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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남편이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 남성도 유방암에 걸린다

  • 이원열
  • 입력 2019.05.16 17:40
  • 수정 2019.05.16 17:52
ⓒTAMMY PORTER

내 남편 마이크는 고양이처럼 목숨이 9개는 되는 사람 같았다. 우리가 만났을 때 그는 자기가 죽을 뻔했던 경험담들을 들려주었다. 바이러스 감염 때문에 35세 때 심장 이식을 받은 것이 그중 가장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는 걸어다니는 기적 같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의기양양한 정신을 깊이 존경했다. 그는 살면서 겪는 일들 대부분에 당황하지 않았다. 늘 느긋하고 침착했다. 반면 나는 긴장하고 성급한 것으로 알려진 A형 행동 양식이라, 모든 걸 통제해야 하는 게 내 제 2의 천성이었다. 나는 논리의 세계에서 살았고 모든 것에 대한 답을 필요로 했다. 인생은 인과관계의 균형이었다. 나는 업보가 존재한다고 믿었고, 하는 대로 내게 돌아오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마이크를 만났을 때 나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접하게 되었고, 현재를 사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그는 내게 선물했다.

우리는 어느 금요일에 로스 앤젤레스의 바에서 만났고, 이틀 뒤 첫 데이트를 했다. 그뒤로 7년 동안 매일 함께 지냈다. 그는 내 짝이었다. 마이크와 사귄지 5주 뒤, 그는 내 집에서 심장마비를 겪었다. 내가 다급하게 911을 부르는 동안 마이크의 호흡이 정지했다. 의료원들이 오기 전까지 나는 11분 동안 심폐소생술을 했다. 뇌에 산소 공급이 너무 오랫동안 끊겼음이 거의 확실했다. 응급실에서 의사들은 마이크가 살아난다 해도 심각한 뇌 손상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마이크는 2주 뒤 멀쩡한 상태로 심장마비 중환자실에서 퇴원해 의료진들을 놀라게 했다. 정말 마이크다웠다.

이 근사 체험을 통해 내가 마이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가 혼수상태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채 중환자실에 누워있을 때 나는 그의 곁에 남겠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를 돕겠다고 결심했다. 겁이 났지만, 이 모든 것을 함께 하며 마이크를 사랑할 수 있다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심장이 좋지 않았고 재이식이 필요했지만 우리는 심장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가 극복했던 다른 모든 장애물과 마찬가지로, 마이크는 다시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2015년에 마이크는 만 46세가 되었다. 우리는 그의 심장 건강에 집중하며 두 번째 이식 수술을 받게 하려 했다. 어느 날 샤워를 하다 마이크는 젖꼭지 뒤에 동전 크기의 멍울을 느껴 내게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물혹이라고 생각한 그는 몇 달 동안 확인해보지 않았다. 멍울이 커지고 그의 젖꼭지가 안으로 들어가고 있어, 결국 내가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우리 둘 다 암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의사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지만 예방삼아 몇 가지 검사를 해보기로 했다. 유방조영상, 침생검, PET 스캔을 해보자 놀랍게도 전이성 유방암 3기 진단이 나왔다. 그냥 암도 아니고, 남성 유방암이었다. 우린 그런 게 있다는 것도 몰랐다. 여성들이야 유방암에 걸리지만, 남성이? 알고 보니 남성이 유방암 진단을 받을 확률은 833분의 1이었다.

마이크의 심장 이식은 우리의 평소 상태로 받아들인 뒤였지만, 거기에 암까지 더해진다고 생각하니 벅찼다. 나는 감정적으로 망신창이가 되었고 이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지 걱정했다. 그의 심장 건강을 모니터하고 새 심장을 기다리며 이식 병원을 찾는 것은 우리의 일상이었다. 암 진단 때문에 이식 부적격으로 분류되어, 이제 심장 이식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고, 마이크는 정말 강했다. 암 진단 때문에 우리가 순식간에 이렇게 되다니?

장기 이식을 받은 사람은 살면서 암 진단을 받게 되는 확률이 2~4배 더 높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나는 멍울 확인을 미루도록 한 것에 대해 큰 죄책감을 느꼈다. 그가 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걸 내가 알고 있었어야 하나? 유방암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어야 하나? 내 소중한 남편이 또다른 건강 문제를 겪고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무력감이 정말 심했고 긍정적인 결과를 간절히 원했다. 처음으로 나는 우리의 미래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감정은 모두 제쳐두고 극단 생존 모드로 넘어갔다. 나는 충직한 아내였고 사실상 간호사가 되었다. 마이크가 병원 진료를 한번이라도 놓치지 않도록, 의료적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챙겼다. 우리는 결의를 품었고 다른 모든 문제들처럼 마이크는 낙관적인 자세로 맞섰다. 2016년 1월에 그는 왼쪽 가슴을 절제했고, 왼팔 아래의 모든 림프절을 제거했다. 암이 그쪽 거의 전부로 퍼졌기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수술로 제거할 수 없는 가슴의 일부 림프절들에도 영향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암과의 끈질긴 전쟁이 시작되었다.

마이크의 면역 체계가 심각하게 약해졌고, 심장도 이식 받은 터라 공격적인 화학 요법은 쓸 수 없었다. 마이크는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힘든 싸움을 계속했다. 나는 우리에게 힘든 일이 너무 많이 생겨 괴로움과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결의와 긍정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마이크를 닮으려 했다.

필자의 남편은 '여성 전용'이라고 되어있는 방에서 유방조영술을 받아야 했다
필자의 남편은 '여성 전용'이라고 되어있는 방에서 유방조영술을 받아야 했다 ⓒTAMMY PORTER

이 당시 초기 몇 개월 동안 나는 의료계가 유방암을 여성의 질병으로만 다루고 있다는 걸 고통스럽게 느껴야 했다. 병원에 갈 때마다 핑크색 레이스가 달린 진찰실에 들어가야 했다. 유방조영실 문에는 ‘여성 전용’이라는 경고가 붙어 있었다. 필요한 검사와 약을 얻으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었고, 유방암 진단을 받았는데도 보험사는 남성에겐 적용시켜줄 수 없다고 맞섰다. 마이크는 이에 정말 낙담했지만, 나는 엄청나게 화가 났다. 암에 맞서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핑크색 리본과 핑크색 병원복은 우리를 외면했다. 치료를 받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그렇지 않아도 괴로운 남성 유방암 환자는 더욱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마이크 때문에 나는 마음이 아팠다. 나는 그를 지켜주고 싶었다. 의료계와 신에게 목청껏 소리지르고 싶었다.

우리가 함께 하는 시간이 더욱 소중해졌다.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는 내일이란 게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여행도 자주 다니고, 최대한 매 순간에 충실하려 했다. 공포는 존재했지만 나는 현재의 아름다움을 포용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늘 불교 철학에 매력을 느껴왔지만, 마이크와의 삶은 불교 철학을 현실에 적용하는 법을 부지불식간에 알려주었다. 미래가 두려워도 우리 사랑의 힘은 엄청난 평화와 만족감을 매일 가져다 주었다. 나는 이 남성을 만나기 위해 34년을 기다렸고, 그와의 매일을 계속 경험하고 싶었다.

2012년에 결혼할 때 마이크는 내가 꿈꿔온 유럽 여행을 결혼 5주년에 같이 가자고 약속했다. 내가 파리에 가는 걸 늘 공상해왔다는 걸 알았던 마이크는 결혼 5주년이 다가오자 암 치료를 받아가면서도 휴가 계획을 짰다. 나는 두려웠다. 마이크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자고 했다. 자신이 암 진단을 받았어도, 다른 장애물이 생겼어도 우리 인생을 한껏 살아야 한다며 유럽에 가자고 우겼다.

나는 겁이 났지만, 그에게서 이 기회를 빼앗는 건 공정하지 못하다고 느꼈다. 이게 그의 마지막 소원이라면? 이번 여행은 예전에 함께 했던 일들과는 다를 것이다. 마이크는 짐을 들거나,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대중 교통을 타고 다니기엔 이미 약해져 있었다. 그가 감당할 수 없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지만, 솔직히 내가 우리 둘의 짐을 다 감당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웠다.

그가 쉴 수 있도록 일정을 조정했다. 원래 계획했던 투어와 관광지를 줄였다. 마이크의 느릿느릿한 페이스에 맞추어 여행을 짰다. 그는 약해지고 있었고, 우리 상황의 현실이 여행 중 눈에 띄게 명확해졌다. 힘들었고 그는 매일 고생했지만, 우리는 함께 품었던 꿈을 이루었고 결혼기념일을 파리에서 축하했다. 만족하고 미국에 돌아왔지만 마이크의 전망과 육체적 한계에 대한 인식은 달라져 있었다.

그뒤 몇 달 동안 암은 그의 척추, 다른 뼈들, 간, 뇌로 번져갔고 마이크는 크게 달라졌다. 기적적으로 심장은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했지만, 그는 거동을 잘 하지 못했고 금세 지쳤다. 산소 호흡기에 의존했고 거의 휠체어에 앉아 지냈지만 그의 정신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 몇 달 동안 매일 방사선치료, 여러 침습성 시술, 입원, 끝없는 진료를 받았다. 나는 그를 돌보는 일을 맡았고 우리의 결혼 생활은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수준으로 힘들어졌다. 결혼식에서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라고 했던 맹세가 현실이 되었다.

그 몇 달 동안 정신적, 감정적, 육체적으로 힘들었지만, 마이크의 강인함을 보며 진정 살아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 정말 많이 배웠다. 말기 신장부전증이 찾아왔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게 밝혀졌을 때, 그는 내켜하지는 않았지만 퇴원하여 집에서 호스피스 케어를 받았다. 나는 마음이 아팠고 내 가장 친한 친구이자 내 삶의 사랑을 잃는다는 생각에 무너져 내렸다. 그래도 그가 더 이상 고통받길 원하지는 않았다. 그의 마지막 날들이 최대한 고통이 없고 즐겁게 하겠다는 결심이 확고했다.

그는 굉장히 약해졌고 우리는 끝이 다가왔다고 확신했다. 그렇지만 그의 예전 기적들을 보면 예측할 수 있듯, 마이크는 힘을 어느 정도 되찾았고 6주를 함께 보낼 수 있을 만큼 ‘괜찮아’졌다. 외식하고, 외출해서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고, 그에게 있는 시간들을 최대한 활용했다. 결혼 6주년 기념일에는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레스토랑에 나를 데리고 가기까지 했다. 키가 2미터가 넘는 마이크에게 옷을 입히고 데리고 나가기는 쉽지 않았지만, 차에 휠체어를 싣고 익숙한 곳에 가서 우리의 결혼을 축하했다. 1년을 더 버텨 이 대단한 기념일을 맞았다는 게 놀라웠고, 그날 밤 잘생긴 남편과 마주앉아 있다니 축복받은 기분이었다. 그때보다 더 깊은 사랑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것이 마이크의 마지막 외출이었다. 그는 단 2주 뒤인 2018년 5월 14일에 집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떴다. 49번째 생일을 이틀 남겨둔 날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열심히 싸웠고, 내게 했던 약속들을 전부 다 지켰다는 게 그에게는 가장 중요했다. 자기가 떠나고 나도 내가 잘 지낼 수 있게 하겠다는 게 그의 가장 큰 약속이었다. 그는 자기가 없을 때 나를 돌봐주도록 내 친구와 가족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지난 한 해 동안 ‘잘 지내기’란 정말 힘들었지만, 삶을 포용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를 본 덕택에 내가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의 힘을 얻었다. 그의 사랑은 내 영혼에 평생 지속될 힘을 주었다. 마이크는 정말이지 걸어다니는 기적이었다. 그가 자신의 아홉 번의 삶을 살아간 방식은 진정 놀라웠다. 그는 내 삶에서 정말 좋은 일들을 불러온 촉매였고, 그를 지켜봐온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남성 유방암은 실제로 존재하며 치명적이라는 것을 나는 직접 경험했다. 남성 발병은 여성에 비해 드물지만, 여성보다는 남성이 더 많이 진행된 상태에서 진단을 받을 가능성이 더 크다. 생존율 역시 남성이 더 낮다. 내가 남성 유방암에 대해 더 많이 알았다면 마이크에게 병원에 가라고 더 강력히 말했을 것이다. 그의 예후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추측만 해볼 뿐이다. 마이크 1주기인 지금, 나는 남녀 모두가 유방암의 잔인함을 깨닫고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는 걸 알아주길 바랄 뿐이다.

 

* HuffPost USA의 I Lost My Husband To Breast Cancer A Year Ago. This Is What I Want You To Know.를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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