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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4월 05일 17시 51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04월 05일 17시 51분 KST

'어스' 우리라는 이름의 적

'어스'의 압도적인 공포는 어떤 아이러니를 겨냥한다

어둠이 적막하게 내려앉은 저녁, 잠을 자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어린 아들이 부모에게 와 말했다. “집 앞에 어떤 가족이 서 있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남편은 아내의 만류에도 호기롭게 문을 열고 나가 그들에게 언성을 높인다. 하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 화가 난 아버지는 야구방망이를 찾아들고나가서 으름장을 놓기 시작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들은 각자의 방식에 따라 집으로 침입하길 시도한다. 놀란 남편은 뒤늦게 집으로 들어와 문을 잠가보지만 그들은 거침이 없다. 문을 부술 듯이 박차고, 창을 깨고, 평온하던 가족을 일거에 흔들어버린다. 하지만 가족을 더 큰 충격으로 몰아넣는 건 그들의 정체다. 집 안으로 들어와 가족을 위협하는, 빨간 옷을 입은 네 사람과 마주한 어린 딸은 경악한 표정으로 나직하게 말한다. “우리잖아.” 

그렇다. 네 가족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불한당 같은 존재들이 각자 자기 자신들과 똑같은 구성원을 지닌 도플갱어 가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더욱 충격에 빠진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관객들 역시 스크린 너머의 가족들과 같은 심정일 것이다. 목덜미를 잡고 숨통을 죄어오던 영화가 언어마저 사라진 듯한 순간으로 자신들을 인도하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리고 <어스>는 도플갱어 같은 살인마들에게 쫓기는 한 가족의 공포감으로 관객을 얼려버리는 영화다. 그리고 <어스>의 가족이 정체불명의 도플갱어들에게 공격을 받게 되는 순간의 공포보다도 놀라운 충격을 선사하는 건 나를 포함한 우리를 공격하는 것이 ‘나’와 똑같은 ‘다른 나’이면서도 ‘우리’와 똑같은 ‘다른 우리’라는 사실이다. 

<어스>는 좀처럼 믿기 어렵지만 실제로 당신의 눈 앞에서 밀려들어오는 위협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될 때의 공포감이란 것이 무엇인지 실체화시킨 영화 같다. <어스>에서 위협적인 행동을 하는 도플갱어 같은 존재들은 거울 너머의 유령처럼 믿을 수 없는 존재로서 겁을 주는 수준을 넘어 눈 앞까지 다가와 목덜미에 날카로운 것을 들이미는 것처럼 생생한 위협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물리적/심리적 공포감을 온몸으로 체감할 가족의 입장에서 영화를 지켜보게 될 관객들은 그 공포감의 주체들이 휘두르는 두려움과 함께 쥐여주는 호기심 덕분에 <어스>를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체험으로 여길 것이다. 나와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듯한 존재로부터 공격을 받는 가족의 떨림을 함께 느끼면서도 공격을 감행하는 이들의 목적을 알고 싶어 눈에 뗄 수 없을 것이다. 

가족을 공격하는 그들의 행위가 어떤 이유에서 비롯되는지 전혀 설명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도플갱어라 여겨질 정도로 생김새가 닮은 네 가족과 네 불청객들은 생김새가 닮았을 뿐 판이한 삶을 살아왔다. 그들은 지상에 존재하는 이들과 동일한 존재로 태어났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했다. 지상에 있는 이들의 행동을 복제하지만 판이한 환경 탓에 그런 운명은 저주가 된다. 원치 않는 이와 결혼하고, 스스로 괴물이라 지칭하는 아이들을 낳았다. 그저 원본이 되는 지상의 존재들의 삶을 복제하듯 살아가는 아바타의 운명에 갇혀 살았다. 그들은 지상의 사람들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는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한 소녀가 그 삶에서 벗어날 계기를 생각하게 됐고, 지하의 모든 이들이 그 소녀의 계획을 따라 지상에 올라와 자신들의 삶의 원본 노릇을 하던 존재들을 공격하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한 가족뿐만 아니라 전인류적 문제로 번져 나간다. 이런 설명은 그들의 공격적인 행위와 그 배경이 되는 증오의 출발점에 대한 간단한 이해를 돕는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지하 세계의 정체와 지상으로 올라온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에 대한 호기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에게 맞서거나 달아나는 가족들도, 그 광경을 지켜보는 관객도 같은 물음표를 품게 된다. ‘그들은 왜 우리를 공격하는 것인가?’라는 물음표. 이 물음표의 답은 <어스>라는 영화가 공포라는 날개를 달고 날아가려는 종착지와 같다. 결과적으로 이런 물음 앞에서 <어스>가 선사하는 불안과 공포는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때때로 그것 자체가 완전한 목표처럼 보이는 신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어스>가 전달하는 압도적인 위협감은 관객의 시선을 붙잡아 두기 위한 멱살잡이로서 탁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측은 <어스>가 전작 <겟 아웃>을 통해 데뷔작으로 1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감독이자, 작가이자, 제작자가 된 할리우드의 새로운 블루칩 조던 필의 두 번째 연출작이라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어스>를 연출한 감독 조던 필은 전작 <겟 아웃>을 통해 백인 중심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흑인의 심리적 불안감을 장르적인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로 승화해낸 바 있었다. 오랫동안 제기돼 온 사회적 문제를 은유적인 세계관에 담아 스릴러 장르에 이식해내는 동시에 기괴한 박력과 강렬한 여운을 남기며 장르적 목표를 달성해낸다는 점에서 <겟 아웃>은 실로 대단한 성취였다. 그런 면에서 <어스> 역시 장르적 관습에서 벗어난 표현양식에 담겨 있는 상징과 은유를 읽고 싶게 만드는 영화 이리라는 기대감을 갖고 상영관을 찾게 되는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어스>를 연출한 감독 조던 필의 설명은 <어스>라는 영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최적의 조언처럼 들린다.

“모든 사람들은 ‘우리’라는 단어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 가족일 수도, 우리 마을일 수도, 우리나라일 수도, 우리 인류일 수도 있다. 결국 ‘우리’의 본질이란 ‘그들’이 있다는 것을 규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 각자의 ‘우리’가 무엇이든 간에 우리라는 건 ‘그들’을 적으로 돌린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 자신에게 최악의 적은 ‘우리’ 일 수도 있다는 거다.” 

조던 필의 말처럼 <어스>는 우리라는 보편적 테두리 속에 잠재된 차별적인 의식으로 규정된 ‘우리’에 대해 짚어보게 되는 영화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등장하는 자막은 미국 곳곳의 지하에는 정체불명의 긴 터널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터널의 용도는 대부분 모르고 있다는 음모론을 제시한다. 그 뒤로 이어지는 TV 속 장면에서는 ‘미국을 가로지르는 손(Hand Across America)’이라는 캠페인 운동에 관한 광고가 등장한다. 1986년 미국 전역에서 사람들의 손을 잡고 6500km에 달하는 인간띠를 잇자는 이 운동은 기아에 직면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기금 모금을 독려하기 위해 진행된 캠페인이었다. 쓸모를 잃고 방치된 지하 공간 위에서 벌어지는 휴머니즘적인 캠페인. 그 지점에서 <어스>는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양극화의 아이러니를 겨냥한 영화처럼 보인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당연하게 여길뿐, 그것을 위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국적이나 계급, 인종 또한 빈부의 격차를 일종의 특권이나 자격으로 착각한다.”

감독 조던 필의 말은 <어스>가 결국 작금의 세계를 건드리는 영화임을 직감하게 만든다.

<어스>에서 빨간 옷을 입고 등장한 그들은 자신들이 지하에서 비참한 삶을 이어가는 동안 지상의 가족들이 호의호식해왔다고 경멸한다. 자신과 동일하게 생긴 지상의 사람들이 하는 행위를 맹목적으로 복제하듯 살아가는 그들의 삶이란 존재로 규정될 수 없는 그림자의 행위처럼 무의미해 보인다. 그리고 판박이처럼 똑같이 생긴 두 사람의 삶을 가르는 건 그저 지상과 지하라는 층위의 구분이다. 지상의 내가 수영장에서 수영을 할 때 지하의 나는 물이 없는 맨바닥을 헤엄친다. 지상의 나는 삶의 주도권을 갖고 행위를 선택하지만 지하의 나는 그저 행위한 결과를 장소와 무관하게 따라 해야만 한다.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동일한 행위를 하는 두 존재의 괴리된 삶은 좀처럼 원인을 알 수 없는 결과처럼 보여서 영화적 세계관 속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기이함으로 남게 되지만 상영관 밖의 진짜 세계 속에서 기이할 정도로 묻지 않게 되는 어떤 질문으로도 가 닿게 된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살기 위해 동일한 행위를 하며 산다. 밥을 먹고살아야 하는 건 똑같다. 하지만 누군가는 넘치는 풍요를 방류하듯 살아가고, 누군가는 채워지지 않는 빈곤의 바닥을 긁으며 산다. 선진국과 후진국,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백인과 흑인, 남자와 여자,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는 무한한 가능성을 물고 태어나는 반면 누군가는 명확한 한계를 짊어지고 살아간다. 이런 아이러니는 과연 당연한 것일까. 밟고 사는 땅의 차이만으로 삶의 조건이 결정된다는 것은 그저 운명이란 단어로 정의될 수 있는 걸까. 누군가는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약속 안에서 태어나지만 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기본적인 삶의 조건조차 불명확한 한계에 갇힌다. <어스>는 바로 그런 현실, 즉 현대를 살아가는 전 세계인이 쌓아 올렸다고 자부하는 문명사회가 물어보는 법조차 잊어버린 기이한 풍경에 물음표를 던지기 위해 날카롭게 제시된 느낌표다. 날카롭고 위협적인 감각과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장치로 설계된 우화의 세계이지만 끝내 직설적이고 명확하게 다가오는 질문이다. 

강대국과 자본가들이 벌이는 정의롭고 우아한 캠페인 아래에서 지워지는 착취와 약탈의 역사는 불평등의 질서로 방치되고 끝내 종종 힘 있고 가진 자들의 품위를 위해 벌어지는 선한 사마리아인 코스프레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는 현실들. <어스>는 바로 이 우아한 세계를 예리하게 가르고 찌르는 무시무시한 우화인 셈이다. “우리가 시도하는 건 관객들에게 새로운 탈출구를 제공하면서도 이 세상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눈을 감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던 필 감독의 말처럼 <어스>는 낯설지만 결국 우리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어떤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어스>가 그리는 것처럼 지상과 지하의 세계관처럼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이분법적인 계층 구조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특히 조던 필이 연출한 전작 <겟 아웃>이 묵직한 메시지를 유연한 위트와 쌈박한 서스펜스로 휘두르던 것에 매료된 관객 입장에서 <어스>는 세계관에 대한 근거가 지나치게 간과돼서 그저 근본 없는 폭력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스>가 설계한 이분법적인 세계와 캐릭터들의 대립과 갈등은 작금의 시대가 쌓아 올렸다고 자부하는 문명의 지붕 아래에서 여전히 흔들리고 있는 어떤 기둥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이 <어스>를 통해 미국적인 상황을 연상할 만한 이미지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도 이 나라의 이중성, 신념과 악마가 함께 전시돼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어스>가 그것보다 더 큰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확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은 ‘우리’라는 단어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 가족일 수도, 우리 마을일 수도, 우리나라일 수도, 우리 인류일 수도 있다. 결국 ‘우리’의 본질이란 ‘그들’이 있다는 것을 규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 각자의 ‘우리’가 무엇이든 간에 우리라는 건 ‘그들’을 적으로 돌린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 자신에게 최악의 적은 ‘우리’ 일 수도 있다는 거다.” 

그렇다. 조던 필 감독의 말처럼 우리의 적은 국경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경 너머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이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국경에 높은 벽을 쌓자고 주장하는 이가 우리 곁에 있다면 그야말로 우리에게 있어서 최악의 적이라는 것을 환기시키는 영화가 바로 <어스>인 셈이다. 그래서 <어스>는 우리라는 최면 속에서 손쉽게 방치되는 집단적인 이기심과 편의적인 허무주의에 빠진 수많은 나를 각성시키고자 마련된 경고처럼 보인다. <어스>에서 거듭 노출되는 구약성서 예레미야서 11장 11절의 내용은 이렇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한다.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릴 것이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내게 부르짖어도 내가 듣지 않을 것이다.’ 유대 왕국은 여호와를 우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유대 왕국은 멸망했다. 신은 그들을 구원하지 않았다. 그렇게 유대 왕국은 우리라는 믿음 안에서 멸망했다. 그리고 <어스>는 오늘날의 유대 왕국은 바로 우리 자신의 믿음 속에서 건설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21세기의 예언서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라는 울타리에 갇힌 이기적인 문명 아래에서 신음하는 이들의 삶이 당연한 것으로 방치되는 작금의 시대에도 결국 신은 없을 것이므로. 

* 필자의 블로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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