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2019년 04월 22일 18시 03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04월 22일 18시 18분 KST

드라마에서 대통령을 연기했던 젤렌스키가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되기까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는 정치 경험이 전무하다. 이건 약점이 아니라 최대 자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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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언 출신 배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41)가 21일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당선됐다. 

TV 시트콤 주연 배우로 대통령을 연기한 게 정치 경력의 전부인 후보가 우크라이나 차기 대통령에 당선됐다. 부패한 기득권 정치 세력에 대한 유권자들의 반감이 크게 작용한 결과라는 평가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후보는 21일 실시된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에서 70% 넘는 표를 얻어 20%대 중반에 그친 현직 대통령 페트로 포로셴코 후보를 일찌감치 꺾고 승리를 확정했다

젤렌스키는 3월말 1차 투표에서도 30%의 득표율로 여유 있게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포로셴코는 개표가 시작되기도 전에 출구조사 발표 직후 패배를 인정했다. ”나는 물러난다. 그러나 정치권을 떠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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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대선 결선투표 출구조사 발표 직후 젤렌스키 후보와 지지자들이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키예프. 2019년 4월21일.

 

올해 41세인 젤렌스키는 10대 후반부터 코미디언으로 연예활동 경력을 쌓았다. 그러다가 2006년 방송된 우크라이나판 ‘댄싱 위드 스타’에 출연하면서 전국적인 인지도를 쌓았다. 이후 그는 배우로 활동하며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젤렌스키와 우크라이나의 운명은 2015년 10월부터 방영된 TV 시리즈 ‘국민의 종(Servant of the People)’으로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이 시리즈는 유튜브에 전편이 공개되어 있다.)

자신이 설립한 제작사 ‘Kvartal 95’가 제작한 이 정치 시트콤에서 젤렌스키는 우연히 대통령이 되는 주연 캐릭터 바실 베트로비치 홀로보로티코를 연기했다.

극중에서 평범한 고등학교 역사 교사인 그는 정부의 부패에 강하게 항의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 폭발적인 인기를 모은 것을 계기로 대선에 출마해 당선된다. 뿐만 아니라 예기치 않게 대통령이 된 그는 정치권의 부패와 올리가르히들을 상대로 개혁 정치를 펼쳐나간다.

이 시리즈는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후속 시리즈가 나왔고, 영화로도 제작됐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그 이상을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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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결선투표에 앞서 키예프 스타디움에서 실시된 공개 토론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후보가 발언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키예프. 2019년 4월19일.

 

2018년 3월, TV 시리즈의 이름을 똑같이 딴 정당이 창당됐다. 당 로고도 극중 로고를 그대로 가져왔다. 당에 합류한 주연 배우 젤렌스키는 2018년 12월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현실 세계로 뛰어들었다. 

애초 군소후보로 분류됐던 젤렌스키는 3월부터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기 시작했다. 현직 대통령인 포로셴코, 총리를 지냈던 율리아 티모셴코 등 쟁쟁한 후보들을 모두 따돌린 것이다. 한 번 불이 붙은 지지율은 고스란히 선거 결과로 이어졌다.

젤렌스키에게 표를 던졌다는 22세 컴퓨터 프로그래머 리우드밀라 포트렙코는 AP에 ”옛 정치인들을 보면서 자랐는데 내가 본 건 껍데기 뿐인 약속들과 거짓말, 부패 뿐이었다”고 말했다. ”이제 바꿀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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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험이 전무한 젤렌스키 당선인은 이제 만만치 않은 현안들을 해결해야 한다.

 

이제 진짜 대통령이 된 젤렌스키 앞에는 중요한 과제들이 놓여있다. 가장 큰 이슈 중 하나는 역시 러시아와의 분쟁이다.

구 소련의 핵심 구성국 중 하나였던 우크라이나에서는 2014년 무렵부터 러시아와의 충돌이 계속되어 왔다.

친(親)러시아 성향이었던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은 유럽연합(EU) 가입 추진을 중단하고 러시아를 주축으로 하는 유라시아경제연합(Eurasian Economic Union)에 가입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2013년 말부터 이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 ‘유로마이단’ 시위는 이듬해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끌어내린 시민혁명으로 번졌다. 그러나 친러시아 성향 동부와 남부 지역에서 반군들이 러시아로의 합병을 선언하면서 내전이 벌어졌고, 러시아 군은 크림반도를 점령했다.

이후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서 정부군과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반군이 교전을 벌이면서 지금까지 1만30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지역을 통과하던 말레이시아항공 여객기가 미사일에 격추되는 사건도 있었다. 

젤렌스키는 이번 선거에 나왔던 주요 후보들과 마찬가지로 친유럽 성향으로 분류된다. 그는 협상을 통해 러시아와의 분쟁을 끝내겠다고 공약했다.

그는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 동부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우크라이나 군인 170명의 석방을 최우선 목표 중 하나로 내걸었다. 또 그는 동부 분리독립주의자들과 평화 협상을 다시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Valentyn Ogirenko / Reuters

 

결선투표에서 패배한 포로셴코 전 대통령은 2014년 혁명으로 실시된 대선에서 당선됐던 인물이다. 

친유럽 성향인 그는 탈러시아 정책을 펼쳤다. TV 방송에서 러시아어 사용을 제한했고, 우크라이나 정교회를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독립시켰다. EU와 비자 면제 협정을 맺어 수많은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유럽 취업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재임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 경제는 2015년 -9%대 성장률(세계은행 집계)을 기록하는 등 침체를 거듭했다. 부패지수가 180개국 중 120위(국제투명성기구, 2018년)에 달할 만큼 세계 최악 수준임에도 개혁 작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의 사회학자 볼로디미르 이쉬첸코는 1차 투표 직후 영국 가디언 칼럼에서 정치 경험이 전무하다는 게 오히려 젤렌스키 후보의 최대 강점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새 얼굴‘인 젤렌스키가 얻은 득표율은 그 모든 ‘올드’ 정치인들에 대한 지지를 왜소해보이게 만들었다. 젤렌스키의 지지자들 중 상당수는 생애 처음으로 투표하는 것이었다. 여론조사들에 따르면, 30세 이하 유권자의 40%가 젤렌스키를 지지했다. 1차 투표를 앞두고 많은 관전자들은 여론조사에서 사람들이 ‘재미 삼아’ 젤렌스키를 지지했을 뿐 실제로 그에게 표를 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그와 같은 회의론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정부에 대해 바닥에 가까운 신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과소평가했다. 많은 유권자들이 ‘정치 계급’에 염증을 느끼는 가운데 젤렌스키의 경험 부족은 약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덕목으로 받아들여졌다. (가디언 4월2일)

이제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자신들이 사랑했던 가상의 대통령을 ‘진짜 대통령’으로 갖게 됐다. 현실 세계에는 대본도, 정해진 결말도 없다. ‘NG’도 허용되지 않는다. 드라마 같은 성공을 거둬야할 책임이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주어졌다. 무엇보다 이건 4400만명의 삶이 달려있는 문제다.

 

허완 에디터 : wan.heo@huffpost.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