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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을 볼 권리, 보지 않을 권리

작고 다양한 영화가 관객을 만날 권리도 보장돼야 한다.

오죽하면 ‘마블민국’ ‘마블의 민족’이란 말이 나올까. 마블의 수퍼히어로 무비 ‘어벤져스:엔드게임’(어벤져스4)표가 무섭게 팔리고 있다. 개봉 8일째인 1일 관객 800만을 넘었다. 2008년 ‘아이언맨’으로 시작된 11년 여정을 집대성해, 팬들에게는 기념비적 영화다. 사전 최고 예매(230만), 개봉 4시간만에 100만 돌파, 일일 최고 관객(166만) 등 신기록 행진 중이다. 1000만 돌파도 기정사실이 되는 분위기다. 지금껏 마블 영화는 2편이 1000만 클럽에 들었다. 2018년 ‘어벤저스:인피니티 워’(1121만), 2015년 ‘어벤저스:에이지 오브 울트론’(1049만)이다.

새로운 관람풍경도 등장했다. 휴가를 내거나 수업을 빼먹고 극장을 찾는다. 스포일러와의 사투도 벌어졌다. 러닝타임이 3시간 57초라 극장은 24시간 풀가동 체제. 새벽 2시(26시)·4시(28시), 오전 6시 30분에도 영화가 걸렸다. 아이맥스, 4DX 등 일반관보다 2~3배 비싼 특별관도 예매 전쟁 중이다. CGV에 따르면 개봉 첫 주 재관람률은 5%로, N차 관람 열풍을 일으킨 ‘보헤미안 랩소디’의 같은 기간에 비해 두 배가량 높았다. 관객 연령대는 20~30대가 65%였다(CGV). 마블 시리즈와 함께 성장해온 젊은 세대이자, ‘덕질’을 주된 삶의 방식의 하나로 체화한 세대다.

마블은 ‘아이언맨’ 때부터 “새로운 슈퍼히어로 무비의 전형을 제시했다”는 평을 받아왔다. 영원, 죽음, 혼돈, 질서 같은 추상적 개념을 캐릭터로 구현하고 우주를 무대로 장대한 스토리를 펼친 마블 원작 만화 덕이다. 인간적이고 약점 있는 새로운 영웅상도 제시했다. 최근에는 여성, 흑인 등 소수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백인 이성애자 남성 히어로’의 틀도 깨고 있다.

국내에서는 팬덤 기반으로 최초로 1000만을 돌파한 시리즈 영화가 됐다. 사회현실과 맞물려 공분을 자아내며 강한 입소문 효과로 흥행한 역대 1000만 영화 흥행공식을 비켜났다. 마블 팬이 아니어도 볼 수 있지만 대사, 캐릭터, 에피소드들이 전작과 물려 있어 팬이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는 ‘팬 기반 영화’다.

책 『슈퍼팬덤』에 따르면 “2015년 전 세계 흥행 순위 톱 10에 선정된 영화는 ‘스타워즈:깨어난 포스’ ‘어벤저스:에이지 오브 울트론’ ‘쥐라기 공원’ 등 거의 모두 팬 중심적 경향이 강했다.” 팬들이 연대감을 확인하며 ‘집단관람 의례’를 벌이듯 극장을 찾고, 패러디 등 자체 콘텐트를 생산하며 놀이문화로 소비되는 영화 얘기다. 이때 극장은 관객에게 압도적인 공동체 경험이나 영화만의 시청각적 쾌감을 극대화해주는 공간이 된다. 더이상 새로운 이야기를 찾지 못한 할리우드가 프랜차이즈(시리즈)물에 기반한 ‘팬덤 영화’를 출구로 삼았고, 이것이 넷플릭스 시대 극장의 활로로도 이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물론 그 기반에는 누군가의 팬이라는 것이 자신의 존재 증명이 되고, 상대를 지지·응원(서포트)하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여는 ‘팬 정체성’ 시대라는 게 있다.

그러나 ‘어벤져스4’는 최초로 상영점유율 80%를 넘기며 고질적인 스크린독과점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총 3058개 스크린 중 최다 2835개를 싹쓸이했다. 스크린 수로만 치면 96% 독점상황이다(그간 ‘어벤져스’ 시리즈의 폭발적 흥행이 한국 특유의 스크린 몰아주기의 결과라는 분석도 있다). 게다가 CGV에서는 한국 영화 ‘미성년’ 예매 관객에게 예매 취소를 종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CGV 측은 “예매 관객이 1~2명일 경우 다른 상영관을 안내했다”고 해명했지만, 이건 명백한 관람권 침해다. 우리 같은 스크린독과점은 아니지만, 해외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뉴욕타임스는 점차 영화들이 “극장상영용, 온라인 스트리밍용으로 양분화되고 있다”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말을 인용하며 “‘인디아나 존스’ 같은 팝콘영화는 극장에서 볼 수 있지만 ‘링컨’ 같은 냉철한 영화들은 온라인으로 봐야 하는 날이 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1000만 직전에 스코어가 멈췄지만 ‘보헤미안 랩소디’도 팬덤영화였다. 팬들이 열광적으로 반복관람했다. 그러나 스크린 싹쓸이 대신, 6개월 가깝게 장기상영하며 994만 명을 모았다. 최다 스크린 1179개, 평균 재관람률은 8%였다. ‘신과 함께-인과 연’(2018)이 두 달간 최다 스크린 2235개로 1227만 명을 끌어모은 것과 비교된다. ‘짧고 굵은’ 싹쓸이가 아니어도 1000만 흥행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마블 팬덤의 볼 권리만큼이나 작고 다양한 영화가 관객을 만날 권리도 보장돼야 한다. 때마침 스크린상한제 논의가 나오고 있다. 영화 생태계뿐 아니라 관객의 선택권 차원에서도 미룰 일이 아니다.

* 중앙일보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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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블 #어벤져스: 엔드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