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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5월 17일 15시 22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05월 17일 15시 22분 KST

나이가 들면서 왕가위 영화의 '과잉'이 이해됐다

이야기는 인간을 구원한다

1990년대에 10~20대를 보낸 이들에게 왕가위와 무라카미 하루키, 밀란 쿤데라는 그들의 젊음에 각인된 아이콘과 같은 존재였다. 당시 내가 가장 열광했던 이는 쿤데라였는데, 나이 들어서 애틋하게 떠올리는 이는 오히려 왕가위다. 이유를 생각해보면, 하루키와 쿤데라는 지금도 가끔 펼쳐보지만 왕가위는 다시 보지 않게 되어서 그런 듯도 하다. 덕분에 그는 90년대의 상징으로, 내 20대의 추억으로 당시 풍경과 함께 떠오르곤 한다.

다시 보는 왕가위

아름다운 인간들이 창궐하고 낯간지러운 대사를 광고 문구처럼 군데군데 읊어대고 세기말과 홍콩 반환이라는 시대적 불안을 꽉 찬 영상과 사운드로 뽑아낸 그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어쩐지 숨이 찼다. 핸드헬드(카메라를 손으로 드는 것) 카메라와 스텝프린팅(저속촬영 뒤 필름의 특정한 부분을 복사해 붙이는 것) 기법으로 흔들리고 뚝뚝 끊기는 등장인물들의 동작은 시공간에 갇힌 그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장치와도 같았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의 과잉이 불편했다. 무엇보다 그의 세계 속 인간들이 왜, 뜬금없는 실연의 아픔과 존재의 결핍에 허우적대는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차였다고 괴로워하는 이가 장만옥·금성무·이가흔 정도의 외모였으니 동일화가 되겠느냔 말이다.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면 차일 리 만무하고, 그렇다손 치더라도 금세 다른 멋진 이를 만나 실연의 아픔 따위는 보란 듯이 극복할 것 같았다. 게다가 그 난데없음이란. 왜 차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그 상처로 고통스러운 이들만 우글거렸다.

그런데 어느덧, 나이가 들면서 이해됐다. 그들은 실연당해 슬픈 것만도 아니었고 태생부터 버림받은 운명으로만 비틀거린 게 아니었다. 인간이란 게, 사소한 어긋남에도 존재 자체를 어긋나게 느낄 만큼 허망한 거였다. 칭기즈칸처럼 미지의 세계를 정복하고 광활한 벌판을 내달리는 영웅쯤이면 몰라도, 아니 그런 호걸이라고 해도 삶의 허무와 존재의 미약함을 극복할 길은 없었을 테다. 그래서 사람은, 그 공허함을 잊기 위해, 텅 빈 구멍을 당장 눈앞에 보이는 무엇으로 환치하기 위해, 일부러 실연의 고통을 확장해 몰입하고 때를 잡아 액체처럼 퍼져서 눈물로 흘리는 거다. 당신이 아무리 아름답든 막강하든 뛰어나든 인간 존재의 유한함과 그 알 수 없음의 막막함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거다. 광활한 시공간 앞에, 헤아릴 수 없는 운명 아래, 의미조차 건지기 아득한 인간 존재는 그 사소함에서 공평하다. 그럼에도 그 사소함을 구원하는 마지막 동아줄 같은 것이 있다면 자신이 중심에 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행위다.

왕가위 영화 속 인간은 과잉된 표정과 몸짓으로, 때로는 밀랍 인형처럼 쿨하고 정지된 모습으로, 자기만의 스타일을, 서사를 만들려고 애쓴다. 감독 왕가위는 인간의 근본적 상실과 허무의 감성을 90년대에 걸맞게 잘 풀어냈고 스타일화했으며, 사람들은 그것에 환호했다.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내 아이들은,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엄마의 어린 시절을 한복에 머리 땋고 우거진 기와지붕 사이를 뛰노는 정경쯤으로 상상했다고 한다. 그들이 살아온 삶보다 세 배는 거뜬히 살아낸 나의 과거는 아득하리만큼 멀어서 시대적 배경을 몇 세기 건너뛰어도 어색하지 않다. 내 앞 누군가의 오래된 과거를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건 다가올 미래를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없다는 것과 맞닿아 있다.

A-Digit via Getty Images

헤아려보기 전에는 무한하게 느껴지지만

탄생과 죽음이 일어나는 삶의 흐름은 나를 비껴 지나가는 저 너머의 풍경인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죽음을 가깝게 절감하지는 못한다. 뮤지션이자 영화인을 넘어서 종합예술가이자 환경운동가로 활동하는 류이치 사카모토가 인후암 판정을 받은 뒤 활동 중단과 투병 생활, 그리고 다시 새 작품으로 돌아오기까지 과정을 차분히 담아낸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2017)에서는 다음 같은 내레이션이 인용된다. 사카모토 본인이 음악을 맡았던 영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셸터링 스카이: 마지막 사랑>(1990)의 한 장면이다. 원작 소설을 쓴 폴 볼스가 직접 나와 책의 일부를 읊는다.

“죽음은 늘 다가오고 있지만, 언제 당도할지 모른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유한함을 잊게 만든다. 우리는 삶을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건 어느 정도 정해진 수만큼 일어난다. 어린 시절의 특별했던 오후를 우리는 얼마나 더 떠올릴 수 있을까? 어떤 오후는 너무나도 특별해서, 그 순간이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 같다. 네 번 혹은 다섯 번은 더 될까? 보름달이 떠오르는 순간을 몇 번이나 볼 수 있을까? 어쩌면 스무 번쯤. 헤아려보기 전까지는 끝없이 이어질 듯 느껴지더라도.”

아이들 앞에서 늙음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일상의 대화 속으로 끌어들이는 편이다. 삶의 변화, 성장과 노화, 죽음에 관한 생각을 막연히 두려워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삶 속으로 통합하고 싶어서다. 언젠가는 아이에게 물었다. 이제 막 열두 살이 넘어가던 때, 아이는 내 얼굴에 짙어지는 팔자주름이 낯설었는지 그것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엄마가 늙는 게 슬퍼?”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에게 답했다.

“이건 엄마 삶의 지도와도 같은 거야. 사람의 얼굴에 생긴 주름은 살아온 날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그림으로 그리는 것과 같아. 사진 찍는 것만 추억을 기록하는 게 아니야. 주름도 그런 거야. 여기 이 주름 보여? 바로 이 돌아가는 길목에서 네가 태어났어. 여기에 길 안내 표지판을 붙인다면 아마도 네 이름이 들어가야겠지?”

“그래도 엄마가 늙는 건 싫어.”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죽음을 늙음과 연관해 이해하는 게 항상 맞는 건 아니야. 죽음은 나이를 가려 찾아오지 않거든.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공평해, 모든 생명이. 어리다고 반드시 더 큰 총량의 삶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 늙었다고 더 작은 삶이 자동으로 남아버린 건 아니야. 죽음이 공평한 만큼 삶도 공평해. 자기 앞의 삶은 모두에게 소중한 거야.”

노화는 죽음과 가까울까

죽음과 가까워지는 것으로 노화를 설명하는 것이 옳을까. 생기발랄함은 살아 있음의 열렬한 표출 방식이기에, 삶은 생기로움의 표상인 젊음과 더 가까운 걸까. 차라리, 생기발랄함이란 두려움 없음과 더 맞닿아 있는 말이 아닐까. 죽음의 징후는 어디에도 있지만, 자신의 신체에서 그 징후를 수시로 발견하는 것이 노화라고 할 수 있을까. 자신의 신체 표피와 사지의 감각으로 당장 보이지 않는다고 죽음은 멀리 있고 삶은 가까이 있는 것이라 믿는다면 그건 또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지만 그 어리석음이야말로 생기발랄의 근원지가 아니던가. 어리석음은 자주 두려움 없음과 연관된다. 그러나 어리석음으로 얻은 두려움 없음은 많은 경우 회한과 부끄러움을 야기한다. 나는 이제 나의 두려움 없음이 어리석음에서 나오지 않기를 원한다. 인지하되 굴복하지 않는 것, 거기서 오는 과감함이자 두려움 없음이길 바란다.

아이들은 매일매일 자라나고 어느덧 눈부신 여인의 형태를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한다. 무심한 등뼈의 유연함과 살갗의 탱탱함은 잔인하게 무르익고 있다. 나는 그녀들의 성장을 보며 수시로 아찔함을 느낀다. 성장의 눈부심, 생명의 무심하여 무시무시한 뻗어나감, 젊음과 아름다움과 생명력이 결합해 이뤄낸 피어오름이 그러하다. 생명의 향연만큼 외설적인 게 있을까. 언제든 다가올 수 있는 죽음과 맞닿아 있음에도 맹렬한 기세로 자신을 펼쳐 보이고 아름다움을 분출하는 행위란 어딘가 낯 뜨거운 면이 있지 않은가.

왕가위 영화 속 귀 따갑게 흐느끼던 인간 군상들은 어디로 갔을까. 한적한 거리를 운전하다가도 뜬금없이 그들을 떠올린다. 이제 그토록 아프고 아름답던 청춘들도 마흔을 훌쩍 넘겼을 테다. 지금 내 앞 차창 너머 거리 한구석에 서서 손을 내밀어 구걸하는, 한때는 아름답고 건장했을 남자가 그였을지 모른다. 내 곁을 스쳐가는, 미끈한 새 차 안의 쾌적한 중년 여자의 당차지만 아슬아슬한 표정의 연원은 그때였는지 몰랐다. 그러다 문득 나를 본다. 백미러에 비친 내 얼굴은 이미 낯설다. 나는 다른 무언가를 통해 나를 가장 자주 보지만, 결코 맨눈으로 보지 못한 채 죽어갈 운명이다. 단 한 번도 스스로 보지 못한 채 죽어가는 한계 속 우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몸부림은 자신을 둘러싼 이야기를 지어내 완결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의 삶을 살아간다고 믿는 일이다.

아툴 가완디는 저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인간의 가장 중요한 욕구로서 자기 이야기를 스스로 완결하고 싶어 하는 열망을 언급한다. 나이 들고 쇠약해지면서 점차 자립적 생활이 힘들어진다고 해도, 인간은 안전 보장과 생명 연장만으로 충분해하지 않는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에게도 자율성 충족은 그들의 행복에서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인간은 스스로 바라보는 자신의 동질성과 개성, 가치를 지켜가며 그에 따른 선택을 하고 삶을 이끌어온 자신만의 서사를 원하는 방식으로 완결하고 싶어 한다. 죽음을 곁에 두되 자기 죽음을 예견할 수 없고, 자신과 평생 같이 있되 직접 대면할 수 없는 인간의 존재적 한계는 모든 인간을 이야기꾼으로 만들었다. 이야기는 그렇게 뜻밖의 방식으로 인간을 구원한다.

완결된 이야기를 향해 가는 삶

늙어가는 나의 얼굴도, 성장하는 아이들의 얼굴도 모두 각각의 이야기 속 수많은 주인공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묶어내 삶을 노래한다. 죽음이 내일 오는 듯 살라는 말보다는 완결된 이야기로 향해 가는 삶 쪽이 내겐 더 설득력 있다. 죽음을 잊지 않아서 절박하고 중요해지는 삶이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 서로를 지탱하는 삶과 죽음이길 원한다.

* 한겨레21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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