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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픈 기억에 봄볕이 스몄다

그녀는 "반가워, 나도 페미니스트야"라고 말했다

ⓒcourtneyk via Getty Images

친구를 따라 참석한 작은 파티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조금 늦게 장소에 도착한 그녀는 낯익은 얼굴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새로운 얼굴에 시선을 돌렸다. 카운터 곁에 서서 식사 전 가벼운 스낵을 와인과 함께 먹고 있을 때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부드럽고 조금 낮은 목소리, 단정한 발음과 차분한 말투, 신중한 어휘 선택 등이 몇 마디 대화만으로도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가볍고 일상적인 소재가 오가는 미국식 파티 토크와 달리, 우리 이야기는 진지한 주제로 단숨에 넘어갔다. 한눈에 서로를 알아본 기분이었다. 그녀는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재미동포 2세로, 공공예술 분야에서 일한다고 자신을 소개하며 명함을 건넸다. 지금껏 명함 한번 가져보지 못한 채 살아온 나는 그녀의 명함을 받자마자 가방에 잘 챙겨넣으며 말했다.
“명함을 안 만든 게 이럴 때면 후회돼. 네 번호로 문자 보낼게. 내 이름 적어서.”

“반가워, 나도 페미니스트야”

대화의 시작은 미국의 열악한 복지 환경과 사회 전반에 걸친 정치적 무관심에 관한 것이었다. 이후 아시아 여성이라는 공통의 정체성에 기반한 주제로 넘어갔다. 잠시 후 그녀는 낮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선언했다.

“반가워. 나도 페미니스트야. 너 역시 그렇구나.”

페미니스트란 단어를 먼저 쓴 건 그녀였다. 내 이야기에서, 내 안의 페미니스트를 알아봐준 그녀가 고맙고 반가웠다. 우리의 대화는 이후 자리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 속으로 흩어지고 말았지만 여운은 남았다. 딸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남들보다 일찍 모임을 떠나야 했지만, 그녀의 이름은 가슴에 품고 갔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면서 명함을 꺼내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라 망설여졌지만, 잊기 전에 보내고 싶었다.

“반가웠어. 내 연락처야. 서희. ***-***-****.”

이름과 전화번호, 그리고 그 앞의 반갑다는 인사가 전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서 긴 문자가 왔다.

“이제야 파티에서 돌아왔어. 잊지 않고 연락 줘서 고마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기쁜 일이야. 무엇보다도 삶의 중심이 되는 고민을 함께하고 그와 관련된 실천의 방향을 모색하는 데 영감을 주는 사람이라면. 너와 좀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잠들기 전까지 수차례 문자를 주고받았다. 자정을 넘겨 나눈, 잘 자라는 밤 인사가 따스했다. 이상기후로 예년보다 낮은 온도와 깊은 습기가 이어지던 나날이었다. 폭우로 집 천장에서 물방울이 조금씩 떨어졌고 마음까지 눅눅해지던 때, 예상치 않은 곳에서 온기가 찾아왔다.

기나긴 우기가 이어질 동안 그녀를 한 차례 더 만났다. 그 역시 다른 모임에서였다. 단둘이 얼굴을 마주하고 집중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건 대기가 마르고 캘리포니아의 청량한 날씨가 회복된 이후였다. 봄날은 나른히 무너지듯 찾아왔다. 눈부신 한낮은 느리게 지나갔고 찬란한 노을의 시간을 지나 술렁이는 봄밤이 왔다. 자연의 소란스러운 탈바꿈과 달리, 들리는 소식도 지난 기억도 온통 아프고 어둡고 절망적인 것뿐이었다. 그때 마침 그녀의 연락을 받았다. 그녀의 직장 건너편 호텔에서 점심을 함께하자는 전갈이었다.

며칠 뒤 우리는, 햇빛이 쏟아지는 창문이 사방을 감싸는 호텔 2층 식당에서 정오에 만났다. 맞은편으로는 그녀의 단아한 자태와 그 너머로 크지 않은 야외 수영장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서너 명의 투숙객이 보였다. 고정된 가격의 점심 세트 메뉴를 그녀와 나는 사이좋게 시켰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일부러 찾지는 않았을 장소다. 그래서 더 좋았다. 엄마로서의 정체성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미국 생활에서는 사소한 환기도 특별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북적이는 도시의 한복판, 호텔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장소의 2층, 내 앞의 낯설지만 흥미로운 여자의 조합이 신선했다. 그녀의 나이를 나는 지금껏 궁금해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영어로 이야기할 때면 일부러 화제에 올리지 않는 이상 나이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단서를 찾아헤맨다면 따라갈 만한 길이 군데군데 있었지만,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간단한 2인칭 대명사로 평등하게 부르고 상호 존중을 듬뿍 담아 경험을 나누고 의견을 경청했다.

성추행, 나의 기억 너의 기억

나의 안부는 내 마음을 꽉 채우다 못해 터질 듯 고통스러운, 한국의 자본과 권력과 가부장제와 왜곡된 성의식이 일으킨 성범죄 이야기로 가득했다. 그녀는 깊은 한숨과 분노와 애통함으로 반응했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칼이 부피를 더해가는 느낌이었다. 쏟아지는 햇빛을 등 뒤로 받은 그녀를 바라보며 메두사의 꿈틀거리는 머리칼을 떠올렸다. 대화는 쉴 새 없이 흘러갔다. 사회적 이슈부터 일상의 이야기까지, 흐르기 시작하니 멈출 수가 없었다.

우리의 화제는 서던캘리포니아대학(USC)의 산부인과 진료소에서 벌어진 성추행 사건으로 이어졌다. 지난해 5월 신문기사로 보고 경악했던 사건이다. 학교 내 산부인과 진료소 의사 조지 틴들(71)이 30년에 걸쳐 학생 수천 명을 성추행했다. 불필요한 검사를 강행하고 적절치 못한 대화를 유도하며 특정 부위 사진 촬영과 불쾌감을 유도하는 신체 접촉까지 저질렀다. 학교 쪽은 학생들의 거듭되는 항의로 사실을 인지했으면서도 대응하지 않다가, 2016년에야 내부 조사에 들어갔고 지난해에야 담당 의사를 해임하는 데 그쳤다. 학교 쪽의 미지근한 대응에 분노한 졸업생들은 조지 틴들과 학교를 상대로 법정 소송을 벌였다. 이는 맥스 니키아스 총장의 사퇴는 물론 학교 보건센터를 이용한 학생과 피해자들에게 2억1500만달러(약2500억원) 상당을 배상하는 합의안을 학교 쪽과 논의하는 데 이르렀다. 그녀는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더욱 화나는 건, 타깃이 된 사람이 아시아 여자들이었다는 거야. 너도 짐작할 수 있겠지?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거야. 아시아 여자들의 성의식이 폐쇄적이라는 점을 말이야. 자신의 불편함보다는 주변을 배려하는 게 더 큰 가치로 설정돼 있고, 자신이 피해자임에도 이를 발설할 경우 오해와 더 큰 피해를 받을 수 있다는 공포를 내면화한다는 점도. 문제를 일으키느니 나 혼자 희생하고 입 다물고 지나가기를 택하고야 마는 것도. 사건이 수위에 올라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흐른 건 학교 쪽 책임도 커. 적당히 모르는 척 넘어가면 지나갈 줄 알았던 거지. 피해자 대부분이 미국 대학의 시스템을 잘 모르고 언어도 익숙하지 않고 개인이 겪는 부당함에 강력하게 대응하지 않는다는 걸 악용했어. 성적으로 위축됐다는 건 물론이고.”

나는 그녀에게 어릴 적 성추행의 기억을 이야기했다. 초등학교 2학년 여름에 벌어진 그 사건은 사춘기를 지나 성인이 될 때까지 어둡고 축축한 비밀이었고 공포였다. 불시에 벌어진, 다정하고 친절했던 친척 오빠의 헤아릴 수 없었던 그 행동은, 그를 믿고 의지했던 어린 나를 자책하게 했고 두고두고 후회하게 했다. 사태가 벌어진 즉시 나는 부모를 비롯해 주변에 상황을 알려야 했지만, 내가 오히려 질책의 대상이 될 것 같아 무서웠다. 애초에 그의 등에 업혀 창고까지 따라간 게 잘못이라고 야단맞을 게 분명했다. 불쾌하다는 것만으로 상황을 설명할 자신도 없었다. 이해할 수 없음은 공포였고 설명할 말을 모른다는 건 언어를 통째로 잃는 것과 다름없었다. 별일 아닌 거로 유난 떠는 아이로 취급받을까 머리 아픈 건 또 어떤가. 간만에 모인 일가친척들의 흥겨운 한때를 나 때문에 망칠 수 없다고도 생각했다.

타깃이 된 건 아시아 여자들

그러나 문제 삼지 않는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잊으려 한다고 잊히는 것도 아니었다. 가해자는 사소한 일탈 행위로 잊고 지나갈지 모를 사건이 피해자에게는 수십 년간 끝나지 않은 채 부피를 더해가며 진행되고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는 문제일 수 있음을 내 삶의 여정 속에서 배웠다. 가까운 친구에게조차 고백하지 못했던 비밀을, 서른을 넘기고 마흔이 가까워졌을 무렵에야 상담받으며 털어놓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러잖아. 그걸 아직도 마음에 품고 사느냐고. 왜 그때 문제 삼지 않았느냐고. 상황이 다 끝난 뒤에 말해서 무엇하냐고. 하지만 나는 내 경험을 통해 알았어. 누군가에게 끝나지 않은 문제라면, 그 상황은 끝나지 않은 거야. 이제 와서 말하지 못할 부당함은 없어. 30년 전에 받은 성추행이라도, 의료 행위인지 아닌지 모호해서 스스로의 무지를 탓하다 넘어가버린 불편하고 불쾌했던 그 경험도, 나에게 끝나지 않았다면 그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해. 이와 같은 말들이 비밀의 말이나 부담과 두려움으로 꽉 막힌 말이 되지 않고, 자책과 눈치 보기에 시달리지 않고 사회 속에서 이야기될 수 있어야 해. 그래서 나는 피해자로서의 내 경험을 말하는 데 당당해지기로 했어. 아니, 당당해지는 걸 지나 편안해지려고 해. 지금 너에게 덤덤하게 오래전 기억을 이야기하듯 말이야. 이것 또한 연습이 필요하더라고. 예전에는 이렇게 평온하게 말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달라. 내 잘못이 아님을 알거든. 그 오랜 자책과 공포에서 자유로워졌거든.”

말을 마치고 가만히 그녀의 맑은 눈에 시선을 맞췄다. 어느새 한 시간 반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녀를 사무실에 보낼 시간을 넘겨버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에게 물었다.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던 건 아닌가 몰라.”

“너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참 좋았어. 상황의 종료를 선언할 수 있는 건 가해자나 외부인의 몫이 아니라는 말, 나도 동의해. 그리고 부당함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될 수 있어야 한다는 말도 정말 공감해.”

갑자기 그녀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서희, 나는 앞서 말한 USC 산부인과 의사 성추행 사건의 피해자 중 한 사람이야.”

밀실에 갇힌 채 분노에 압사되지 말 것

호텔 앞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조만간 또 만날 것을 약속하며 가벼운 포옹을 나눴다. 어두웠던 마음 한구석에 봄볕이 스며들었다. 그녀에게 속삭이고 싶었지만, 다음에 나눌 이야기로 잠시 접어두었다. 대신 내게 말 걸었다.

‘분노가 나를 억누르게 하지 말 것. 밀실에 갇힌 채 그 분노에 압사되지 말 것. 거리로 나와, 분노의 머리칼이 되고 시선이 되고 혀가 되고 발이 될 것.’

* 한겨레21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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