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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5월 21일 10시 08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05월 21일 10시 08분 KST

‘장자연 사건’ 문질러버렸다

장자연 사건, 수사를 한 것이 아니라 수사를 비켜가려 했다

한겨레

이제 중견 배우가 됐을 것이다. 2009년 3월 7일이 그에게 없었다면. 지금쯤 TV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8일 전 동료 배우들과 함께 첫 레드카펫을 밟았던 그는 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일까. 그 죽음의 배후에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까.

어제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가 ‘장자연 리스트 사건’ 조사 및 심의 결과를 발표했다. 26쪽 분량 보도자료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숨을 멈춰야 했다. 계속 “이게 경찰이냐” “이게 검찰이냐”를 중얼거려야 했다. 거듭 확인되는 건 단 하나의 사실이었다. ‘수사를 한 것이 아니라 수사를 비켜가려 했다.’

검찰과거사위원회 권고 중 기록 보존이나 공정성 확보 같은 제도 개선 방안을 빼면 하나가 남는다. 장자연씨 소속사 대표였던 김종승씨 위증 혐의에 대한 수사 권고. 장씨 성폭행 피해 의혹에 대해선 “관련자들의 진술만으론 성폭행이 실제 있었는지, 그 가해자, 범행 일시, 장소, 방법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리스트’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누구 이름이 기재됐는지 등에 대해 진상 규명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10년의 시간에 증거와 기억이 풍화됐기 때문이 아니다. 조선일보 관련 의혹에 대해 검찰과거사위는 말했다. “수사 검사는 불기소이유에 장자연 문건에 나오는 ‘조선일보 방사장’이 하OO일 수도 있다는 오해를 만듦과 동시에 방AA 및 방BB에 대해 추가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은폐하는 결과를 낳았음.”

‘조선일보 방 사장의 아들’ 의혹에 대해선 ”수사검사가 방CC의 통화내역을 접대 모임 당일과 다음날, 이틀간만 좁게 확인했다”고 했다. 검찰과거사위는 2009년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장이 조현오 경기경찰청장을 협박한 혐의가 있지만, 공소시효가 완성됐다고 설명했다.

경찰의 경우 장씨 자택과 차량을 압수수색한 시간은 57분에 불과했다. 다이어리, 명함도 압수하지 않았고 가방도 열어보지 않았다. 경찰이 가져갔다가 지인에게 돌려준 장씨의 핑크색 모토로라 휴대폰은 수사기록에 첨부된 3대의 휴대폰 압수물 사진에 없었다.

결정적으로는 당시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데 가장 중요한 통화내역 원본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경찰 수사 당시 장씨 등 주요인물에 대한 1년 치 통화내역을 조회했으나 현재 보존된 수사기록엔 통화내역 원본이 없다. 휴대전화·컴퓨터 등 디지털포렌식 결과물인 엑셀 파일을 저장한 CD도 기록에 첨부돼 있지 않았다. 장씨 개인 다이어리와 수첩은 검사가 ‘사본을 만들라’고 지휘하지 않았고, 유족에 의해 소각됐다.

이 정도라면 ‘사건을 문질러버렸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란 격언쯤은 한가해 보일 정도다. 이 모든 수사 미진과 압수수색 부실, 수사자료 누락은 정말 ‘우연의 일치’일까. 누가 왜 ‘장자연 사건’을 암매장하려고 했을까. 가장 이익을 보는 사람은 누구일까.

* 중앙일보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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