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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초등학생보다 느린 걸음으로 뛰어와 내게 건넨 것

괜찮아, 안 죽어

혈압이 왜 이렇게 올랐지? 지난번에 쟀을 때보다 족히 30이 더 많은 숫자가 적힌 차트를 보며 할매가 진료실에 들어오길 기다린다. 내 앞에 앉자마자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는 할매에게 묻는다.

“어디 아픈 데 있어요?“

- 아니.

″근데 혈압이 왜 이렇게 올랐지?”

- 그게 내가….

″뛰어왔어요?”

- 그게….

″그게는 뭐가 자꾸 그게야. 아, 누가 쫓아오나? 이 더운 날에 뭐 한다고 이렇게 땀을 뻘뻘 흘리면서 뛰어다녀요. 삼복더위에 길에서 쓰러져 뉴스에 나오려고 그래요?”

- 그게….

″뭐요, 자꾸.”

“이거, 따뜻할 때 먹으라고.”

날이 더워서 그런지, 내용물이 안 식어서 그런지 할매가 내민 까만 비닐봉투는 따뜻하다 못해 뜨겁다.

″이 한여름에 누가 뜨거운 걸 먹는다고.”

- 찰옥수수야. 밭에서 기른 건데, 오늘 쪘거든.

″나 뜨거운 거 안 좋아하니까 식기 전에 주려고 뛰어다니고 그러지 마요.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요. 아휴, 진짜!”

한낮에는 제발 밭에 나가지 마라, 나가도 아침에만 잠깐 나가라, 잠깐 나가도 마실 물 왕창 챙겨 나가라…. 꼼짝없이 붙잡혀 앉아 내 잔소리가 끝날 때까지 한참이나 고막 고문을 당한 할매가 이제 가도 되느냐면서 일어선다.

- 그래도 그거….

″왜요, 또.”

- 그거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어.

화장실에 가는데 복도 창밖으로 할매가 보인다. 아래층 약국에 들러 혈압약을 받은 할매가 종종걸음으로 찻길을 건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대뜸 창에다 대고 소리를 지른다.

“아, 뛰지 말라고!!”

내 목소리가 들릴 리 없는 할매는 또 그렇게 뛰어서, 아니 본인은 뛴다고 뛰는데 그래 봐야 초등학생보다 느린 종종걸음으로 차들을 피해 길을 건너 버스를 탄다.

아프지 말고 다음 달에 또 봐요, 할매.

이 말 역시 안 들릴 게 뻔하지만,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서 있다.

* 에세이 ‘괜찮아, 안 죽어’(21세기북스)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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