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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에는 '합의'가 중요해!

정말 설명하고 싶은 것들이 많은 요즘이다

  • 박세회
  • 입력 2019.05.10 11:06
  • 수정 2019.05.10 11:08
ⓒHBO

HBO(홈박스오피스)의 판타지 드라마 ‘왕좌의 게임’은 마지막 여덟 번째 시즌을 시작했고, 마블코믹스의 ‘어벤져스 : 엔드게임’(이하 엔드게임)은 타노스와의 위대한 싸움에 결말을 지었다. 지난 약 10년간 전 세계 팬들의 평행우주를 지배해 오던 가장 거대한 두 개의 판타지 서사가 막을 내리는 셈이다.

그 와중에 여러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으니, ‘설명병’(설명하지 않으면 안달이 나는 병)의 일종인 ‘스포병’(스포일러를 말하고 싶어 안달이 나는 병)에 걸린 사람들이다. 지난달 24일 홍콩의 한 남성은 엔드게임의 개봉일에 멀티플랙스 영화관 앞에서 그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에게 결말 내용을 큰 소리로 떠들다 집단 폭행을 당했다. 이달 2일에는 텍사스의 도미노피자에서 일하는 한 남성이 엔드게임을 못 본 동료에게 스포일러를 말했다가 폭행을 당했다.

엔드게임은 22개 영화가 맞물린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한 시기를 매듭짓는 영화다. 스포에 용서는 없다. 여론 역시 ‘폭력은 범죄지만, 스포를 당한 분노의 심정도 이해는 간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최근 나 역시 심각한 설명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왕좌의 게임’ 마지막 시즌을 맞아 앞선 에피소드 정주행을 시작한 이후로 우리 집 거실에선 설명하려는 자와 설명 듣는 게 싫은 사람 사이에 극도의 긴장감이 흐른다. 이미 2011년부터 이 시리즈의 모든 에피소드를 섭렵해 온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설명하려 들고, “마지막 시즌까지 나오면 보겠다”며 미뤄 온 아내는 스포를 당할까 봐 신경을 곤두세운다.

다시 보는 왕좌의 게임도 재밌지만, 왕좌의 게임을 처음 보는 사람과 같이 보면서 설명하는 게 이렇게 재밌을 줄이야. “라니스터 가문의 공식 가훈은 ‘나의 포효를 들어라!’지만, ‘라니스터는 언제나 빚을 갚는다’는 비공식 가훈이 더 유명해”라며 아내에게 각 가문의 상징과 가훈, 그들이 지배하는 지역의 지정학적 위치까지 떠들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근데 사실 아내도 설명병이 조금 있다. 3년 전 요가를 시작한 아내의 취미는 우리 집 거실에서 진행하는 요가 수업이다. 학생은 바로 나. 한밤에 둘이 맥주를 한 잔씩 홀짝이다 말고 갑자기 나를 일으켜 세워서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 안의 통증을 알아차리세요”라며 ‘아도무카 스바나사나’(견상자세)나 ‘우타나사나’(전굴자세)를 시킨다. 아내는 통증은 느끼는 게 아니라 ‘알아차리는 것’이라며 “배운 걸 다시 가르치는 과정이 꽤나 재밌다”고 말한다.

설명병엔 과거의 영화에 흠뻑 젖는 ‘고조선 병’ 타입이 많다. 우리 회사에서는 가끔 연차 높은 선배들이 1990년대생 후배들에게 옛날얘기를 늘어놓곤 한다. 화제는 ‘X세대 인기가요’부터 ‘모래시계’나 ‘남자 셋 여자 셋’ 등의 티브이 드라마까지 다양한데, 가끔은 정말 ‘저런 걸 설명해서 뭐하나’ 싶을 때도 있다.

일전에는 1980년대 다이나믹콩콩코믹스에서 냈던 해적판 만화 시리즈 ‘용소야’까지 소재가 넘어가기도 했다. 한 동료가 통배권 자세를 몸으로 보여주는 지경까지 이르자 후배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들 평소에는 점잖은 사람들이지만, 용소야의 통배권이 뭔지 설명해주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던 거다.

설명병이 기자들에게만 있는 직업병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얼마 전 와인 클래스를 시작한 한 지인은 “수업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짧게 말하고 오래 듣는 것”이라고 말했다. 왜냐고 물으니 “수업에 온 사람들은 보면, 와인에 대한 지식을 사람들 앞에서 뽐내고 싶어 하는 열망이 엄청난 경우가 많다”라며 “그런 사람들에게 무대를 마련해 주는 것 역시 클래스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스포나 설명이나 ‘남보다 내가 많이 안다는 걸 티 내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한다. 농담 삼아 ‘병’이라 이름을 붙였지만, 누구에게나 조금은 있는 욕망이다. 다만 어떤 욕망이든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충족될 때는 ‘합의’가 중요하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되겠다. 

묻지도 않았는데 설명하면 ‘안물안궁‘이고, 묻지도 않은 걸 불특정 다수에게 소리치면 ‘스포’고, 하나만 물었는데 10개를 얘기하면 ‘TMI’다. ‘왕좌의 게임’ 시즌 5를 볼 때쯤 아내는 결국 “설명은 내가 원할 때만, 재생을 정지하고 최대한 일목요연하게 감상에 도움이 되는 수준에서 그칠 것”이라는 원칙을 세웠다. ‘원할 때’라는 건 정말 거듭 중요하다. 

*이 블로그는 한겨레 ESC에 게된 칼럼을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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