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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정신과 의사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폭로가 또 나왔다

'그루밍 성폭력'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길들여 성폭력을 저지르는 것을 말한다.

ⓒ한겨레/전광준 기자

사랑인 줄 알았다. 연인이라 믿었다. 공황장애에 시달리던 정하윤(가명·23)에게 대구의 유명 정신과 의사 최도현(가명·44)은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가 ‘사랑한다. 환자와의 성관계는 처음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3년 동안 최도현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온 정하윤은 거부할 수 없었다. 호텔 등에서 최도현과 수차례 성관계를 맺었다. 연인 사이 사랑이라 믿었던 성관계가 사실 의사의 환자에 대한 ‘그루밍 성폭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은 건, 다른 환자들 또한 자신과 같이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된 뒤였다. 2019년 3월의 일이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길들여 성폭력을 용이하거나 은폐하기 쉽게 만드는 ‘그루밍 성폭력’은 미성년자나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에 주로 사용되던 용어다. 그러나 그루밍 성폭력은 아동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취약해져 있는 환자와 정신과 의사 사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설사 환자가 의사와의 성관계에 동의했더라도 일반적인 성인의 동의와 같은 선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게 정신과 의사들의 지적이다. 정신과 진료 때 환자는 극도로 취약한 정신 상태에 놓이기 때문이다.

여러 정신과 의사들의 의견과 논문을 종합해보면, 환자는 진료를 받을 때 정신과 의사를 가장 이상적인 사람으로 느끼는 이른바 ‘전이감정’을 갖게 된다. ‘전이감정’ 자체는 정상적인 치료 과정에 속한다. 전이감정이 조성된 뒤, 적절한 시점에 이를 해석해 환자가 자신의 병과 패턴을 인식하도록 돕는 과정만 수반되면 된다. 그 과정에서 의사 또한 환자에게 성적인 감정을 느낄 수는 있다. 실제 환자를 향해 성적 감정을 느낀 치료자가 80%가 넘는다는 연구도 있다(<정신과 의사-환자 간의 성적인 경계위반>, 장형윤·임기영). 그러나 정상적인 정신과 의사라면 감정을 알아채고 조절해 의사와 환자 간의 경계가 훼손되는 걸 철저히 막는다.

■ “진료가 ‘그루밍 성폭력’ 수단으로…”

그러나 최도현에게 정신과 치료 과정은 ‘그루밍 성폭력’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 피해자들의 주장이다. 정하윤은 진료를 받는 3년 동안 겪은 자신의 경험이 흔히 일어나는 그루밍 성폭력 단계와 정확히 일치했다고 주장했다.

어릴 때부터 공황장애에 시달리던 정하윤은 2016년, 유명 예능 프로그램 등 방송 출연도 자주 하고 책도 여러 권 저술해 유명한 최도현을 찾았다. 최도현은 “자신만이 병을 고칠 수 있고 이전에 간 정신과는 다 처방을 잘못했다”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철석같이 믿었어요. 이 사람한테 버림받으면 안 되겠구나….” 그 뒤 최도현은 진료 때마다 “재벌가 며느리로 들어가도 되겠다. 오늘 옷이 예쁜데 클럽 가느냐”고 정하윤의 외모를 칭찬했다. 정하윤은 외모 칭찬으로 최도현이 그루밍 성폭력의 초기 단계인 ‘(내담자의) 욕구 충족하기’를 밟은 게 아니냐고 추측했다.

‘고립’도 이뤄졌다. 정하윤은 최도현이 어머니와 자신 사이를 “끈질기게 이간질”했다고 주장했다. 처음 만날 때부터 어머니에게 면담 내용을 알리면 진료를 하지 않겠다고 통지했다는 것이다. 정하윤은 “(최도현이) 제 엄마가 아빠를 사이에 두고 저를 질투한다”는 말을 진료 때 했다고 기억했다. 어머니 전화를 수신 거부하고 사생활을 절대 말하지 말라거나 심하게는 ‘어머니에게 흉기를 들고 반항하라’는 주문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 비정상적인 진료가 3년 동안 이어졌어요.”

어머니와 친구들 모두 “사이비 종교에 들어간 것 같다”며 만류했다. 진료가 이어지는 동안 최도현은 수차례 구설수에 올랐다. 한 유명 배우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만 보고 공개적으로 특정 증상이 의심된다고 진단해 2018년 대한신경정신의학회에서 제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하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최도현이 구설수도 많았잖아요. 그때조차 저는 믿었어요. 친구들이 이상하다며 생각을 해보라고 하는데도 저는 ‘내 의사 선생님인데 왜 욕하냐. 기분 나쁘다’고 했어요.”

그루밍의 최종 단계인 ‘성적 관계 형성’과 ‘회유와 협박을 통한 통제’도 이어졌다고 정하윤은 판단했다. 성관계가 이어진 뒤 최도현이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으며 “너라는 존재를 못 믿겠다” “상처를 많이 받았다”며 통제를 꾀했다는 것이다.

정하윤(가명·23)이 최도현에게 받은 선물. 
정하윤(가명·23)이 최도현에게 받은 선물.  ⓒ한겨레/정하윤 제공

정하윤은 2019년 3월 최도현이 갑자기 연락을 끊는 등 연인 관계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행동을 보이자, 그와의 관계를 다시 돌아보게 됐다고 한다. 동시에 어렴풋이 알고 있던 최도현의 ‘환자 성폭력’ 고소 사건을 비로소 제대로 생각해보게 됐다. 예전에 진료를 받았던 서지혜(가명·38)가 최도현에게 ‘그루밍 성폭력’을 당했다고 검찰에 고발한 사건이다. “서지혜씨 사건이 저와 똑같은 방식으로 일어났다는 점을 알게 된 뒤 소름이 돋았어요. 심지어 최도현이 저에게 접근한 시점이 바로 서지혜씨 고소를 검찰이 불기소 처분한 직후더군요.”

정하윤은 최도현이 2018년 12월 본격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했다고 돌이켰다. 그 직전인 11월23일, 2018년 초부터 최도현에게 ‘그루밍 성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한 서지혜(가명·38)의 피감독자간음죄 고소를 검찰이 불기소 처분했다. “서지혜씨한테 물어봤어요. 언제쯤 불기소가 났냐고. 기간이 대충 맞더라고요. 만약에 검찰이 불기소 처분을 내리지 않았으면 최도현은 저한테 그런 짓을 안 했을 거에요. 그건 확실해요.” 정하윤은 ‘불기소’라는 검찰의 면죄부가 최도현에게 또 한 번 성관계를 목적으로 환자에게 접근하게 만든 계기가 됐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가장 화가 나는 지점은 막을 수 있었던 사건을 검찰과 검사의 안일한 판단 때문에 막지 못했다는 거에요.” 정하윤에 앞서 최도현에게 ‘그루밍 성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서지혜도 같은 태도를 보였다.

■ “검찰 불기소 결정서에서 안희정 1심이 보였다”

우울감을 겪던 서지혜는 2015년 11월부터 3년에 걸쳐 최도현에게 진료를 받았다. 최도현은 서지혜에게도 자신의 사적 영역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는 등 접근을 시도했다. 연민을 느낀 서지혜도 최도현에게 치료자 이상의 강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운 서지혜는 “차라리 싫다면 거절해달라”고 최도현에게 말했으나, 명시적인 거절은 없었다. 최도현은 대신 “만나면 전 섹스를 하자고 얘기하지 싶습니다”라고 메시지를 보낸 뒤 일방적으로 서지혜 집 앞에 찾아오는 등의 행동을 했다고 한다.

지난 25일, 서지혜(가명·38)는 <한겨레>와 영상 인터뷰를 진행했다. 서지혜는 정신과 의사 최도현(가명·44)에게 그루밍 성폭력을 당했다고 2018년 초부터 주장해왔다. 
지난 25일, 서지혜(가명·38)는 <한겨레>와 영상 인터뷰를 진행했다. 서지혜는 정신과 의사 최도현(가명·44)에게 그루밍 성폭력을 당했다고 2018년 초부터 주장해왔다.  ⓒ한겨레/박윤경 기자

서지혜 또한 최도현과의 관계가 성폭력이라고 깨달은 건, 다른 환자들 또한 같은 수법으로 성폭력을 당했다는 말을 들은 뒤였다. 서지혜는 2018년 2월부터 고소를 진행하고 언론에 폭로했다. 최도현은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성관계를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대구지검은 조사 뒤 “성관계를 한 사실은 인정된다”고 밝혔다. 검찰은 그럼에도 ‘위력 행사 증거가 없다’며 성폭력 혐의는 인정하지 않은 채 불기소 처분했다.

검찰은 불기소 이유로 서지혜가 이성적인 감정을 가지게 됐고, 서지혜가 호텔에 가는 걸 동의했다는 점, 서지혜가 수차례 연락했다는 점 등을 들었다. “최도현의 혐의에 대한 결정문인데, 주어가 전부 서지혜더라고요. 주어가 김지은인 안희정 1심 판결문을 보는 것 같았어요.” 서지혜가 지난 3월21일 항고한 대구고등검찰청 역시 “세밀히 검토한 결과 이 항고는 이유 없다”며 항고 기각 결정을 내렸다. 지난 4월1일, 서지혜는 대구고등법원에 검찰의 불기소 결정에 불복한다는 재정신청 이유서를 냈다.

■ 의사-환자 ‘특수 관계’ 고려해야...미국, 환자가 성관계 동의해도 상담사 처벌

검찰 결정을 두고는 ‘정신과 의사와 환자 간의 특수한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정신과 의사는 “검찰이 정신과 의사와 환자라는 특수한 관계에 대한 개념이 없다. 미국 같으면 정신과 의사와 환자 사이 성관계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당장 의사 면허가 박탈되고 법적 처벌까지 받을 사안이다”라고 말했다.

미국 23개 주에서는 환자가 상담사와의 성관계에 동의했더라도 상담사를 처벌하게 돼 있다. 1983년 위스콘신 주는 심리치료사의 환자에 대한 성적 착취 처벌을 입법화했다. 1990년에는 미네소타, 캘리포니아 주 등에서 내담자와의 성관계를 ‘성적 착취’로 규정하고 중범죄로 처벌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실제로 2013년 위스콘신 주에서 한 여성 심리상담사가 남성 내담자와 합의 하에 성관계를 맺었지만 유죄 판결을 받고 면허를 박탈당했다. 마케트대학교 심리학부 교수 스테판 손더스(Stephen Saunders)는 위 사건을 “환자의 신뢰와 취약성에 대한 침해이며 심리상담사가 지닌 권위의 악용”이라고 평했다. 아직까지 한국에는 관련 법규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한국임상심리학회 차원에선 심리상담사와 환자 간의 성관계를 금지하는 윤리규정을 갖췄다. 하지만 한국 정신의학계에는 아직 의사-환자 간의 성관계를 금지하는 규정은 없다. 한 정신과 의사는 “아직 치료 단계까지 가지 않은 환자를 다루는 상담계와 달리 정신의학계는 정도가 심한 환자를 대면하는 경우가 많기에 더더욱 엄격한 잣대로 보는 것이 맞다”면서도 “(의사-환자 간 성관계 금지는) 너무 당연한 상식이라 따로 규정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재발 방지를 위해 전문의 시험에 윤리 비중을 대폭 늘렸다고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유사한 사건에 검찰이 기소를 결정한 선례도 있다. 2018년 12월, 서울중앙지검은 심리상담치료자인 김아무개 교수를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혐의로 기소했다. 성관계를 치료 행위로 착각하게 만들어, 20대 내담자를 연구소와 식당 등에서 상습적으로 추행하고 간음한 혐의다. 서지혜의 변호를 맡고 있는 박준혁 변호사는 “두 사건 다 결국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성폭력을 수용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본질적인 차이는 없지 않나 생각한다. 현재 규정으로도 처벌이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니다”라면서도 “다만 현재 있는 피감독자간음죄가 의사-환자 간의 관계를 상정하고 만들어진 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대구고검 쪽은 “성인지 감수성에 관해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범죄로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며 “(의사가 환자와 성관계를 가져 의사 윤리를 어겼다는 지적은) 의사 협회 등이 따로 찾아봐야 할 문제인데 우리는 처벌 가능한 범죄가 되느냐를 따졌다”고 말했다. 해당 사건에 관해 특별히 전문가 자문을 구했냐는 질문에는 “수사기록으로 말씀드리고 더 이상 인터뷰는 안 하겠다”고 밝혔다.

ⓒ한겨레/박윤경 기자

최도현은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정하윤·서지혜의 주장에 관해) 환자에 대한 비밀유지 의무 때문에 입장을 명확히 밝히기 어렵다. 말을 하면 비밀유지 의무 위반이 되고 말을 안 하면 앞뒤 안 맞는다는 비판 듣는 딜레마 상황에 처해있다. 다만 (환자와의 성관계가 있었는지는 여부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성관계가 없었다’는 진술이 검찰에서 뒤집어진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말하면 상대방이 곤란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도현은 2018년 3월 대한신경정신의학회에서 제명된 뒤에도 한 연예인의 유서에서 거론된 의사를 공개 비판했다가, 현재 대한의사협회에서도 1년 넘게 회원 박탈 심의를 받고 있다. 의사협회 관계자는 “만약 결론이 나면 회원 권리를 정지하고 보건복지부에 면허를 정지하라는 행정 처분을 의뢰하게 된다”고 말했다. 면허가 정지되기 전까지 최도현의 진료를 중지할 방법은 없다. 한 정신과 의사는 “왜 아직까지 면허 박탈이 이뤄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의사협회 일처리가 너무 더디다. 새로운 피해자가 발생하면 어떻게 하느냐”라고 우려했다. 실제 최도현의 병원에서 2년 간 직원으로 일했다는 ㄱ씨는 “최도현이 환자 여러 명에게 접근한 걸로 알고 있다. 여러 피해자가 있는데 드러난 게 두 피해자뿐이지 많을 것”이라고 추가 피해 가능성을 거론했다.

최도현은 병원 여직원들과 불필요한 신체접촉을 한 혐의(강제추행)로 지난해 불구속 기소된 바 있다. 직접 환자를 만나지 않고 20여 차례 진료를 한 혐의(의료법 위반)로도 추가 기소된 상태다. 그러나 그는 26일 자신을 고소한 전직 직원 등을 명예훼손과 의료법 위반, 무고죄 등으로 역고소하겠다며 반격에 나설 뜻을 밝혔다. 최도현은 서지혜에 대해선 트위터 등에 자신의 이름을 거론한 것은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에 해당한다며 소송을 낸 바 있다. 서지혜는 벌금 100만원의 약식명령을 받아 정식재판을 청구한 상태다. 검찰의 불기소 처분 뒤 피해를 주장하는 이에 대한 무고와 명예훼손 소송이 이어지는 전형적인 ‘성폭력 고소 사건’의 경로를 따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더는 침묵하지 않을 거에요”

서지혜의 상황을 지켜보던 정하윤은 결국 최도현을 고소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고민을 많이 했는데 현재 우리나라 법에서는 그루밍 성폭력을 인정받기 너무 힘들잖아요. 그루밍 성폭력을 안 당해본 사람은 몰라요. 저도 제가 안 당해봤으면 뭐 이런 게 다 있어 하고 지나쳤을 거에요.”

정하윤은 그러면서도 자신의 사례가 보도되고 공론화돼 정신과 의사의 ‘그루밍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대안이 마련됐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최도현이 두려웠던 게 사실이에요. 그 때문에 기사가 나가도 되나 주저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제가 두려워하는 게 바로 최도현이 원하는 바라고 생각해요. 기사로 내주세요. 더는 침묵하지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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