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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5월 09일 11시 09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05월 09일 11시 09분 KST

동물권 논의는 '동물에 대한 감상적 접근'이 아니다

'인간다움'에 대한 기만적 앎을 검토해야 한다.

세계 실험동물의 날인 4월 24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수의생물자원연구동 앞에서 열린 '이병천 교수 파면 촉구' 기자회견에서 동물보호단체 회원들이 복제견 연구 사업 중단과 실험동물법 개정을 촉구했다.

중세 시대 수녀들에게 금지한 3D는 춤(dance), 화려한 옷(dress) 그리고 개(dog)였다. 몸을 직접적으로 이용하는 춤, 몸에 걸친 화려한 옷과 더불어 귀여운 개는 세속적 욕망을 자극한다고 본 것이다. 근대에 유럽인들의 사치품 중 하나도 이국적인 개였다. 수행하는 사람이 아닌 욕망을 드러내는 세속 인간에게 개는 과시의 수단이었다.

인간에게 개란 무엇일까. ‘애완’에서 ‘반려’로 명명이 바뀌듯이 그들의 위치도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한쪽에서는 여전히 ‘식용’이다. 개만이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동물이 인간에게 ‘입양’되어 인간과 함께 ‘가족’이 되어 산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하고 불리는 방식이 바뀌어도 현재 한국에서 동물은 인간에게 법적으로 재물이다. 또한 인간 중심의 언어가 그들의 처지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에 이러한 언어의 모순이 잘 담겨 있다. 보호소, 안락사 등은 때로 인간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명칭이다.

인간에게 동물이란 무엇일까. 소셜네트워크에 넘쳐나는 귀여운 동물 사진이나 영상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 앞다리를 다쳐 몸을 꼿꼿하게 세운 채 뒷다리로만 잠깐 걷는 개를 보고 ‘사람 같다’며 웃는 사람들. 동물의 행동이 ‘사람처럼’ 보일 때 이는 인간에게 유머의 대상이 되거나 상황에 따라 감동도 준다. 반면 인면수심이라는 말처럼 인간에게 ‘짐승 같은’ 모습은 악행에 해당한다. 그렇기에 국회의 신속처리 안건을 둘러싼 자유한국당의 방해 정치를 ‘동물국회’라 명한다.

동물의 집단생활과 그들의 생존 전략은 인간에게 비하받을 정도로 한심하지 않다. 뱀한테 물려 죽은 동료 곁에서 떠나지 못하는 원숭이의 눈빛을 보았을 때, 도로에서 죽은 동료 제비의 곁을 지키며 공중을 맴도는 제비 떼를 보았을 때, 먹이를 사이에 두고 표범과 대치한 하이에나가 무리의 지도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모습을 보았을 때 동물의 세계는 인간의 언어 속에 자리한 그 동물의 세계와는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예는 무수히 많다.

고문은 인간적인가, 동물적인가. 인간이 인간을 고문하는 이유는 원하는 목적을 얻기 위해서다. 자백이라는 형식을 거치며 고문의 폭력성을 정당화한다. 인간은 때로 동물도 고문한다. 다만 이를 목적에 맞게 ‘실험’이라 부른다. 동물을 실험하는 이유는 인간에게 필요한 정보를 얻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다. 고문받는 인간과 실험실의 동물은 모두 이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고문 행위는 짐승 같은 짓이 아니라 매우 인간적인 행동이다.

동물과 여자는 공통적으로 그 몸 자체가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된다. 과거의 노예도 오직 목적을 위한 수단인 몸 덩어리에 불과했다. 시장에서 매매되는 개인의 소유물이다. 여성이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면 흑인 노예는 ‘말을 알아듣는 동물’ 취급을 받았다. 곧 이 세계의 모든 약자가 가지는 공통점은 언어가 없는 물질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고통으로 몸을 훼손함으로써 언어를 상실하게 만들고 한 세계를 파괴한다. 수단으로 이용되기에 이들은 평생 반복적인 노동을 하거나 반복적인 실험을 당한다. 계속 새끼를 낳거나 같은 실험의 대상이 되어 서서히 몸이 망가지며 소멸된다. 이 몸은 언제든 다른 몸으로 대체 가능하다. ‘말 못하는 짐승’이라 부르는 동물들을 고문하는 행위는 훨씬 쉽게 윤리적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실험’이라 부르면서.

동물권 논의는 여전히 동물에 대한 감상적 접근으로 폄하받기 일쑤다. 그러나 이는 감상적 접근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을 가급적 줄이기 위해 현실적으로 매우 필요한 논의다. ‘인간다움’에 대한 우리의 기만적 앎을 검토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다움이 아니라 인간 중심을 넘어선 생각이다. 인간을 위해 동물실험이 꼭 필요하더라도 최소화하려는 노력은 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을 위해 사역하던 개를 실험용으로 ‘쓰고 버리는’ 행위는 인간적인가, 동물적인가.

 * 한겨레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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