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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드는 보고 싶지만 성차별은 짜증나는 이들을 위한 추천 드라마 3편

[스트리머스] 일본 테레비의 젠더 의식도 달라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드라마들

  • 박수진
  • 입력 2019.04.05 15:29
  • 수정 2020.10.17 13:53
ⓒTBS

한편으로는 다양성을 품는 것 같은 일본도 성역할 구분에서는 신기할 만큼 완고하다. 유리천장이나 부부 간 호칭뿐 아니라 ‘남자다운 것‘과 ‘여자다운 것‘에 대한 고정관념도 한국보다 강하다. 많은 일본 드라마들 속 남자들은 ‘남자가 되기를 포기한’ 초식남 아니면 여자와의 스킨십에 환장하는 캐릭터로 등장하며,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닌 여자들은 성적 매력을 무기 삼거나 ”드센 여자”로 묘사된다.

먹는 즐거움이나 추리극을 보려고 틀었다가 불편한 장면들을 불쑥불쑥 마주해야 하는 일드들에서, 그래도 현실에서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일본 사회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드라마들이 있다. 비슷한 나라의 여성으로서 공감이 갈만한 대사들도 물론 있다.

일본 사회의 젠더 의식도 달라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드라마 세 편을 꼽았다. 아래 세 드라마 모두 푹(pooq)왓챠에서 볼 수 있다.

 

코우노도리 コウノドリ 시즌 1, 2 (2015, 2017)

ⓒTBS

story. 종합병원 산부인과와 신생아과를 중심으로, 병원 사람들의 개인사와 환자들이 병원을 찾은 사연들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풀어간다. ‘병원 사람들의 개인사’란 것도 가족사나 의사로서의 직업 의식, 자기의 자궁 관련 고민들이다보니 결국 모든 에피소드들이 생명, 임신, 출산, 건강,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셈이다. 아야노 고가 ‘인술을 집도’하는 산부인과의로 등장하며, 게스트 출연자로도 오구리 슌 등 알려진 배우들이 나온다.

4년 전 방송했던 시즌1에 비해 2년 전 방송한 시즌2는 캐릭터와 주제들이 더 깊고 다양해졌다. 주인공들의 성장과 여성, 모성, 정신건강 이슈들이 눈에 띄며 어느 정도 정서의 차이도 느껴진다.

무통분만은 진정한 모성이 아니라고 질타하는 사회 분위기, 자기 아이를 돌보는 걸 두고 ”나도 돕겠다”고 말하는 남편, 육아하는 아빠가 아이를 픽업하려 정시퇴근할 때마다 사회생활 못한다며 눈치 주는 회사, 산후우울증까지.

‘파와하라‘(조직 내 권력관계를 이용한 괴롭힘)와 ‘세쿠하라‘(주로 직장 내 성희롱)는 알았지만 아이를 키우는 엄마에 대한 사회적 괴롭힘을 뜻하는 ‘마타하라’(maternity harassment)라는 말은 이 드라마로 알았다.

 

line. 막 낳은 아이가 예쁘지 않은 데다, 출산 휴가를 낸 사이 회사에서는 맡았던 프로젝트에서 잘리고, 친엄마와 시엄마가 양쪽에서 ‘좋은 엄마상’에 대해 끝없이 이야기하는 가운데 심각한 산후우울증에 걸린 여성이 자살 시도를 한다. 한참 늦게서야 아내의 고충을 알게 된 남편이 ‘부부는 하나니까 같이 이겨내자’고 하자 의사가 하는 말.

″인간은 둘이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혼자예요. 부부라도 다른 인간이기에 서로를 존중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도울 수 있는 겁니다.”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한도의 생활 健康で文化的な最低限度の生活 (2018)

ⓒカンテレ/도라마코리아

story. 길고 설명적인 일드 제목들 중에서도 더욱 눈에 띄는 이 제목은 일본 헌법에서 따왔다. 일본 헌법 25조는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한도의 생활을 영위할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한다. 이에 따라 정부가 지급하는 최저생계비 역시 수급자의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한도의 생활’을 보장하는 금액으로 책정되어야 한다. 드라마의 배경은 최저생계비 수급자들을 담당하는 도쿄의 한 구청 생활지원과. 주인공은 영화감독을 꿈꿨지만 재능도, 열정도 부족해 안정적인 직장을 얻는 쪽으로 진로를 바꾼 20대 초반의 구청 생활지원과 직원이다.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한도의 생활’은 한국 드라마에서는 좀처럼 주요하게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을 전면에 보여준다. 가난하고, 그래서 이런저런 정보에 대한 접근권이 없고, 그래서 다시 더 가난해지는 삶들이 이 드라마의 주제다.

가정폭력 피해자, 성폭력 트라우마로 스스로를 돌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노숙생활을 전전할 수 밖에 없는 청년, 어려서부터 글을 읽지 못하지만 난독증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본 적 없는 중년, 이십년째 알코올 중독자, 자식을 버렸다는 죄의식을 가진 부모들과 자식에게서 뭐든지 뜯어내려는 부모들까지.

이제 막 사회에 첫 발을 들였을 뿐인 사회초년생들이 ”타인의 인생의 무게를 짊어질 수 있을까?” 주인공을 포함해 신입 ‘케이스워커’ 5명은 지금까지 알아온 것과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최저생계비 수급자들을 만나 성장해간다. 성 편견이나 성차별을 중심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각각의 삶의 무게를 존중하는 만큼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쉽게 희화화하려하지 않는다. 일드 특유의 만화적 재미들도 유효하다.

 

line. 난생 처음 수급자가 된 싱글맘은 전 남편의 폭력으로 삶이 망가진 상태다. 그럼에도 생활보장을 받기보다는 혼자 모든 걸 감당해야만 ‘보통 사람‘,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다고 여긴다. 폭력 트라우마 치료보다는 취업 압박에 시달리는 모습에 20대 복지사가 하는 말.

″나도 여자로 태어난 이상은 결혼이라든가 출산이라든가 그게 보통이라고 생각했어. 그 분도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닐까?”

 

 

언내추럴 アンナチュラル Unnatural (2018)

ⓒTBS

story. 말그대로 ‘부자연스러운’ 죽음을 조사하는 법의학 연구소가 무대다. 이곳에서 일하는 두 법의학자 중 한 명은 젊은 여성이다. 그녀는 한 에피소드에서 살인사건 재판에 전문가 증인 요청을 받은 남성 동료를 대신해 출석하는데, 재판정 안과 밖에서 그 어떤 소견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험을 한다. 상대 검사는 증언의 신뢰도를 깎기 위해 ‘역시 감정적인 여성 연구자‘, ‘남탓하는 건 여성의 특성’이라며 주인공을 모욕한다. 그런 인식은 같은 편인 피고인도 마찬가지다.

작가(‘중쇄를 찍자‘의 노기 아키코)와 두 PD들이 모두 여성이다. 의학·수사·휴먼 장르이지만 ‘일하는 여성’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 드라마다. 왓챠에도 ‘미투가 터지지 못 하는 일본에서 나오기 힘든, 혹은 나올 수 밖에 없는 젠더 감수성 있는 드라마’라는 한국 시청자들의 리뷰들이 올라와있다.

감염병 최초 확진자에 대한 비난 여론을 다룬 메르스 에피소드가 마음 아프다. 가족살해 후 자살 사건을 ‘일가족 동반자살‘로 부르는 세태에 대한 비판도 있다. ‘교열걸’ 이시하라 사토미와 ‘고독한 미식가’ 마츠시게 유타카가 반갑다. 미드 CSI 시리즈의 팬이라면 마음에 들 것이다.

 

line. 성범죄의 피해자가 될 뻔한 여성의 옷차림을 두고 ‘등이 시원하게 파였다’고 지적하는 형사에게 주인공이 하는 말.

″여성이 어떤 옷을 입고 있든 술을 마시고 취해 있든 남자 마음대로 하면 안 되죠. 합의하지 않은 성관계는 범죄입니다.”

 

 

*필자의 블로그에 실린 글을 편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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