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2019년 05월 14일 11시 57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05월 14일 11시 57분 KST

진실의 쇠퇴

지금 세계는 '역사상 가장 심각한 진실의 쇠퇴'를 겪고 있다

Lonely__ via Getty Images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팩트(fact)’다. 우주에서 찍은 지구의 사진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런데도 지구는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해 넷플릭스가 방영한 다큐멘터리 영화, ‘그래도 지구는 평평하다’를 보고, 그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데 놀랐다. ‘둥근 지구’를 뒷받침하는 수많은 증거 앞에서도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사람들이다.

주변의 조롱과 멸시, 소외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온라인은 구원의 생명줄이고, 지친 영혼의 안식처다. 이들은 ‘핍박받는 소수’의 동지애로 온라인에서 똘똘 뭉쳐 ‘평평한 지구’에 대한 확신을 강화하고, 확산하며 ‘반향실(反響室) 효과’를 극대화한다. 지구가 평평한 증거라며 이들이 만들어 올린 유튜브 동영상만 800종이 넘는다. 현대 과학의 산물인 인터넷과 소셜미디어가 되레 중세적 미신의 ‘성소(聖所)’가 되고 있는 셈이다.

인간은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신념에 배치되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자기 확신을 더욱 강화하는 ‘확증 편향’의 문제는 온라인 소통이 일상화하면서 더욱 심화하고 있다. 각자 사실이라고 믿는 것을 중구난방(衆口難防) 떠들다 보니 사실과 주장의 경계가 모호해져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미국의 대표적 싱크탱크 중 하나인 랜드연구소의 마이클 리치 대표는 확증 편향 때문에 진실이 설 자리를 잃고, 정책 결정과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상황을 ‘트루쓰 디케이(Truth Decay)’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말로 ‘진실의 쇠퇴’ 쯤 될 것이다. 리치 대표는 동료인 제니퍼 카바나 박사와 함께 지난해 출간한 『트루쓰 디케이』에서 이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전 세계적 경각심을 촉구했다.

두 사람은 지금 미국은 역사적으로 네 번째 진실의 쇠퇴를 겪고 있다고 진단한다. 미디어 환경의 급격한 변화가 정치·경제·사회적 위기와 맞물릴 때마다 진실이 쇠퇴하는 현상이 나타났다는 게 그들의 분석이다. 1880~90년대의 정치적 포퓰리즘이 신문의 판매부수 경쟁으로 등장한 ‘황색 저널리즘’과 맞물리면서 첫 번째 진실의 쇠퇴 현상이 나타났고, 1920~30년대 출현한 타블로이드 신문과 라디오 방송의 ‘재즈 저널리즘’이 대공황과 맞물리면서 두 번째 진실의 쇠퇴를 맞게 됐다. TV가 등장한 60~70년대 탄생한 ‘뉴저널리즘’이 베트남 전쟁과 워터게이트 사건과 맞물리며 진실은 또 한 번 심각하게 쇠퇴했다.

케이블 뉴스 방송과 인터넷 매체, 소셜미디어 같은 뉴미디어의 확산이 정치·사회·경제적 양극화와 맞물리면서 현재 미국은 역사상 가장 심각한 진실의 쇠퇴를 겪고 있다고 두 사람은 지적한다. 24시간 온라인 속보 체제에 내몰려 심층보도에 시간과 돈을 투입할 여유가 없어진 언론은 너도나도 ‘전문가(pundit) 저널리즘’에 매달리고 있다. 전문가 모자를 씌운 사람들을 화면이나 지면에 등장시켜 떠들게 하는 것이 숙련된 기자를 현장에 투입하는 것보다 훨씬 값싸게 뉴스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과 주장이 뒤죽박죽된 전문가들의 무책임한 발언을 그대로 중계하거나 받아적으면서 언론에 대한 신뢰는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과 정보에 입각하지 않고, 각자 자기 입맛에 맞는 데이터를 토대로 주장을 펼치는 한 건전한 토론은 불가능하다. 정치적 타협이 어려워져 정책 결정이 마비되거나 지연되고, 부실해진다. 진실이 쇠퇴하면서 정부는 물론이고, 언론·학계·연구소·사법부 등 사회적으로 중요한 정보 출처의 공신력도 추락하고 있다. 미국만 아니라 전 세계적 현상이고,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각자 유리한 데이터를 근거로 한쪽에선 소득주도성장이 성과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다른 쪽에선 완전히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북한이 발사한 무기를 놓고 한쪽에선 발사체라고 주장하고, 다른 쪽에선 미사일이라고 주장한다. 서로 자기 말만 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누구 말이 옳은지 판단하기 어렵다. 언론을 봐도 무엇이 진실인지 알기 어렵다. 중계에 급급하거나 입맛에 맞는 부분만 선택적으로 보도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진실의 쇠퇴를 막으려면 무엇보다 언론이 본연의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 공정하고, 균형 잡힌 시각에서 진실을 파헤쳐 보도함으로써 사회를 밝히고, 썩지 않게 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 차별성 없는 고만고만한 뉴스보다 심층보도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 교육을 통해 ‘미디어 해독력(media literacy)’을 높이고. 비판적 사고를 함양하는 정부의 노력도 중요하다. 타협이 불가능한 상반된 세계관이 진실이 쇠퇴하는 근본 원인임을 직시하고, 양극화 해소에도 더욱 힘을 쏟아야 한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무기는 “내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논리다. 그렇지 않다. 진실을 무시하거나 외면한 채 자기주장만 옳다고 우기는 아집과 독선이 세상을 망친다.

* 중앙일보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PRESENTED BY 호가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