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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종의 시대

더 많은 ‘좋아요’를 받기 위해 살아간다.

  • 김곡
  • 입력 2019.04.22 11:28

지난 세기는 적어도 주체라는 것이 존재했던 시대다. 주체는 최소한 존재하는 자였다. 존재를 도둑맞아서 수치스러웠고, 존재가 박탈당할까봐 두려워했다. 존재의 세기는 억압의 세기이기도 하다. 주체는 존재를 억압당해서 저항했다. 그러니까, 지난 세기는 존재와 저항의 시대다. 사르트르의 말대로, 존재를 분투하고 무에 저항하던 시대다.

그러나 이번 세기는 완전히 다른 상황 속에 있다. 특히 인터넷, 그리고 SNS 속을 보면, 시대적 패러다임 자체가 변화한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인터넷 하이퍼링크를 따라서 우리는 어디서든 누구와도 친구를 맺을 수 있게 되었고, 어디서도 누구에게도 나 자신을 소개하고 뽐낼 수 있게 되었다. 페이스북에 시시각각 포스팅되는 셀카들은 하나같이 행복한 표정들을 하고 있고,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정보와 풍경들은 현실의 완벽성을 전시한다. 인터넷과 SNS에서 우린 더 이상 저항하지 않는다. 하려야 할 수가 없다. 억압이 없기 때문이다. 여긴 어디든 갈 수 있고 누구든 만날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충만한 세계다. 그래서 만약 분쟁이 있다면 그것은 ‘좋아요’ 경쟁이다. 이 패러다임에선 셀카가 예쁜 사람이 이긴다. 정보가 많은 사람이 이긴다. 신제품을 빨리 소개하는 사람이 이긴다. BJ들은 별풍선을 더 받기 위해 간장으로 샤워하고 짜장면을 발로 먹는 등 막장드립을 서슴지 않는다. 즉 관심을 더 잘 끄는 사람이 더 좋은 삶이 되는 그런 패러다임. 어떤 의미에서 이제 우린 더 잘 살려고 여행 가거나, 더 잘 먹으려고 음식을 찾지 않는다. 우린 멋진 셀카를 건지려고 관광을 가고,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찍기 위해 맛집을 찾는다. 즉 우린 더 많은 ‘좋아요’를 받기 위해 살아간다. 오늘날 우리는 밥 없이는 살아도 ‘좋아요’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좋아요’는 우리의 재산이자 영혼이자 삶의 목적 자체다. 존재(esse)의 패러다임이 관심(inter-esse)의 패러다임으로 대체된 것이다.

관심의 시대에 새롭게 나타난 주체가 바로 관종이다. 이름 그대로, 관종은 이전 세기의 주체들과는 종자가 다른 주체다. 그는 아예 주체가 아니다. 억압이 없으므로 저항할 것도 없고, 불안이 없으므로 존재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관종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존재는 타자에 직면함으로써 무를 내감해야 존재다. 그런데 관종에게 타자란 없다. 그에겐 모두가 잠재적 친구다. 지난 세기 주체가 저항했다면, 오늘날 관종은 증명해야 한다. 무한히 많은 친구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좋아요’를 받을 수 있는지를.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할 수 있고 또 이미 누리고 있는지, 결국 이 순간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즉 존재의 패러다임에서 주체는 불완전한 현실이 부끄러워 저항했다면, 오늘날 관심의 패러다임에서 관종은 완전한 현실이 겨워서 증명해야 한다.

최대의 피해자는 관종 자신이다. 현실의 완전성을 증명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때 증명할 현실이란 자기 자신이라는 현실이다. 관종은 본질적으로 우울하다. 우울증은 관심의 시대에 본격화되는 질환이다. 증명해야 할 자아의 완전성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관종은 우울하다. 그도 그럴 것이, 관심으로 이루어진 자아를 증명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좋아요’를 빼면 자아엔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관종은 텅 빈 자아만을 증명하며, 스스로에게 누를 ‘좋아요’ 버튼은 없는 가능성의 허공 속으로 침잠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울증은 자아상실에 집중되는 나르시시즘 질환이다. 그러니까, 관심의 시대는 나르시시즘의 시대다. 관종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나르시시스트다.

* 한겨레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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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관심 #관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