가 기둥 뒤에서 뛰어나와 내게 달려오더니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나는 휘청거렸고, 고개를 휙 돌려보니 그 아이는 체육관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내기한 거였어!” 그는 내게 외쳤다. 그게 나를 만질 만한 이유가 되기라도 한다는 식이었다. 마치 내 몸이 누구나 만지라고 걸려있는 고깃덩어리라는 듯이.

2학년 때 파티에서 같이 춤춘 남자아이가 있었다. 그는 그다음 주부터 나를 스토킹하기 시작했다. 시간표를 말해주지 않았는데도 수업을 따라다녔고, 집이 어딘지 물었고, 구석에 나를 밀어붙이고 키스하려 했다. 내가 거절하자 그는 내가 자신을 먼저 유혹했다고 퍼뜨렸다. “걔는 우리 동기 애들 절반에게 그런 짓을 했어. 하지만 교사들은 아무 대처도 하지 않아.” 다른 여자애들이 말해주었다.

이 남성들은 나를 강간하지 않았다. 13살 시절부터 나를 흘끔거리던 남성들도 날 강간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날카롭고 호색적인 휘파람을 불어댔다. 내가 진열된 상품과 같다는 걸 상기시켜주었다. 비록 날 강간하지 않았으나, 그들 모두 내게서 무언가를 앗아갔다.

내 자주성, 내 존엄, 내 안전감.

그들이 심은 작은 씨앗들은 견제받지 않은 채 자라났다. 뿌리가 밖으로 퍼졌고, 침묵이 내 안, 내 입속으로 흘러들었다. 천천히, 고통스럽게, 나는 나 자신에게서 소원해졌다.

내가 강간당했던 날에 대해 쓰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지금 같은 시기에는 트라우마의 기원을 다시 찾아가야 한다. 어떤 식으로든 진전을 원한다면, 조금이라도 치유를 원한다면, 상처에서 계속 독을 뽑아내야 한다. 

2002년 고등학교 홈커밍 댄스파티 당시의 필자 
2002년 고등학교 홈커밍 댄스파티 당시의 필자  ⓒCOURTESY OF DINA ZIRLOTT

그때로 돌아가 보자. 나는 17살이다. 고등학생이다. 우리 집 식탁의 모서리가 내 배를 계속 찌른다. 남의 손이 내 목을 감싸고 있다. 내가 믿었던 손, 같이 수업을 듣던 남자아이의 손이다. 내 반바지를 끌어 내리고 꼼짝 못 하게 만든 손이 수업 시간 연필을 집으려 손을 뻗었을 때 가끔 닿았던 손이라는 걸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맥박이 정신없이 뛴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2시간 전 우리는 2차 방정식을 공부하고 영화를 보고 있었다. 그의 손끝이 반바지 아래 속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나쁜 일이 일어날 거란 직감이 들었다. 목구멍으로 무언가 치솟는 기분이다.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부엌으로 자리를 피한 날 따라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이 일이 벌어지는 도중에도 현실임을 믿을 수가 없었다. 몸이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나는 내 안에 갇혀 있었다. 삶은 선명하고 끔찍했다. 그 와중에 어머니가 너무 피곤해서 미처 못 갖다버린 오래된 식용유가 레인지 위에 있는 게 보였다.

그는 “거기 있어, 움직이지 마.”라고 말한다. 나는 땅만 바라본다. 내가 속하지 않는 곳에 나를 묶는다. 흰 타일, 타일에 난 금. 호흡하는 중간에 죽는다고 생각한다. 몸을 웅크리고 조용히.

그날 밤 부엌에서 나는 죽었다

내가 가장 뚜렷이 기억하는 것은 이것이다. 축 늘어지던 순간 불이 내 몸을 빠져나갔고, 나 역시 불과 함께 사라졌다. 나는 방 반대쪽에서 나 자신을 지켜본다. 나는 여기 있고, 나이면서도 내가 아닌 그녀는 저기에 있다.

우리는 이제 같은 사람이 아니다. 이런 일이 생길 때 우리는 “넌 혼자가 아니야.”라고 말하지만, 아니다. 나는 혼자다. 나는 내가 절대 떨어져나올 수 없는 순간에 갇혀있다. 나는 날 저기 버려야 한다. 그리고 남은 것은. 수치심와 침묵의 거대한 구멍이었다.

내 목소리가 효과적으로 제거된다. 그 뒤 나는 언제나 두렵고, 나를 공격한 사람이 다시 날 찾아오지 않을까 걱정한다. 주차장 건너편에서 나를 지켜보는 그가 보인다. 나는 그날 밤의 일을 절대 입밖에 내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되뇌인다.

나는 이 강간 때문에 임신을 하게 되지만, 한참 지나서야 알게 됐다. 체중이 줄었다. 나는 운동을 하기 때문에 몇 달 동안 생리를 안 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 10년 뒤에야 진단받고 알게 될 호르몬 장애도 있다. 

2005년. 강간 사건이 벌어진 지 오래되지 않았을 때다. 
2005년. 강간 사건이 벌어진 지 오래되지 않았을 때다.  ⓒCOURTESY OF DINA ZIRLOTT

나는 걷고 말하고 미소짓는다. 그렇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그날 밤 내가 부엌에서 죽었다는 생각이 든다. 옥상에 올라가 발을 내디디고 싶다는 충동이 끊임없이 든다. 임신 테스트 결과가 양성으로 나왔을 때 처음 든 생각이 그것이다. 의사는 아기가 8개월이라고 했다. 나는 고층 건물 꼭대기로 기어오르고 있다.

의사는 낙태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의사는 뱃속의 딸이 물무뇌증(hydranencephaly)이라고 진단했다. 대뇌가 두 개로 갈라지지 못했고 그 자리에 뇌척수액만 차 있는 상태였다. 소뇌와 뇌간이 위태로운 목숨을 유지할 기능만 하고 있어서, 어느 정도의 발달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었다. 태어난다면 고통을 겪다가 아주 어린 나이에 죽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옥상에서 뛰어내린다.

의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과 나의 고통을 막아줄 낙태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앨라배마는 이런 상황이라도 임신 8개월의 낙태를 허가하지 않고, 우리 가족은 다른 주로 갈 수 없다. 나는 옥상에서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진다.

나는 2005년 10월 27일 조이를 낳았다. 18살이었다. 의사들이 가득한 방에서 다리를 벌리고 조이를 이 세상으로 밀어냈다. 조이는 울지 않지만 숨을 쉬고, 대신 내 어머니가 운다. 의사들은 조이가 죽을지 지켜보고, 나는 시계 초침이 째깍째깍 움직이는 걸 지켜본다.

마침내 그들이 조이를 내게 데려온다. 차마 계속 보고 있을 수가 없다. 어떻게 될지 알기 때문에 조이를 사랑하고 싶지 않다. 조이는 눈이 안 보이고 소리를 못 듣고 젖을 빨 수도 없다. 이미 죽어가고 있다. 우리 모두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으로 향하긴 하지만, 조이의 속도는 너무나 빠르다.

1년 동안 내 딸의 고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다. 매일 같이 멈출 수 없는 비통함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내 딸은 마지막까지 계속 고통을 겪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 기저귀를 갈아주려 하니, 5시간 전에는 없었던 심한 붉은 발진을 발견한다. 나는 연고를 발라주며 사과하고, 내 눈물이 조이의 옷깃에 떨어진다. 이 정도의 통증으로도 조이는 강직발작을 일으킨다. 다리가 굳어지고, 몸이 단단해져 뼈가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든다.

요붕증(Diabetes Insipidus) 진단을 받았다. 다른 핏줄은 건드리는 순간 붕괴되어, 머리둘레의 핏줄에 링거를 꽂아야 한다. 체액을 조절할 수 없어서 몸이 부었다. 알아보기도 힘든 모습이다. 나는 손바닥에 조이의 손을 얹고 부푼 피부를 쓰다듬는다. 작디작은 손가락 관절을 알아볼 수가 없다.

2007년 3월 6일.

조이는 약을 먹어도 역류가 심해서, 엎드려 자면 위험하기 때문에 같이 눕기가 두렵다. 조이는 울 수 없어서 구토를 해도 알려줄 수 없다. 우리는 늘 조이를 안고 있다. 조이와 한 해를 보낼 때만큼 시간의 흐름을 예민하게 느낀 적이 없었다. 조이의 생명은 모래가 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듯 줄어갔다.

아이를 잠시라도 편하게 해줄 수 없는 내가 괴물 같이 느껴진다. 자고 있던 어머니에게 부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리고 나를 구하러 오게 할 수 있었다면- 그래서 결과적으로 조이까지 구할 수 있었다면. 하지만 재앙 후의 해결책은 늘 뒤늦게 떠오른다.

2007년 3월 6일, 병원 응급실에서 조이의 심장이 멈춘다.

발작인지, 그날 밤의 열 때문인지는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조이는 그렇게 우릴 떠났다.

나는 내 침묵의 진앙지인 부엌에 서서 약이 든 찬장을 바라본다. 얼마나 약을 먹어야 영영 깨어나지 않을 수 있을까.

고작 19세지만, 다 끝난 것 같다. 세상, 내 삶, 내가 알았던 미래, 모두 다. 다시는 내 몸을 보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범죄 현장이니까.

침해당했다는 느낌은 영영 떠나지 않을 것이다. 비통함도 영영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 자신보다 이런 감정들의 벅참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나와 가장 가깝게 있으니까.

내가 사는 앨라배마에서는 여성들을 이렇게 취급한다. 내 자주성을 빼앗으려는 남성들이 있는 곳이다. 그들의 좁은 시각, 현실 파악 능력 부족, 우리 삶과 행복을 공화당 유권자 표와 바꾸려는 의지에 나는 큰 분노와 슬픔을 느낀다.

선택을 빼앗긴 나는 추락밖에 할 수 없었다

앨라배마가 새로 도입한 낙태 금지는 생명의 신성함과 아무 관련이 없다. 이 법에 찬성표를 던진 앨라배마 정치인들은 우리의 자궁에서 추방된 어린이들에게 관심이 없다. 그들은 부모가 아이를 원하고, 먹이고, 사랑하고, 생계를 책임지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그들은 여성과 어린이들의 어깨에 책임을 지우면서도, 그 결과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이른바 ‘후기’ 낙태를 할 수 있었다면 했을 것이라고 부끄러움 없이 말할 수 있다. 선택권의 가치를 나는 알고 있다. 선택을 빼앗기고 오직 추락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건 내가 결정해야 할 일이었다. 나, 혹은 조이의 현실을 경험할 일이 절대 없는, 얼굴 없는 침입자가 결정할 것이 절대 아니었다.

조이의 끈질긴 고통을 한순간이라도 막을 수 있었다면 나는 무엇이든 했을 것이다. 이기적이라는 말을 들었다. 잔인하다는 말도 들었다. 괴물이라는 말도 들었다. 내가 아이와 보낸 순간을 감사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라는 비난도 들었다. 하지만 아이가 주위 세상을 느끼지 못하고, 기쁨이나 분노도 느끼지 못하고, 고통 속에 살아가는 걸 감사히 여기라는 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설명을 해보라.

앨라배마에서는 임신을 하면 자기의 몸이 아니라는 말을 많이들 한다. 나는 반대한다. 나는 이 몸을 가지고 31년을 살았고, 내 몸의 한계와 장점을 안다. 이제서야 내 목소리를 다시 배우고 있다.

나는 깊은 상처의 대가를 알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그 상처를 지니고 살고 있다. 아무도 내 상처를 대신 책임져 주지 못한다. 이건 내 몸이고, 나는 내 몸이 침범당하는 게 어떤 것인지 안다.

내게 말해보라, 내가 진정 내 것이 아니란 말인가?

 

*글을 기고한 디나 질롯은 31세 전업주부다. 앨라배마주 모바일에서 남편과 어린 세 딸과 함께 산다. 여가시간에는 케이크를 굽고 장식하지만, 솜씨와 맛은 보장하지 못 한다.

*허프포스트 미국판의 기고 을 번역했습니다.

성폭력 피해 관련 상담을 받고 싶다면 아래 기관들에 연락할 수 있다.

- 한국성폭력상담소 (전화: 02-338-5801, 평일 10시~17시)
-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전화 상담 혹은 전화로 직접 상담 예약: 02-335-1858, 평일 10시~17시)
- 한국 여성의 전화 (성폭력: 02-2263-6465, 가정폭력: 02-2263-6464, 이메일 상담: counsel@hotline.or.kr

상담 시간 외에 긴급 상담이 필요한 경우 국번 없이 1366(여성긴급전화), 117(교내 폭력 및 성폭력)로 전화할 수 있다. 장애인과 아동의 경우 지역에 따라 장애인성폭력상담소(검색하려면 클릭), 아동성폭력상담소인 해바라기센터(검색하려면 클릭)가 운영돼 더 전문적인 상담을 받을 수도 있다. 처음 상담 의뢰한 곳에서 심리 지원, 법적 지원, 의료 지원, 쉼터 연계 등 모든 절차를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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