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타인의 죽음이 내 삶에 들어올 때

ⓒhauged via Getty Images

모르는 사람의 죽음이 갑자기 내 삶에 들어올 때가 있다. 한국의 근현대사 달력에는 아직 진상이 규명되지 않은 죽음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어떤 죽음들은 날짜로 변환되어 각인되었다. 4월3일, 4월16일, 5월18일 같은 날들. 죽은 자의 시간은 이렇게 종종 날짜로 새겨졌다. 드물게 나이로 기억되는 일도 있다. 얼마 전 세명의 부모에게 각각 학대와 성추행 등의 피해를 당하다가 한 아이가 살해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라디오로 뉴스를 듣고 있는데 사건을 전달하던 기자가 피해자가 12살이었다는 사실을 말할 때 아주 잠시 숨을 멈추었다. 친부는 술을 마시고 아이를 때렸고 의부는 성추행을 했고, 친모는 아이를 불러내어 살해당하도록 공모하고 방조했다고 한다. 가정폭력과 성폭력에 시달리다가 살해당한 피해자가 고작 12살이라니, 아이가 견뎌내야 했을 삶이 상상도 못 하게 쓰라려 눈을 감고 명복을 빌었다.

슬픔과 애도의 의례는 언제나 살아남은 자를 위한 것이다. 죽은 이의 영혼을 위해서가 아니라 죽인 자와 함께 살아가야 할 남은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일이다. 미처 알지 못했던 한 인간의 삶과 함께 할 기회를 잃어버린 것을 애도하는 일이다. 기쁨은 나누면 두배가 되고 슬픔은 절반이 되는 것이 아니다. 기쁨이건 슬픔이건 나누면 두배가 된다. 그러니까 기쁨은 원래 그 기쁨의 당사자가 가졌을 때 제일 순정한 기쁨을 오롯이 누릴 수 있고, 슬픔은 나눌수록 농도가 옅어진다. 당사자와 가족들이 가진 슬픔은 있는 그대로 그들의 몫으로 남겨둘 필요가 있다. 아무리 함께 추모하고 슬퍼한다고 한들 타인의 고통은 나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은 두가지 차원에서 윤리적 태도를 요구한다. 하나는 인간은 죽음 앞에 평등하다는 걸 마음 깊이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나의 삶과 너의 죽음 사이의 아주 얇은 장막만이 있을 뿐이며 이 차이는 그저 우연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걸 기억하라는 요청이다. 이것이 죽음 앞에 사람들이 겸허해지는 이유일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결코 평등하지 않은 눈앞의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 그런 죽음에는 남아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빚을 지고 있게 마련이다. 억울하고 안타까운 죽음이 남은 사람들의 삶을 비추는 법안의 이름으로 남은 경우도 있다.
모르는 사람의 죽음을 내 삶에 맞이했던 최초의 기억은 혜영이와 용철이였다.

1990년 3월9일, 부모가 맞벌이를 하러 나간 사이 서울 망원동 한 연립주택 반지하방에 화재가 일어나 5살과 4살 두 아이가 숨지는 사고가 있었다. 서울 외 지역에서 점점 살기가 어려워졌던 시절, 서울에 갓 올라온 도시빈민층의 빈곤 문제와 가장 취약한 상태로 내몰린 아동복지의 실태가 드러난 사건이었다. 혜영이와 용철이는 바로 그 아이들의 이름이었다. 사건이 알려진 당시 많은 시민들이 슬퍼했다. 이를 계기로 1991년 영유아보육법이 만들어졌다. 지난해 겨울에 만들어진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은 2016년 5월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는 도중에 발생한 사망 사고 이후 발의됐다가 국회에서 2년간 표류하던 법안이었다. 이 법안은 2018년 12월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가 숨지면서 비로소 국회를 통과했다.

지금 살고 있는 삶 자체의 토대를 흔드는 모르는 사람의 죽음도 있다. 2016년 5월17일 강남역 10번 출구 근처 한 술집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칼에 찔려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여성을 표적으로 삼은 살인이었기에 남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또래의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포스트잇에 글귀를 적어 붙이는 자발적인 추모 운동이 일어났고, 뒤이어 여성이 일상적으로 느끼는 두려움에 대해 말하는 필리버스터가 이어졌다. “나일 수도 있었다”는 깨달음은 여성 대중의 행동주의로 이어졌다. 유학을 준비하고 탈조선을 꿈꾸던 이들은 지금 여기에서 한국 사회를 바꾸지 않으면 언제까지 목숨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행동하겠다”는 다짐을 썼다. 당시 포스트잇을 수집해서 기록한 책 <강남역 10번 출구, 1004개의 포스트잇>에 이런 말이 남아 있다. “친구가 말합니다. 이런 일 많았는데 왜 이번에만 이렇게 커진 걸까? 저는 충격받았습니다. 여성의 죽음이 익숙해진 나라, 데이트 폭력과 강간이 만연한 나라, 바꿔주세요. 바꿔나가요.” 강남역 여성표적살인 3주기를 추모하며.

* 한겨레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학대 #강남역 살인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