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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혐오정치 : 반여성, 반중국, 반난민

한국은 지금 장기적 위기 상황이다.

ⓒyoungID via Getty Images

대한민국은 지금 장기적 위기 상황이다.

여태까지 한국 자본주의의 모든 문제는 성장이 덮어주곤 했다. 실업급여는 길어봐야 240일밖에 나오지 않고 각종 복지제도는 다 형편없어도, 성장률이 높아 고용창출 효과가 있기만 하면 참을 만한 세상으로 보였다. 그런데 성장은 멈추고 말았다. 앞으로 장기적으로는 1~2% 이상의 성장률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영세업자들의 도산이 계속 이어지고 청년실업이 사회적 참사의 규모로 커져가는 상황에서는 복지국가 건설부터가 절박한데, 우리들의 재벌 공화국에서는 정권을 누가 장악한들 복지국가 건설에 필수적인 부유층과 대기업에 대한 증세는 힘들다. 성장은 이미 끝났고 복지국가는 아직 시작도 안 된 상황은 다수에게 끔찍한 고통으로 다가온다. 이는 ‘헬조선’과 같은 유행어들로 표현되는 대한민국의 만성적 위기의 요체다.

위기가 오면 좌우 양방향으로 특히 젊은층의 급진화가 이루어진다. 오늘날의 프랑스를 보라. 좌파적 경향의 ‘노란 조끼’ 시위자들이 부자들의 단골 초호화 식당에 의도적으로 방화하는 등 좌파적 급진화가 가시적인 한편, 유권자들의 약 4분의 1은 극우 정당인 ‘국민전선’을 지지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국도 점차 비슷한 궤도를 밟는 것 같기도 하다. 지난 19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사민주의 후보인 심상정에게 20대 유권자들이 여러 세대 중에서는 가장 높은 12.7%의 투표율을 보였다. 프랑스에서야 심상정 후보의 노선은 좌파도 아닌 ‘중도’로 평가를 받겠지만, 사민주의 정치마저도 억압받고 배제되어온 한국으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결과다. 중·고등학생들도 최근의 촛불항쟁까지 계속해서 거리에서 저항의 주체로 그 존재를 과시해왔다. 즉, 상당히 보수적인 사회인 한국에서도 적어도 일부분은 왼쪽으로 급진화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걱정스럽게도 한국에서는 왼쪽으로의 급진화보다 오히려 오른쪽으로의 급진화가 더 가시적이다. 일본이나 서구와 크게 다르지 않게 한국 인터넷에서도 특히 젊은 남성들을 중심으로 해서 혐오정치가 만연해 있다. 남성들에게 안정된 일자리를 허용하지 않는 신자유주의는 남성들에게서 ‘가정 부양의 책임자’라는 그들의 전통적인 젠더 역할을 박탈하여 그들을 상징적으로 거세한다.

물론 여성에 대한 불안 노동 강요는 훨씬 더 심각하여, 남녀 할 것 없이 같이 연대해서 신자유주의와 싸워야 할 판이다. 그런데 ‘돈을 벌어주는 사람’으로서의 기존의 특권을 상당 부분 상실해 연애나 결혼 시장에서의 ‘매력포인트’를 상실한 많은 남성들은 연대의 길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쉬운 ‘약자 탓하기’, 즉 억압 이양의 길을 택한다. 그들이 주도하여 한국 인터넷을 혐오의 도가니로 만든 것이다.

젊은층의 새로운 넷 우익이 특별히 혐오하는 것은 페미니즘이다. 페미니즘이 강해서가 아니다. 사실 한국에서는 페미니즘의 입지가 비교적 약하다. 한국 여성들 중에서는 약 절반, 남성들 중에서는 약 10분의 1만이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규정한다.

반면에 노르웨이 같으면 대다수의 남녀(전체의 75~80% 정도)가 페미니즘을 지지하고 있다. 노르웨이에서는 페미니즘에 대한 지지 거부는 소수의 몫이지만, 한국에서는 반대로 페미니스트가 소수자다. 여성이 평균 남성 임금의 64%만 받는 대한민국과 달리 노르웨이 여성들이 남성 임금의 약 87% 정도 받아 훨씬 덜 차별받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런데 일부 남성들에게는 최근에 소수자들이 가두시위 등을 벌이며 가시화되는 것이야말로 불안 유발 요인이 된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백인 남성들이 부인이 집안에서 가사와 육아만 맡고 밖에서 일을 하지 않아도 남편이 가정 부양을 충분히 할 수 있었던 1950년대의 ‘황금기’로 돌아가고 싶어 하듯이, 일부 한국 남자들도 심적으로 남성은 ‘가장’으로, 그리고 그 배우자가 소리 없는 부양 대상자로 각각 성역할이 나뉘곤 했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문제는 미국의 전후 황금기도 한국의 개발 시대도 어차피 돌아올 일은 없을 것이고, 끝이 보이지 않는 불안의 시대에 남성에게 요구되는 것은 ‘가장’으로서의 자만이 아니고 주위의 약자들과 연대할 줄 아는 공감능력이라는 점이다.

한국 사회 안에서는 넷 우익의 언어폭력에 의한 일차적인 피해자가 여성이라면, 밖에서는 무엇보다도 중국과 중국인들이 한국 혐오정치의 대상이 된다. 반북 혐오도 만만치 않지만, 가면 갈수록 과거의 반북 콤플렉스가 반중국 콤플렉스로 대체되어 가는 느낌이다. 북한이 핵 폐기 의지를 확실히 보이고 경제건설 우선 노선을 명확히 선언한 마당에 더는 ‘북한 위협’ 따위를 들먹여봐야 다수에게 그다지 실감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중국은 다르다. 중국은 현재로서 미국 다음으로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국임에 틀림없다. ‘중국 패권주의’란 분명히 실체가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미국의 중국에 대한 압력이 거세지면 거세질수록 오히려 중국의 반박이 강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미-중 갈등이 첨예화되는 과정에서 손해를 보는 것은 바로 한국인들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배치 동의는 한국 정부의 오류가 아닐 수 없었다. 미-중 갈등에서 미국 편에 전적으로 가담하는 인상을 주면 거센 반발을 예상해야 한다. 중국 패권주의 문제의 해결은, 미국 패권주의 편에 서주는 것이라기보다는 한국과 북한의 지속적인 관계 개선과 한반도 두 국가의 자주성 강화에 달려 있다.

남북한이 통일로 가면 갈수록 중국 패권주의의 영향을 덜 받을 수 있다. 동시에, 중국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이야 당연히 필요하지만, 중국을 계속 자극하는 미국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은 그 전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패권주의 비판은 결코 개별적 중국인에 대한 악마화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중국인의 악마화는 결국 국내에 사는 50만명의 중국 국적 조선족 등 여러 소수 집단에 차별의 심화로 작용할 뿐이다.

국내의 넷 우익 정치는 이미 한국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확보했다. 지난해 제주에 온 500명도 안 되는 예멘 난민을 둘러싼 혐오세력들의 광풍을 한번 보라. 한국보다 인구가 다섯배나 적은 스웨덴에 2015년에 약 16만명의 난민 지위 신청자들이 쇄도해도, 한국에서 벌어진 예멘 난민을 둘러싼 광풍 같은 현상은 그 당시 스웨덴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난민과 중국, 여성과 페미니즘에 대한 혐오를 키워드로 해서 온·오프라인 혐오세력들이 똘똘 뭉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오른쪽으로의 급진화를 예방하자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바로 연대를 통한 위기 대응이다. 남자와 여자, 국내인과 거주 외국인들이 함께 손을 잡고 신자유주의의 야만에 함께 대응해야 오늘의 ‘헬조선’보다 더 바람직한 사회에서 우리가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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