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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쑥 나타난 식물들이 사무실 분위기를 바꿨다

  • 홀로
  • 입력 2019.05.06 18:06
  • 수정 2019.05.07 09:40
3년 전부터 회사에서 식물을 키우고 있다. 삭막한 사무실에 나타난 초록색 생명체에 고무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동료들도 꽃이나 허브를 한두가지씩 창가에 갖다 놓고 돌보기 시작했다. 불쑥 나타난 식물 떼는 좋은 한담거리였다. 
3년 전부터 회사에서 식물을 키우고 있다. 삭막한 사무실에 나타난 초록색 생명체에 고무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동료들도 꽃이나 허브를 한두가지씩 창가에 갖다 놓고 돌보기 시작했다. 불쑥 나타난 식물 떼는 좋은 한담거리였다.  ⓒ한겨레

회사에서 키우는 프리지어에 꽃이 피었다. 불쑥 기다란 꽃대가 올라오더니, 주말을 보내고 출근했을 땐 달콤한 향기가 나는 노란 꽃이 큼직하게 피어 있었다. 전에는 그냥 길 가다 한단에 3천원, 4천원씩에 파는 꽃으로만 보이던 게 프리지어였다. 그런데 지난 가을 새끼손톱만한 알뿌리를 몇개 얻어 화분에 심은 뒤로는 그 꽃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반년 가까이 싹이 올라오고 잎이 돋는 걸 지켜보고 나니, 그 ‘싸고 흔한’ 꽃 한송이 핀 것이 얼마나 기쁘고 귀한지. 마음 같아선 사내 방송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기획부에 프리지어가 피었습니다, 여러분!”

3년 전부터 회사에서 식물을 키우고 있다. 연초에 사무실 구석에 버려진 화분을 발견한 게 시작이었다. 연말에 한바탕 인사이동이 있고 난 뒤였다. 흙은 바싹 말라 굳어 있고, 잎 한장 없이 엄지손가락만한 줄기만 쪼그라들어 있었다. 가엾어서 물을 흠뻑 주고 사무실 창가에 옮겨놓았다. 그런데 사나흘 만에 그 꽁다리 같던 줄기가 ‘버럭버럭’ 이파리를 내기 시작했다. 조금 더 지나자 불쑥불쑥 빨간 꽃도 피워 제 이름을 알렸다. 제라늄이었다.

그저 물과 햇빛을 준 것뿐인데, 금세 몰라보게 싱싱함을 되찾는 식물의 생명력에 나는 압도되고 말았다. 반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다. 제라늄을 키우기 시작한 것은 마침 내가 막 독립을 해 나왔을 때기도 했다. 옛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우렁각시 이야기를 지어냈는지 나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빨래든 설거지든 내가 안 하면 아무것도 안 돼 있는 정확한 세계. 그렇다고 돈을 내고 도움을 청하기는 부끄러울 만큼 작은 집. 결국 ‘내가 내 몫을’ 하며 살겠다던 포부가 매일 ‘내가 내 몫만’ 하기도 벅찬 현실로 바뀔 때쯤이었다.

그런데 내가 자신만이 아닌 무언가를 더 보살핀다는 것만으로, 오그라들던 자기효능감도 통통하게 물이 오르는 것이었다. 대화도 없던 가족이 손주가 태어나거나 반려동물을 들이면서 관계를 회복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삭막한 사무실에 나타난 초록색 생명체에 고무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동료들도 꽃이나 허브를 한두가지씩 창가에 갖다 놓고 돌보기 시작했다. 우리 사무실은 업무가 많고 인사이동도 잦아서 거의 공유사무실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다 불쑥 나타난 식물 떼는 좋은 한담거리였다. 부모들이 육아 이야기로 금방 친밀해지는 것처럼, 사무실 사람들은 물꽂이한 청페페 이야기를 하며 커피를 나눠 마셨다.

업무 문제로 티격태격하고 한동안 좀 냉랭했던 동료와도, 화분에 대신 물을 준 것을 계기로 슬그머니 화해를 했다. 동료가 키우는 아보카도가 목말라 보여서 아무 생각 없이 물을 줬는데, 반나절 뒤 그 동료가 내 자리로 왔다. “○○씨가 제 화분 물 주셨어요?” 소심한 나는 움찔 움츠러들었다. 아, 혹시 멋대로 물 줘서 기분이 상했나? 괜한 오지랖이었나? 0.5초 사이에 온갖 번민이 밀려드는 찰나 동료가 말했다. “며칠 동안 물 주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네요.”

물꽂이 이야기하며 커피 한잔

그해 여름이 되었을 때, 회사 창가에는 서른 가지나 되는 화분이 늘어섰고 나는 ‘가드너’가 되어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돈 주고 흙과 모래를 샀고, 화분을 사면 화분 받침도 사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여기저기서 나눠 주는 씨앗들을 다 심어 보았다. 바질, 상추, 치커리, 방울토마토, 심지어 토종 벼까지. 바람이 불면 스티로폼 상자에 꾸며놓은 작은 논에 심어놓은 모들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상사들이 지지대를 묶어준 토마토가 밀림처럼 쭉쭉 자랐다.

꽃이건 채소건 나무건, 사무실 창가에 가져다 놓는 것마다 신기하게 잘 자랐다. 한뼘짜리 모종을 가져오면 햇빛과 바람을 실컷 맞고 몇달 만에 1m 남짓한 높이로 자라기 일쑤였다. 그게 다 사무실이 남향이라 채광이 좋아서라는 걸 곧 알게 되었다. 그동안 집을 옮겨 다니면서 남향, 남향 노래를 불렀으면서도, 식물을 키우면서야 비로소 남향의 위력을 체감한 것이다. 아, 식물도 이렇게 에너지를 쑥쑥 받는데 사람이라고 다르겠는가 싶었다. “그래서 서울에서 마당 딸린 남향집에 살려면은 삼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지 않습니까.” 어느 날 아침 커피를 마시며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서울 토박이 상사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씀해주셨다. “어라, 돈을 쌓아야 하는 게 아니고요?” 그러자 상사는 대답 대신 먼 산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셨다. 나는 주택가 오목한 골목에 있는, 마당 없는 북동향 내 집을 생각했다. 그렇다. 내가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저 우리 가문의 부덕의 소치인 것이다.

잎이 났을까, 꽃이 피었을까, 화분들 볼 생각에 출근하는 발이 가벼워졌다. 대신 새로운 괴로움도 생겨났다. 그 좋기만 하던 연휴가 스트레스가 될 줄이야. 남향이라 채광이 좋은 만큼, 오후가 되면 사무실 창가 자리는 온도가 35도 가까이 올라간다. 나흘 이상 휴일이 이어지면 블라인드를 치거나 화분 받침에 물을 가득 부어놓는 대비로는 부족하다. 유난히 길었던 재작년 추석 연휴, 나는 결국 불안을 못 이기고 연휴 중간에 회사에 나가보고 말았다.

창을 열어 환기를 하고 바짝 마른 화분들에 물을 주면서,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생각이 나 씁쓸했다. 나가던 발걸음을 되돌려 들어오게 만드는 그 이야기도 딱 난초 화분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까. 집착이 된 애착, 괴로움이 된 즐거움. 동생 같던 강아지가 노환으로 죽은 뒤, 나는 다시는 강아지를 키우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말 없고 발 없는 식물을 키우는데도 이렇게 무거운 책임이 생길 줄은 몰랐다.

내 상황에 이걸 하는 게 맞는 걸까

내게 나 자신 이상을 보살피는 힘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기쁨, 내가 보살핀 생명이 자라나는 뿌듯함 뒤에 오는 의심과 자괴감도 있다. 과연 내 상황에서 이걸 키우는 게 맞는 걸까? 언젠가 베란다나 텃밭 한뼘이라도 마련했을 때 시작할걸 하는 생각이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최근에 꽃이 진 사랑초 알뿌리를 정리하다가, 내가 예전에 결혼도 이렇게 고민한 기억이 떠올라 혼자 웃음이 났다. 그때도 하느냐 마느냐보다 자격과 형편부터 걱정했던 것 같다. 지금도 조만간도 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하는 건 언제나 다 대단하고 번듯하게 하고 싶어서 걱정을 버는구나. 화분에 식물을 키우는 책임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고, 그걸 무겁게 받아들이는 게 내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화분을 더 늘리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기준은 아마 ‘홧김에 퇴사해도, 한번에 차에 실어 집에 가져올 수 있을 정도’. 차의 기준이 택시냐, 콜밴이냐는 아직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리고 퇴사는 아니지만, 그 이동의 때가 생각보다 일찍 찾아올 모양이다. 2주 뒤로 계획된 회사 조직개편에서, 동료들과 아래층에 있는 다른 부서로 옮겨갈 예정이다. 그래서 이미 지난달에 미리 그 부서의 사무실들을 탐색해놓았다. 그런데 남향 사무실이 하나, 북향 사무실이 하나. 어느 쪽 사무실을 쓰게 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50 대 50의 확률 앞에서, 요즘은 매일 아침 화분들에 물을 주며 ‘남향 엔트리’와 ‘북향 엔트리’를 추려본다. 유칼립투스와 아보카도, 장미허브, 다육식물들은 북향 사무실에선 키울 수 없다. 반면 자스민과 로즈메리, 민무늬 접란은 통풍만 잘되면 더디게라도 살아남을 것 같다.

나는 여전히 부덕하고 돈도 없다. 돈과 덕 무엇을 쌓든지, 마당 있는 남향집에 사는 것은 턱없이 요원하기만 한 일이다. 그저 일단 다음 사무실은 창문 있는 남향이기를, 온 우주에 기원하고 있다.

글 · 유주얼

*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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