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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벚꽃 엔딩’만 듣고 있을 수는 없잖아

장범준의 팬으로서 희망하는 것이 있다.

  • 홀로
  • 입력 2019.04.08 14:01

장범준의 계절이 돌아왔다. 과장이 아니라, 요 며칠 라디오 채널들에선 신곡 ‘당신과는 천천히’와 ‘벚꽃 엔딩’이 번갈아 가며 1시간에 2번씩은 흘러나오는 것 같다. 그가 버스커버스커란 그룹으로 한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한 게 2011년이고, ‘벚꽃 엔딩’이 실린 버스커버스커 1집이 발표된 게 2012년 2월이다. 어느덧 7년 남짓한 시간 동안 그의 목소리와 “흐어어어~” 하는 장범준 특유의 추임새는 한결같이 이 계절을 에워싸고 있다.

올해 만으로 30살이 된 장범준의 인기는 여전히 식을 줄을 모른다. 그의 인기곡 중에서도 ‘벚꽃 엔딩’은 마치 군인들의 입대를 노래한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처럼, 꽃 피는 봄날을 상징하는 하나의 국민적 대표곡이 된 지 오래다. 이 곡이 그에게 꼬박꼬박 안겨줄 저작권료를 가리키는 ‘벚꽃 연금’, 봄만 되면 되살아나 슬금슬금 음원 사이트를 휩쓰는 현상을 뜻하는 ‘벚꽃 좀비’ 등 이 노래를 가리키는 익살스러운 표현들도 유명하다.

장범준의 힘은 무엇일까. 맑고 친근하며 청량한 목소리, 단순하면서도 귀에 팍팍 꽂히는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송라이팅 능력, 그리고 청년 세대를 대변하는 솔직하고 투명한 감성 등 그의 인기를 설명할 수 있는 말들은 많겠지만… 내게 있어 장범준의 가장 놀라운 힘은 한마디로 ‘그의 노래를 들으면, 노래를 듣던 그 시공간의 감각과 풍경이 재현된다’는 게 아닐까 싶다. ‘벚꽃 엔딩’과 ‘여수 밤바다’를 들으면, 내 머릿속에도 자연스레 그의 목소리와 함께 과거의 연인과 거리를 걷던 바로 그 봄날이, 그 기억들이 펼쳐지곤 하는 것이다.

이런 감각적 재현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물론 그의 감성과 음악성의 힘일 테지만 말이다. 대다수 팬이 가진 생각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유튜브의 한 유저는 그의 공식 영상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댓글을 달아서 많은 이들의 공감을 받기도 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분에게 봄의 풍경을 묘사할 땐, 장범준의 노래를 들려드리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호르몬 중독의 현상들

봄은 만물의 생명이 싹트는 계절이요, 우리 몸 안의 호르몬이 꿈틀거리는 계절이다.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여전히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자기 몸 안에 맴돌고 있는 젊음의 무늬들을 기억해내곤 한다. 다만 봄만 되면 새로운 열풍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노래들은, 그리고 장범준이란 ‘대중문화의 아이콘’은 우리 사회의 어떤 일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비유컨대, 그것은 ‘호르몬 과잉’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일면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예전부터 우리 사회가 호르몬에 중독되어 있고, ‘호르몬적인 것’에 탐닉하는 공간이란 생각을 자주 해왔다. 호르몬이란 무엇인가? 호르몬(hormone)은 ‘자극하다’, ‘흥분시키다’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온 말로, 혈액을 타고 흐르고 신체의 균형과 생체 유지를 담당하는 수천 가지의 다양한 체내 물질을 가리킨다. 기분을 좋게도 나쁘게도 만들고, ‘남자를 남자답게’ 또 ‘여자를 여자답게’ 만들며, 식욕과 수면욕을 비롯한 온갖 인간적 욕구를 좌지우지하고, 지방세포의 축적과 분해를 담당하는 등등, 호르몬은 말 그대로 인간의 모든 신진대사에 관여하며 우리 몸의 변화를 지배하곤 한다.

그리고 내가 말하고 싶은 ‘호르몬 중독 사회’의 특징이란 다음과 같다: 성숙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침착하고 이성적인 대화와 합의의 힘을 믿는 대신, 뜨겁고 낭만적인 감성과 감각의 에너지, 관습의 힘, 육체의 아름다움에 홀린 사회.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인간관계에서의 본능적인 이끌림’, ‘감정의 분출과 폭발’ 등의 키워드들과 친화적이다. 또 성별·나이 등에 따른 전통적 역할 구분에도 익숙하다. 상대방을 한 사람의 독립적 인격체로 대하면서 서로의 이견을 합리적으로 조율하는 데 극히 취약하다. ‘육체가 발산하는 호르몬’에 따른 삶의 형태가 그토록 자연스러운데, 그런 ‘자연적인’ 이치를 왜 억지로 거스르거나 꼬박꼬박 따지려 든단 말인가?

이런 사회에서는 연애와 사랑, 결혼과 모성 같은 단어들에 대한 강박이 지배적이다. 더불어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에 대한 은근한 집착과 강요가 이뤄지기 일쑤며, 외모적으로는 끊임없이 날씬해지거나, 근육질이 되거나, 또는 어리게 보이려는 욕망으로 들끓기도 쉽다. ‘강함’과 ‘아름다움’이란 본능적 미덕에 대한 끈질긴 열망과 추구가 우리들의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동시에, 타인에게 감정을 폭발시키는 ‘허들’도 낮다. 그러니 아침드라마에선 김치 따위로 상대방의 뺨을 때리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내 ‘아랫사람’에게 시원스레 욕을 퍼붓는다거나 폭력까지 행사하는 갑질이 만연한 것도 어색하지 않다. 어쩌면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한때, ‘청춘’과 ‘봄날’이라는 상징에 대한 우리 문화의 그 유래 깊은 열광도 이런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 시절 언제까지

장범준은 그중에서도 10대와 20대 남녀의 풋풋한 사랑을 오랫동안 묘사해왔다. 그의 3집 앨범 중에서 이런 특징을 가장 잘 대변하는 곡은 역시 ‘노래방에서’가 아닐까 싶다. 나도 이번 앨범 수록곡 중 이 노랠 가장 많이 돌려서 듣고 있는데, 장범준은 나와 같은 팬들의 반응을 접한 뒤 이 곡을 ‘당신과는 천천히’와 함께 더블 타이틀곡으로 ‘승격’시키기도 했다. 이 노래엔 마치 우리가 ‘응답하라’ 시리즈를 볼 때 느낄 수 있는 어떤 복고적인 편안함, 우리 몸 안에 호르몬이 퐁퐁 샘솟았던 ‘그때 그 시절’에 대한 향수가 있다. 과연 아름다운 향수다.

그렇지만 한 사람의 연인이나 부부가 언제까지고 노래방만 다니면서 사랑을 완성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노래방에서’는 참으로 멋진 노래이지만, 동시에 이 곡은 장범준 음악 세계가 상징하는 ‘호르몬 중독성’을 전형적으로 드러내는 건 아닐까 싶었다. ‘봄날의 전령사’로서의 장범준은 여전히 호르몬에 취해 있고, 그저 떨리는 자기 마음을 고백하는 데 여념이 없다. 그는 여전히 1990년대와 2000년대의 그 ‘노래방’의 기억에 머물러 있다. 한 여성과 함께 ‘살아가는’ 일상적 파트너로서가 아니라, 여자의 마음을 훔치고 뺏는 데 여념이 없던 기억 같은 것 말이다.

노래뿐만이 아니라 그의 삶도 마찬가지다. 최근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장범준은 뒤늦게 참여한 육아의 경험에 관하여 “육아가 그토록 힘든 줄 몰랐다. 정신병에 걸리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가 프로그램 내내 꼬박꼬박 육아를 “돕는다”고 표현했던 것은 역시 주목할 만했다. 아내를 향해 진심 어린 미안함을 표현하면서도 (육아는 당연히 ‘함께 도맡는다’는 인식 대신에) 그녀에게 “꽃을 선물했던” 장범준은…. 정말 장범준답지 않았던가?

어쨌든 이제 막 봄이 한창이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봄은 금방 지나가고, 혹독하게 뜨겁고 혹독하게 추운 계절들이 우리들의 앞에 펼쳐질 거란 사실을. 서로를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떨리고 또 설레던 20대가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러니 장범준을 좋아하는 한 사람의 팬으로서 말하건대, 그가 앞으로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30대의 노래, 새로운 계절의 노래를 불러주기를 희망할 뿐이다. 그럴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는 벚꽃만을 바라보는 ‘연금생활자’가 되기엔 아직 너무나도 젊으니까.

글 · 산책맨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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