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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드러머 걸' 그리고 박찬욱

최근 '왓챠플레이'를 통해 공개됐다.

2017년 8월에 박찬욱 감독을 만난 적이 있었다. <아가씨>의 제작 과정이 담긴 백서 <아가씨 아카입>의 출판을 앞두고 인터뷰를 할 기회가 주어진 덕분이었다. 인터뷰 날짜가 임박할 무렵, 박찬욱 감독이 차기작으로 준비 중이던 <도끼>라는 가제의 영화 제작이 투자 문제로 무산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덕분에 선명한 물음표가 떠올랐다. 

당시에는 봉준호 감독이 넷플릭스와 손을 잡고 <옥자>를 발표한 지 두 달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데이비드 핀처 같은 감독이 넷플릭스에서 제작하는 시즌제 드라마 연출을 맡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그런 상황 속에서 박찬욱 감독이 시즌제 드라마의 연출이나 넷플릭스와의 협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지 궁금했다. 박찬욱 감독은 “시즌제 드라마에도 흥미를 갖고 있다”라고 답했다. 다만 에피소드 일부만 연출하는 데이비드 핀처와 달리 자신은 전체 에피소드를 연출하길 원할 거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몇 달 후 박찬욱 감독이 TV 드라마를 연출하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TV 드라마를 하고 싶어서 <리틀 드러머 걸>을 한 것은 아니고, <리틀 드러머 걸>을 하고 싶어서 TV라는 형식을 따라가게 된 거죠.” 지난 3월 20일 오후 3시경에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리틀 드러머 걸> 언론시사회에서 1, 2화 상영이 끝나고 이어진 기자간담회 중 박찬욱 감독이 전한 말이다. <리틀 드러머 걸>은 영국의 BBC와 미국의 AMC와 함께 박찬욱 감독이 처음으로 연출한 TV시리즈다. 2012년과 2014년에 각각 공개된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와 <모스트 원티드 맨>의 원작자이기도 한 존 르 카레가 발표한 동명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연출한 작품이기도 하다.

1950년대에 영국 정보국에서 실제로 첩보원으로 활동한 바 있는 존 르 카레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단히 현실적인 스파이물을 지칭하는 에스피오나지 소설을 발표해왔고 그 분야에서 대가로서의 지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존 르 카레가 1983년에 발표한 <리틀 드러머 걸>은 그의 작품 중에서 보기 드물게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첩보소설이다.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유대인 시오니스트들과 팔레스타인 독립을 주장하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가 팔레스타인 영토의 주권을 두고 서로의 진영에 극렬한 공격을 주고받던 1970년대 후반을 배경에 둔 첩보전을 그리는 작품이다. 

런던에 거주하는 무명배우 찰리(플로렌스 퓨)는 비밀스러운 오디션을 통해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의 공작원으로 캐스팅되어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의 핵심부로 접근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훈련시키는 모사드의 요원 베커(알렉산더 스카스가드)에게 점차 연모의 감정을 품게 되면서 점차 혼란을 느끼게 된다. 스파이의 세계에 휘말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위태로운 사랑 속에서 사랑을 느끼게 된 감정적 혼란 속에서도 배우로서의 호기심을 놓지 않고 위기를 극복해 나간다.

흥미로운 건 <리틀 드러머 걸>에서 대립각을 세우는 시오니스트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사이에서 첩보전의 주역이 되는 주인공이 영국인 여성이라는 점이다. 이는 최근작인 <아가씨>를 비롯해 <친절한 금자씨><스토커><박쥐> 등 인상적인 여성 주인공을 앞세운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해온 박찬욱 감독의 경력을 염두에 뒀을 때 흥미로운 흐름이기도 하다. 동시에 남성적인 세계관으로 인식되는 스파이 장르의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무게중심 역할을 해내는 여성 스파이를 그려낸다는 점에서도 장르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새로운 양식을 제시할 기회라는 측면에서 적절한 만남처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리틀 드러머 걸>은 여성이라는 화두로 흥미로운 경력을 이어오고 있는 박찬욱이라는 대가의 입장에서도 호감이 가는 주제로 다가왔을 것이다.

주목받지 못한 무명배우였던 찰리는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 간의 영토 갈등에서 빚어진 피의 역사로 지어 올린 첩보전의 무대에서 스파이를 연기하며 첫 주연을 맡게 된다. 허구적인 캐릭터의 탈을 쓰고 극단적인 대립의 역사를 이어오던 양진영의 비밀을 누구보다도 깊숙하게 대면하게 되는 현실과 마주한다. 딜레마로 점철된 현실 속에서도 완벽하게 자신의 허구적인 소명을 완수해내는 아이러니에 빠져든다. 그 과정에서 ‘이 쇼의 제작자이자 작가이자 감독’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모사드의 요원 커츠(마이클 섀넌)는 야비한 존재처럼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그 모든 상황을 기획하고 조율하는 역할이란 점에서 감독 입장에서는 감정적으로 이입할 수밖에 없는 대상처럼 보인다. 

실제로 커츠 역을 맡은 마이클 섀넌은 한 인터뷰에서 “박찬욱 감독 입장에서는 커츠와 자신을 동일시할 만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박찬욱 감독 역시 인터뷰를 통해 커츠가 특별하게 다가왔다고 피력한 바 있다. “커츠는 허구의 세계에서 만족감을 느끼며 디테일을 추구하고 세계를 구축하는 일에 몰두하는 과정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다. 지금껏 내가 다뤄보지 않았던 유형의 인물 같다고 생각한다.” 박찬욱 감독은 자신과 커츠의 공통점이 디테일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원작과 달리 ‘디테일, 모든 건 거기서 시작되는 거야’라는 커츠의 대사가 추가된 것도 감독으로서 자신을 반영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리틀 드러머 걸>은 박찬욱 감독 특유의 미장센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빨강, 파랑, 노랑 등 비비드 한 톤의 색감이 다채롭고 조화롭게 입혀진 공간과 의상은 <리틀 드러머 걸>의 백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찬욱 감독이 품고 있었던 <리틀 드러머 걸>의 미장센에 대한 비전은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미술감독이었던 마리아 듀코빅의 참여를 통해 구체화됐다. 마리아 듀코빅의 참여는 박찬욱 감독의 요구가 관철된 결과인데 이는 <리틀 드러머 걸>의 판권을 갖고 있었던 제작자이자 존 르 카레의 아들이기도 한 사이먼 콘웰의 협조 덕분이기도 했다.

2016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아가씨>로 칸을 찾은 박찬욱 감독은 현지에서 만난 사이먼 콘웰에게 <리틀 드러머 걸> 연출에 관심이 있다는 의사를 밝혔다. 사이먼 콘웰은 <리틀 드러머 걸>을 TV시리즈로 만들 계획이었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에게 대본을 보냈지만 그가 큰 관심을 갖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영화에 비견할 만한 안목을 버리지 않는 선에서 연출을 원한다는 조건을 제시했고 제작자 입장에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동시에 주연배우로 <레이디 맥베스>에서 호연을 펼친 플로렌스 퓨를 추천했다. 박찬욱 감독은 인지도가 낮은 배우라 거절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반대였다. 플로렌스 퓨는 사이먼 콘웰과 제작사가 캐스팅 1순위로 생각하는 배우였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이 그녀의 이름을 말했을 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고 밝힌 바 있다.

물론 시행착오도 적지 않았다. 에피소드마다 1시간 남짓한 6회 분량의 드라마를 81회 차만에 촬영하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144분의 러닝타임을 가진 <아가씨>만 해도 68회 차로 촬영된 것이었다. 기존에 영화를 찍던 관성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시간에 쫓기면서도 다양한 로케이션을 소화해야 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후반 작업을 위해 허락된 시간도 부족하게 느껴졌다. 이번에 국내에서 공개되는 <리틀 드러머 걸>에 ‘감독판’이라는 부제가 더해진 건 그런 아쉬움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공개된 <리틀 드러머 걸>은 해외에서 공개된 버전과 편집이 다르다. 박찬욱 감독의 말에 따르면 제작사와의 견해 차이로 삭제된 장면들이 다수 포함됐고, 컷의 편집 순서나 음악이 바뀐 부분도 적지 않다고 한다.

흥미로운 건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이 지난 3월 29일 ‘왓챠플레이’를 통해 공개됐다는 사실이다. 왓챠플레이는 넷플릭스처럼 영화와 드라마를 비롯한 동영상 서비스를 스트리밍 방식으로 공급하는 플랫폼이다. 월정액 방식으로 해당 플랫폼의 스트리밍 서비스를 무제한으로 즐길 수 있다. 스마트폰이나 스마트 TV를 비롯해 인터넷이 수신되는 영상 디바이스로 연결이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박찬욱 감독이 처음으로 연출한 TV시리즈가 국내에서는 스트리밍 서비스 플랫폼을 통해 최초로 공개된다는 점에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는 박찬욱 감독 입장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편집본을 관객에서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왓챠플레이 입장에서는 박찬욱이라는 대가의 작품을 독점으로 제공하는 플랫폼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 ‘윈윈’하는 결과가 된 것 같다.

한편 박찬욱 감독은 차기작을 연출하기 위해 다시 한번 해외로 나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박찬욱 감독은 미국의 아마존 스튜디오에서 제작하는 서부극 연출 제안을 수락한 상황이라고 한다. <인터스텔라>의 주연배우 매튜 맥커너히가 주연으로 물망에 오르고 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박찬욱 감독은 국내 연출작으로 기획 중인 작품의 제작 여건을 살피는 중이라고 한다. 문득 지난 2017년 인터뷰 당시 박찬욱 감독이 <도끼>의 제작을 보류해야 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을 피력한 것이 떠올랐다.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거장 감독이 해외로 나가 작품을 연출할 기회를 얻는 건 고무적인 일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연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비좁아지는 자국의 현실로 인해 연출의 기회를 잡고자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 박찬욱이라는 거장의 현실처럼 보인다면, 그저 기우일까? 그런 의미에서 <리틀 드러머 걸>은 거장의 자존심과 고민이 함께 투영된 현실처럼 보인다. 박찬욱 감독의 새로운 영화를 가능한 한 빨리 보고 싶은 건 그래서다. <아가씨>를 통해 대가의 경지를 드러낸 박찬욱의 새로운 한국영화를 볼 기회가 좀 더 빨리 왔으면 좋겠다.

* ‘매일신문’에 기고한 칼럼을 재편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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