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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이 여당답지, 야당이 야당답지 못할 때

'여당답다', '야당답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이나 성향이 거의 180도 달라도 같은 직장에 다니다 보면 겉으로라도 친해지기 마련이다. 티브이 카메라 앞에만 서면 죽자 사자 싸우는 국회의원들도 마찬가지다. 같은 상임위원회에 있는 의원들끼리는 소속 정당이 달라도 사석에서는 농담도 주고받으며 편하게 지낸다. “사퇴하세요!”로 유명한 자유한국당 이은재 의원에게 더불어민주당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누님, 빵 좀 사주세요”라고 애교를 부리는 모습도 그래서 나온다. 후배 의원들의 부탁을 받은 직장 선배(?) 이은재 의원은 두말없이 선뜻 빵을 사준다. 가열한 투쟁을 바라는 양 진영의 지지자들이 보면 실망을 넘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일 수도 있지만, 국회에서는 별 쟁점이 없는 법안이라도 상대방이 결사적으로 반대하면 통과가 어렵다. 평소에 원만한 관계를 만들어놓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협치가 좋다고 해도 여야 관계가 항상 화기애애할 수는 없는 법. 회의가 끝날 때면 서로 뼈있는 말을 주고받곤 한다. 그럴 때 자주 등장하는 얘기 중에 하나가 “여당이 여당스럽지 못하다” 또는 “야당이 야당스럽지 못하다”라는 말이다. 20대 국회가 시작될 때만 해도 한국당(당시 새누리당)이 여당이었고 민주당이 야당이었는데 탄핵과 정권교체를 거치면서 역할이 바뀌다 보니 그런 말이 입에 붙게 되었다. “우리가 여당(혹은 야당) 할 때만큼 못한다”는 비난의 뜻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대화가 오고 갈 때마다 궁금증이 생긴다. 도대체 여당스럽다는 것 혹은 야당스럽다는 것은 무엇인가. 양쪽이 모두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것을 보면 서로 의미가 통하기는 하는 것 같은데 과연 여당 혹은 야당이 추구해야 할 전형적인 모습에 대한 합의가 있는 것일까. 또한 그렇다면 그런 합의점에 대해 국민들도 동의를 할까. 먼저 ‘야당스러움’에 대해서 보자.

 

언론 질타 받은 야당스러움

고난의 민주화 과정을 겪은 우리 국민들에게 야당을 상징하는 단어를 하나 묻는다면 아마도 ‘투쟁’이라고 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민주당 의원들이 한국당 의원들에게 야당스럽지 못하다고 비꼬는 것도 대체로 ‘제대로 싸우지 못한다’는 뜻이 담긴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여야가 팽팽하게 맞서는 상황에서 한국당이 전투력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지난 연말 한국당은 오랜 노력 끝에 조국 민정수석비서관을 국회 운영위원회에 불러내는 데 성공했다. 야당 지지자들은 한국당 의원들이 날카로운 질문으로 임종석 비서실장과 조국 민정수석을 궁지에 몰아넣을 것이라고 기대에 차서 티브이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명백한 야당의 판정패. 새로운 내용은 없었고 논리마저 탄탄하지 못했다. 그에 앞서 지난해 9월 한국당 심재철 의원이 입수한 미공개·미인가 예산자료를 토대로 청와대가 예산을 전용하거나 낭비한다고 공격했을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료의 민감성에도 불구하고 당 차원의 협업도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정부·여당의 방어 논리가 대체로 받아들여졌다. 한국당 안팎에서는 ‘웰빙정당’의 한계라는 자조가 나왔고, 민주당 의원들은 “저렇게밖에 못 싸우나? 우리였다면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라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뉴스1

 

그런 비판이 먹힌 걸까. 이번 패스트트랙 국면을 거치면서 한국당은 완전히 면모를 일신했다. 나오는 말부터 달라졌다. “문 열려고 하면 도끼 가지고 와! 전투 준비!” “진짜 모든 걸 걸었어” 등의 발언이 속출했다. 2012년 국회선진화법 통과 이후 7년간 자취를 감췄던 ‘물리적 충돌 카드’를 들고나오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스스로도 만족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오늘 비로소 야당이 됐다”는 자부심 섞인 평가가 내려졌고, 의총에서는 “생전 처음 동료애, 동지애를 느꼈다”는 발언까지 나왔다. 마침내 한국당은 ‘야당스러움’을 획득한 것인가.

그렇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언론 매체들은 평소의 논조에 따라 패스트트랙을 시도한 여당에 대해서는 각기 찬반의 다양한 반응을 내놓았지만, 물리력을 동원한 제1야당에 대해서는 입을 모아 비판을 했다. 한국당 의원들은 자신들을 제외한 4당의 연대에 대해 비민주적이라고 공격을 했지만,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적극 검토한다”는 합의를 해놓고 5개월 동안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급기야 국회 사무실이나 회의장을 봉쇄한 행동이 명백한 위법이고 처벌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을 받게 되자 그때부터는 일체의 신체접촉을 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떻게 보면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는 꼴이 된 것이다. 한국당 의원들 입장에서는 답답할 만도 하다. 안 싸우면 안 싸운다고 뭐라고 하고 싸우면 싸운다고 혼이 나니 말이다. 문제는 무엇일까. 과연 야당은 어떻게 해야 제대로 야당 노릇을 한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야당의 전술적 목표는 간단하다. 집권세력이 하려는 일을 못 하게 하거나 최소한 지연시키는 것이다. 그러다가 집권 후반기가 되면 “그동안 한 것이 무엇이냐”고 공격할 수 있다. 시간은 야당의 편인 셈이다. 한국당이 “왜 공수처 설치에 반대하느냐”는 질문을 받는 일이 있다. 수사 대상인 고위직에는 당연히 집권하고 있는 여당 사람들이 많을 텐데 야당이 싫어할 이유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야당의 반대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니다. 공수처가 설치되면 문재인 정부의 업적이 된다. 야당의 입장에서는 집권여당이 성과를 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야 실적 부진을 공격해서 정권교체를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투쟁, 때로는 대안 제시 등의 다양한 수단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당이 어려움을 겪는 원인은 단순히 강경한 투쟁을 했는지 혹은 안 했는지에 있지 않다. 그것보다는 여당의 정책 추진을 막을 만한 명분을 쌓지 못했다는 점이 문제다. 검찰개혁이 시대적 과제임에도 한국당은 국회에 사법개혁특별위원회가 생긴 지 1년이 넘도록 뚜렷한 방안을 내놓지 않았다. 논의가 막바지에 접어들어서야 당내에 자체적인 사개특위를 만들었으니 기다려달라는 요청을 했을 뿐이다. 선거제도도 마찬가지다. 몇달 동안 거의 아무런 안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무조건 진행을 막으려고만 하면 여론의 호응을 받을 길이 없다. 대안 제시는커녕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당의 문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야당에 대안 제시까지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는 의견도 많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방어 관성 머문 여당스러움

물론 야당 탓만 하고 앉아 있을 때는 아니다. 정치의 실종이라는 비판을 받는 지금 가장 큰 책임은 아무래도 집권여당인 민주당에 있다. 제대로 된 ‘여당스러움’이란 무엇일까. 패스트트랙 상황 직전까지 논란이던 인사청문회를 놓고 보자. 흔히 여당은 정부가 하는 일을 돕고 필요하면 방어해야 된다고들 한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여러 차례 있었던 인사청문회에서 민주당도 대체로 그러한 주장에 들어맞는 역할을 담당해왔다.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한 우리 헌법 아래서 국정을 이끌어가는 것은 대통령이다. 그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국정철학을 공유한 사람들을 주요 직책에 임명해서 함께 일할 수 있어야 한다. 여당이 대통령이 지명한 공직 후보자들을 옹호하고 청문의견서에 ‘적정’ 의견이 담기도록 노력하는 것도 그래서다. 그러나 그러는 것이 항상 옳을까.

과거의 여당들과 마찬가지로 민주당도 인사청문회에서 비판적인 입장을 드러낸 일이 거의 없다. 청와대가 지명하는 후보자라고 해서 예외 없이 자격을 갖춘 것은 아니다. 때로는 능력이나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지명되기도 한다. 공직 후보자가 낙마하는 것은 단기적으로 정부에 타격을 주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부적절한 사람을 걸러내는 것은 정부가 성과를 올리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그럼에도 여당 의원들은 무리한 논리를 동원해서라도 방어에 나서야 한다는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해왔다. 여론의 비판을 받으면 인사청문회 제도 자체의 문제점을 내세웠다. 하지만 제도보다는 제도를 운용하는 사람의 잘못이 더 크다는 생각을 버리기 어렵다. 예를 들어 후보자 쪽에서 논란의 소지가 될 수 있는 자료를 청문회 당일에 제출해서 비판을 피해보려는 나쁜 버릇은 해가 갈수록 심해지지만 여당 의원이 그런 일을 지적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여당은 필연적으로 정부와 공동운명체일 수밖에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야당과 함께 입법부를 구성하는 성격도 분명히 가지고 있다. 입법부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정부에 대한 견제와 감시다. 여당도 때때로 정부가 잘못할 때는 과감하게 나서서 비판도 해야 한다. 그것은 국회의원을 뽑아준 유권자들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고 야당으로부터 최소한의 신뢰를 받는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야당만큼이나 ‘찬성을 위한 찬성’만을 반복하거나 정부가 설정하는 의제만을 얘기하고 싶어 하는 여당도 성숙한 논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언제나 일방적으로 정부의 편을 들다 보면 야당의 입장에서는 여당이 독자적인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불신을 갖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야당은 여당과 논의를 하기보다 정부나 청와대를 직접 상대하고 공격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여당에 결정권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가 국회에서 정치가 실종되는 순간이다.

패스트트랙은 국회법에 정해진 법적인 절차다.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논의의 시작을 강제하는 수단일 뿐이라는 주장도 충분히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형식적 합법성을 넘어 실질적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패스트트랙에 가기 전에 먼저 야당과의 합의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조건이 필요하다. 민주당이 여당으로서 독립적인 판단과 결정을 보이면서 야당과 논의하려는 노력을 충분히 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인사청문회의 예에서 봤듯이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 힘들다. 법에 정해진 패스트트랙을 추진하고도 정치의 실패라는 비판을 야당과 함께 받고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물리적 충돌이 벌어진 국회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우리도 고개를 들기 힘들다.

며칠 전부터 청와대 게시판에는 정당들을 해산시켜달라는 청원이 줄을 잇는다. 여권 일각에서는 한국당을 해산시키라는 청원이 민주당을 해산시키라는 청원보다 훨씬 많다는 이유로 좋아하기도 한다. 그러나 행정부에 정당 해산 청구를 해달라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하늘을 찌르는 것은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가 실패했다는 뜻이다. 고소, 고발을 당한 국회의원이 80명에 육박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내년 총선의 결과가 상당 부분 사법기관의 판단에 맡겨질 수 있는 상황을 맞은 오늘. 우리 여당이나 야당은 정말 여당스러움, 야당스러움을 갖췄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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