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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5월 20일 13시 53분 KST

왜 지금 '리디노미네이션'(화폐개혁) 이야기가 나오는 걸까?

화폐 단위가 바뀔 때 예상되는 작용과 부작용들

한겨레/고윤결

17,148,078,000,000,000원.

한국은행이 지난달 10일 발표한 2018년말 우리나라 총금융자산은 1경7148조780억원이다. 이처럼 국내 주요 통계에 0의 개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경’ 단위가 등장한 지는 오래됐다.

1962년 화폐개혁 시행 이후 57년째 화폐액면·단위가 묶여있다. 그 사이 국민총소득(GNI)은 4800배 넘게 불어났다. 경제규모의 성장에 맞춰 화폐단위를 변경하는 ‘리디노미네이션’ 논의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배경이다.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은 화폐의 가치는 그대로 두고 화폐의 액면을 바꾸는 것이다. 예를 들면 현재 1000원을 1원으로 낮추는 식이다. 바꿔 말하면 새로운 1원은 기존 1000원의 가치를 갖게 된다.

새 화폐단위를 도입해 바꿀 수도 있다. 지난 2008년에 발의된 리디노미네이션 법안은 1000원을 1‘환’으로 변경하도록 했다. 어떠한 경우든 자릿수 파악을 힘들게 하는 ‘0’을 몇 개 지워낸다고 생각하면 쉽다.

국민들은 일상에서 스스로 화폐단위를 줄이고 있다. 숫자의 길이가 짧아지면 화폐 거래가 편리해지고 장부상 표기도 간편해지기 때문이다. 카페에서 ‘커피 4.5’ 식으로 0을 떼어낸 가격표를 보면 시장이 제도를 앞서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화폐단위가 낮아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선 1000원 하던 물건이 1원이 되니 가격이 싸다고 느끼는 ‘화폐 환상’으로 소비가 늘면서 물가를 자극할 가능성이 커진다. 현금이 실물자산으로 몰리면서 부동산 가격이 급등할 것이라는 ‘괴담’도 돌고 있다. 10억원인 아파트 가격이 10% 상승할 때는 ‘1억원이나’ 올랐다고 생각하지만 화폐단위 절하로 100만원이 된 아파트가 10% 오르면 ‘10만원밖에’ 안 올랐다고 느껴 추격 매수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착시 현상으로, 다른 물가는 별다른 변동이 없는데 부동산만 상승세를 지속하기는 어려울 것이란 반론이 설득력을 얻는다. 주식시장에 빗대면 삼성전자가 지난해 5월 주식의 액면 단위를 5000원에서 100원으로 낮춰 250만원 하던 주가가 5만원으로 바뀌자 개인들이 대거 매수에 나섰지만 최근 주가는 4만원을 위협받고 있다.

게다가 리디노미네이션은 투자자의 재산과 소득도 같은 비율로 낮춘다. 1억원이던 연봉이 어느 날 10만원으로 줄면 심리적인 위축으로 자금이 부동산으로 쏠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물가 상승은 부동산보다 저가의 소비재나 생필품에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삼각김밥이 950원인 경우 화폐단위가 1000분의 1로 낮춰지면 공급자는 0.95원이 아닌 1원으로 올리려 하고 소비자는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일 수 있어서다.

Jenhung Huang via Getty Images

최근 원-달러 환율이 1190원대로 급등하면서 리디노미네이션은 더 주목받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여 회원국 중 1달러당 환율이 네 자릿수인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화폐단위를 1000대1로 낮추면 1달러=1.19원이 돼 외견상으로는 원화가치의 절상 효과를 낼 수 있다. 유로 등 다른 기축통화와도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대외 신인도가 올라가 원화가 안정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하지만 화폐단위 변경만으로 원화의 실질적인 대외 위상이 높아질 수는 없다는 게 일반론이다. 경상수지 적자 등 경제 기초체력이 흔들리면 되레 환율의 변동성이 커질 위험이 있다.

리디노미네이션은 지하경제 양성화 측면에서도 논의되고 있다. 우리나라 지하경제 규모는 국내총생산(1782조원·2018년)의 20~25%로 추정된다. 대략 350조~450조원이 묻혀 있다는 셈법이다. 기존의 현금을 은행에서 신권으로 교환하는 과정에서 음성적인 돈이 양지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확대하고 있는 복지지출의 재원 마련 차원에서 눈길이 가는 대목이다.

홍보국 via 국가기록원
1962년 화폐개혁(제3차 긴급통화조치): 1962년 10환을 1원으로 교체하는 화폐개혁이 단행되었다. 화폐를 교환하기 위해 은행에 모여든 사람들과 기마경찰의 모습이다.

우리나라는 과거 두 차례 화폐개혁을 실시한 바 있다. 1953년에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100원을 1환으로 변경했다. 1962년에는 경제개발계획에 따른 산업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10환을 1원으로 변경했다. 두 번 모두 지하자금을 끌어낸다는 목적이 포함됐다.

1차 때는 1인당 최대 500환까지 신권으로 교환해주고 나머지는 만기 1~3년의 정기예금이나 국채예금으로 강제전환시켜 지하자금이 제도권으로 유입되는 효과를 거뒀다.

하지만 2차 때는 구권을 전액 신권으로 바꿔줘 지하자금은 교환 즉시 다시 장롱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돈의 부피가 줄어 숨기기도 쉬워졌다. 박종규 청와대 재정기획관은 2016년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재직 당시 보고서에서 “화폐단위 변경만으로는 지하자금을 양성화할 수 없다는 점에서 2차 화폐개혁은 실패한 사례”라고 평가했다. 리디노미네이션을 지하자금 양성화와 연결짓는 것은 논의의 초점을 흐릴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겨레 그래픽

화폐단위 변경 반대론자들은 새 화폐를 찍어내고 현금자동입출금기(ATM)와 금융·회계시스템을 교체하는 데 수조원의 비용이 든다고 말한다. 반면 찬성론자들은 그만큼 새로운 수요가 발생해 연관 산업의 생산 증가와 일자리 창출로 내수경기를 부양하는 효과가 있다고 본다.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가 주도한 2004년 화폐개혁 논의 당시 한은은 부가가치가 5조원 이상 창출될 것으로 분석했다. 하지만 물가 상승을 우려한 정부의 반대로 계획을 접어야 했다.

화폐단위 변경 논란은 지난 3월 25일 이주열 한은 총재가 국회 답변에서 “리디노미네이션 논의를 할 때가 됐다고 생각은 한다”고 말하면서 촉발됐다. 이후 이 총재는 말을 거둬들였지만 지난 13일에는 국회의원들의 정책 토론회가 열렸다.

이같은 논의가 지속되는 것은 최근의 저물가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올해 들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4개월 연속 0%대에 머물러 있다. 원-달러 환율도 1200원대를 넘보고 있어 지금이 적기라는 주장이 나온다. 최양오 현대경제연구원 고문은 국회 토론회에서 “물가나 환율 지표로 봤을 때 안 할 이유가 없다”면서도 “디플레이션 초기 진입의 상황에서 인위적인 이슈 창출은 부담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내년 4월 총선 이후 재차 쟁점으로 떠오를 것이라는 관측도 적지 않다. 박정우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물가를 우려하지 않아도 되는 경제적 조건은 무르익었지만 정치적 파장을 감당하기 어려워 유보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리디노미네이션은 법 개정→새 화폐 발행→교환기간 설정→신·구화폐 병용→가격 이중표시제→화폐단위 변경 완료까지 지난한 과정을 밟아야 한다. 임동춘 국회입법조사처 팀장은 “성공 사례로 꼽히는 터키는 관련 입법을 7년 동안 준비해 국민의 공감을 끌어낸 반면, 일본은 여론 수렴을 제대로 못 해 실패했다”며 “충분한 사전논의를 통해 국민적 합의가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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