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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젊은 여성들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

대한민국 페미니즘의 시계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뉴스1

학부 때 전공과목으로 ‘생리심리학’을 들었다. 줄여서 ‘생리’라고 불렀다. 그런데 친구들끼리 “오늘 생리(수업) 있지?” “이번 주 생리 쉰다며?” 말할 땐 얼굴이 화끈거렸다. 여성의 ‘생리’가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생리심리학책을 들고 다닐 땐 제목을 가리기도 했다. 그나마 교과목이니 생리란 발음이 가능했다. 진짜 생리를 말할 때면 ‘그거’ 정도로 퉁쳤다. 생리는 남부끄러운 것, 더러운 것, 말할 수 없는 죄 같은 것이었다. 참 옛날 얘기다.

부끄러워서 꺼내기 힘든 말로는 ‘낙태’도 있었다.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오기 얼마 전, 한 여자친구 모임에서 그 얘기가 나왔다. 10~20년 서로를 속속들이 알아온 가까운 사이였지만, 정작 낙태를 화제로 올린 적이 없다는 게 놀라웠다. 그날 보니 의외로 많은 이들이 경험이 있었다. 흔히 얘기하듯 성적으로 문란하거나 일 욕심에 자식 따위는 뒷전인 여자들이 아니었다. 다들 나름의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 모두에게 힘든 기억이었다. 주변 도움 없이 혼자들 치렀다. 당연하다. 죄니까.

낙태 사례 연구자들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 낙태 경험 여성들이 대부분 상대 남성 외에는 낙태 사실을 얘기하지 않는다는 거다. 그렇게 낙태에 대한 ‘말’이 없으니, 그 심각성에 비해 오랫동안 사회적 이슈가 되지 못했다.

미투 열풍이 한창이던 지난해 서울 청계천광장에서는 ‘1박 2일 미투 릴레이 말하기 대회’가 열렸다.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이 모여 일상의 성폭력 경험을 얘기했다. “그 땐 잘 몰랐는데 내가 당한 게 성폭력이더라”는 발언이 잇따랐다. 자신의 경험을 타인의 말(미투)에 빗대어 재구성하고, 자기 언어로 표현하면서, 사회적 현실을 새롭게 인식했다. 요즘 갑자기 성폭력이 많아진 게 아니라 예전엔 더 많아도 말이 없었을 뿐이다!

낙태죄가 66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헌재 재판관들이 7 대 2로, 낙태죄에 위헌성이 있다며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손을 들어줬다. 7년 만에 합헌 결정이 뒤집혔다. 내년 말까지 법이 정비된다. 2017년 23만명 넘게 동참한 ‘낙태죄 폐지’ 청와대 국민청원, 2016년부터 계속된 대중집회, SNS 해시태그(#주제어) 릴레이 등 낙태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 여성들이 끌어낸 변화다. 10~30대 젊은 여성들이 중심에 섰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2018년 미투와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여성 시위, 그리고 이번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까지 대한민국 페미니즘의 시계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그 뒤에는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참지 않고 말하는 ‘영 페미니스트’들과 SNS라는 ‘발언의 무기’가 있다. 2015년을 기점으로 SNS에서는 페미니즘 이슈의 해시태그 달기 운동이 퍼졌다. “페미니스트가 싫어 IS로 간다”는 18세 김군에 맞서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릴레이가 나온 게 계기였다. 이전까진 철저한 ‘남초’ 공간이라 인터넷에서 종종 없는 존재 취급받던 여성들이 사회적 발화의 주체가 됐다. 법과 국가가 여성들은 보호하지 않고(미투와 ‘몰카’범죄), 통제하려고만 한다(낙태죄, 저출산 대책)는 인식이 확산됐다. SNS에서 만난 여성들이 함께 거리로 나왔다. 소소한 커뮤니티가 있을 뿐 별다른 조직도 없었지만, 여파는 컸다. 최근 한국을 찾은 트위터 최고경영자 잭 도시조차 “한국 여성들이 트위터에서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며 변화를 끌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지고,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옛말이 있었다. 여자들의 입막음을 위한 말이다. 그 말 많고 시끄러운 여자들, 그것도 2030 젊은 여성들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 부작용 많은 SNS의 좋은 예도 보여줬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말이 모든 것, 말이 권력이다.

* 중앙일보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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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낙태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