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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헌법불합치 이후, ‘모자보건법 개정’을 말하다

“여성을 자궁, 재생산의 도구로 남겨둔 법적 근거를 삭제하라”

  • 박수진
  • 입력 2019.04.11 18:04
  • 수정 2019.04.11 21:02
ⓒ뉴스1

66년 만에 ‘낙태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입장이 달라졌다.

11일, 헌법재판소는 인공임신중절수술을 받은 여성과 수술을 한 의료인을 처벌하는 현행 형법 규정에 대해 헌법불합치를 선고했다.

헌법불합치란 해당 법률이 사실상 위헌이기는 하지만, 즉각적인 무효화에 따르는 법의 공백과 사회적 혼란을 피하기 위해 법을 개정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그 법을 존속시키는 결정이다.

1953년 형법 제정 이래 존속되어 온 해당 규정은 수술을 받은 여성 본인은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며, 수술을 하거나 도운 의료인의 경우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헌재의 결정에 따라 국회는 2020년 12월 31일까지 이 법률을 개정해야 한다. 입법 절차와 별개로 이 시한 이후 낙태죄의 법률 효력은 사라진다.

 

“여성을 자궁, 재생산의 도구로 남겨둔 법적 근거를 삭제하라”

ⓒKim Hong-Ji / Reuters

이날 선고를 앞두고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는 오전부터 선고 직전까지 여성계, 의료계, 청년 학생, 연구자, 종교계, 정당 등이 참여한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의 기자회견이 진행됐다.

마지막 순서로 나선 보건·의료계 발언자는 태아의 생명권을 이유로 낙태죄 유지를 주장하는 쪽을 향해 “여성이 겪어내야 할 삶의 문제를 외면하면서 생명을 논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했다. 또 처벌 반대가 “생명권과 여성의 선택권의 대립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국가는 생활보호대상자들을 대상으로 강제인공임신 시술을 벌이기도 했고, 모자보건법상 우생학적 사유를 들어 장애여성과 장애남성의 재생산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편견을 강화하고, (정책과 법률에) 반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저출산이 문제가 되니 낙태를 금지하는 방식으로 여성을 통제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임신중지권을 둘러싼 싸움은 생명권과 선택권의 대립이 아닙니다. 오늘 헌법재판소가 낙태죄를 폐지함으로써 여성을 자궁이나 재생산의 도구로 남겨두었던 법적 근거를 삭제하기를 기대합니다.”

(보건·의료계 기자회견 중)

낙태죄 유지를 주장하는 쪽에서도 집회를 열었다. 이들 중 일부는 여성과 의료인뿐 아니라 남성의 강력한 처벌이 동반되어야 한다며 현행법 강화를 주장했다. 또다른 발언자는 “성관계에는 쾌감 외에도 임신 출산 양육의 책임도 결과로 따라온다”며 “자녀를 원하지 않고 임신하기 싫으면 성관계는 아직 이른 단계”라고 주장했다. ”미세먼지의 주범이 고등어가 아니듯이 임신의 주범이 태아가 아니다”라는 다소 엉뚱하게 들리는 발언도 있었다.

 

″다음은 모자보건법 개정이다”

ⓒASSOCIATED PRESS

헌재의 선고는 오후 2시 30분을 약간 넘겨 나왔다. 불합치 결정 소식이 전해진 순간 낙태죄 폐지를 주장해온 쪽에서는 환호성이 터졌다. 반면 낙태죄 유지를 주장해온 쪽에서는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에는 일부 집회 참가자들이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법률 개정 절차가 남아있으므로) 아직 많은 기회가 남아있으니 슬퍼하지 말라”는 발언도 나왔다.

현행법이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재생산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라고 보고 낙태죄의 폐지를 주장해온 쪽은 헌재의 이번 불합치 결정을 크게 환영했다. 여성계 등이 이번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여기는 부분은 크게 두 가지다. 앞으로 1) 안전한 인공임신중절 방법이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고민되어야 하며, 2) 국가가 개인의 생산 여부를 결정짓는 모자보건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헌재 앞에서 판결 결과를 들은 신지예 녹색당 공동위원장(28)은 허프포스트에 “완전한 위헌 판결이 아니라 아쉬운 부분은 있지만 과거를 뒤로 하고 한발짝 진일보할 수 있는 역사적인 결정이라고 생각한다”고 소감을 말했다.

신씨는 2018 지방선거 서울시장 후보 출마 당시 미프진 등 유산유도제 도입 및 보건소에서의 구비를 공약으로 넣은 바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유산유도제는 여성의 재생산권이나 건강권을 보장할 수 있는 필수적인 약물이기 때문에 도입되어야 한다”며 이번 선고로 인해 “모체에 영향이 적은 약물이나 수술법이 도입될 수 있을 것 같다”고 기대했다.

또 국회로 공이 넘어간 상황에서 법률 개정 도중 논의가 후퇴하거나 축소될 가능성을 우려하면서도 “여성들의 목소리가 사그라들지 않고 더 커져서 국회에서 잘못된 입법을 하지 않도록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의 문설희 공동집행위원장은 “오늘 2019년 4월 11일은 정말 역사적인 날, 승리의 날”이라며 벅찬 목소리로 소감을 전했다.

문씨는 공식입장문에서 “우리가 계속해서 국가와 사회에 요구했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국가에 의해 처벌받던 여성의 몸이 시민의 영역으로 들어간 날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오늘은 낙태죄에 대한 판결만 했지만, 이와 함께 모자보건법에 대한 전면 재검토 필요성이 바로 대두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낙태죄 폐지를 요구해왔던 것은 임신중지한 여성의 경험 때문만은 아닙니다. 국가의 가족계획 정책, 오로지 경제개발과 인구통제만을 위해 추진해왔던 정책들로 인해서 누군가는 임신조차 하지 말 것을 강요당했고, 누군가는 임신중지를 했다는 이유로 처벌당했습니다. 모자보건법의 역사가 바로 그런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이제 경제개발과 인구통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생명을 위해서, 모든 사람들의 성과 재생산 권리, 생명 권리를 국가가 보장하기 위해 무엇을 할 건지 고민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을 적극 환영하고 무엇보다 오늘 재판에서 세 명의 재판관이 완전 위헌 의견을 냈다는 점에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오늘은 우리의 승리의 역사로 기록할 것입니다. 이번 결정으로 헌법상 낙태죄 허용 한계를 규정해놓은 모자보건법 제 14조도 마찬가지로 현재와 같이 존속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공동입장문 중)

이밖에도 몇 차례의 환영 발언이 이어졌다. 천주교 등 일부 종교계에서 강력한 낙태죄 유지 의견을 낸 것이 종교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지적한 한 발언자는 헌법불합치 결정에 “낙태죄가 폐지된다 아멘”이라는 구호로 응수하기도 했다.

 

모자보건법 제14조

 

모자보건법 제14조는 의사가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는 경우들을 규정해두고 있다. 임신한 여성과 남성 파트너 본인이 우생학적,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 혹은 전염성질환이 있는 경우, 강간 및 준강간에 의해 임신된 경우, 혈족 간에 임신된 경우, 임신이 모체를 심각하게 해칠 경우에 보호자의 동의를 받아 허용한다는 내용이다. 해당 내용은 신체장애인 및 발달장애인의 재생산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모두 해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헌법불합치 의견을 낸 유남석·서기석·이선애·이영진 재판관은 ”자기낙태죄 조항은 모자보건법이 정한 일정 예외를 제외하곤 임신기간 전체를 통틀어 모든 낙태를 전면적·일률적으로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형벌을 부과하도록 정해 임신한 여성에게 임신의 유지·출산을 강제하고 있어 임신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한다”고 판단했다.

이어 ”태아가 모체를 떠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점인 임신 22주 내외에 도달하기 전이면서 동시에 임신 유지와 출산 여부에 관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보장되는 시기까지의 낙태에 대해서는 국가가 생명보호의 수단 및 정도를 달리 정할 수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며 ”(모자보건법이 정한 예외만으로는)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기에는 불충분하다”고 지적했다.

 

박수진 에디터: sujean.park@huff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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