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2019년 04월 01일 11시 47분 KST

우크라이나 대선 출구조사에서 '코미디언 출신' 후보가 1위다

우크라이나 내부의 상황과 국제 정치의 흐름을 압축하는 결과다.

Valentyn Ogirenko / Reuters
우크라이나 코미디언이자 배우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41) 후보가 대통령선거 출구조사 결과 직후 자신의 선거 사무소에서 '브이'자를 그려보이고 있다. 키예프, 우크라이나. 2019년 3월31일.

키예프, 우크라이나 (로이터) - 31일(현지시각) 치러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정치 경험이 전혀 없는 코미디언 출신 후보가 선두를 달리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서방 국가들과 러시아의 대치전선 맨 앞에 있는 우크라이나의 뿌리 깊은 부패에 유권자들이 넌덜머리가 났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다.

출구조사와 초기 개표 결과에 따르면, 유명 TV 시리즈에서 대통령 캐릭터를 연기했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41) 후보가 1차 투표에서 현직 대통령인 페트로 포로셴코(53)를 여유 있게 앞섰다. 다만 과반에는 미치지 못했다.

젤렌스키의 부상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나 이탈리아의 오성운동처럼 현재의 상황을 뒤집고 반(反)기득권 세력에 힘을 실어주는 전 세계 유권자들의 움직임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젤린스키는 자신이 국가를 이끌기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유권자들을 설득해야 한다. 우크라이나는 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친(親)러시아 성향인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의 축출과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병합으로 이어졌던 2014년 마이단(Maidan; 친유럽 시위) 사태 이후 계속되는 서방과 러시아의 충돌 중심에 있는 국가다.

또한 투자자들은 전쟁과 급격한 경기침체, 환율 급락의 와중에 우크라이나를 지원했던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지속하기 위해 요구되는 개혁을 차기 대통령이 추진할 것인지에 주목하고 있다.

정체를 알 수 없으며 정책의 구체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아왔음에도 젤린스키는 베테랑 정치인 포로셴코나 현재까지의 집계 결과 3위를 기록하고 있는 율리아 티모셴코 전 총리에게 강력한 위협으로 떠오르고 있다.

어떤 후보도 과반 이상의 득표를 달성하지는 못할 것으로 보이며, 이에 따라 4월21일에 결선투표가 실시될 전망이다. 39명의 후보가 난립한 이번 선거에서 당선 가능성이 있는 후보들 중 어느 누구도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영향 아래로 되돌리지 않고 싶어한다.

젤린스키는 일요일 저녁 환호하는 지지자들에게 ”장난 삼아 표를 던지지 않은 모든 우크라이나인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건 시작일 뿐이다. 우리는 힘을 빼지 않을 것이다.”

힘을 뺀 그의 선거운동 스타일과 어울리게 이날 밤 젤린스키 측의 개표상황실은 무료 주류, 테이블 축구, 탁구 등을 제공했다.

Viacheslav Ratynskyi / Reuters
우르라이나 현직 대통령인 페트로 포로셴코 후보가 대선 출구조사 결과 발표 직후 자신의 선거 사무소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키예프, 우크라이나. 2019년 3월31일.

 

포로셴코는 이 결과가 특히 젊은층 유권자들의 ”엄한 가르침”이었다고 말하며 결선투표에서 지지를 당부했다.

″국민들은 이 나라의 변화들을 보고 있지만, 그 변화들이 더 빠르고 더 깊고 더 높은 수준이기를 바란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시위의 동기를 이해했다.”

포로셴코는 특히 국제무대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상대함에 있어 우크라이나를 대표할 자질이 없는 인물로 젤린스키를 묘사하며 유권자들을 공략했다. 

″(푸틴은) 부드럽고 순종적이고 상냥하고 낄낄대고 경험없고 유약하고 이념적으로 모호하고 정치적으로 결정력 없는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원한다. 우리가 그에게 그 기회를 줄 것인가?” 포로셴코가 했던 말이다.

투표 종료 3시간 뒤인 이날 밤 11시에 공개된 출구조사에 따르면 젤린스키는 30.6%를 득표해 17.8%에 그친 포로셴코를 앞질렀다.

14.2%를 득표한 티모셴코는 자체 집계에서는 자신이 젤린스키에 이어 2위를 달리는 것으로 나왔다며 출구조사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최종 개표결과에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Vasily Fedosenko / Reuters
우크라이나 야당 '조국당' 대표를 맡고 있는 율리아 티모셴코 전 총리는 이번 대선에서 또 한 번 고배를 마실 것으로 전망된다. 사진은 출구조사 발표 직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티모셴코 후보의 모습. 키예프, 우크라이나. 2019년 3월31일.

 

개표가 9% 진행된 상황에서 1~3위 후보들의 순위는 출구조사 결과와 일치했다. 투자은행 이그조틱의 스튜어트 컬버하우스는 젤린스키가 재계 지도자들을 만나고 정통 경제 정책들을 언급함으로써 자신의 전문적인 면모를 보이려 했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출구조사 결과가 개표에서 확정된다면, 젤린스키는 결선투표에서 정책 아젠다를 구체화하라는 더 큰 압박을 받게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덧붙였다.

포로셴코는 대통령으로 재직하는 동안 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EU) 및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추진했으며, 이와 동시에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동부 분리독립주의자들과 싸우고 있는 군대를 강화했다.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치러진 이번 선거는 최근 역사의 축소판이기도 했다. 동부의 군인들은 임시 투표소에서 줄을 서가며 투표에 참여했다.

EU 회원국 폴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에서도 유권자들의 긴 줄이 이어졌다. 100~200만명의 우크라이나인들은 일자리와 더 높은 임금을 찾아 폴란드로 이주했다.

제과업계 거물인 포로셴코는 TV 방송의 러시아어 사용을 제한하고 우크라이나 정교회를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독립시켰으며,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속국이 되는 것을 막을 인물임을 자임해왔다.

그러나 해외 지원을 계속 받기 위해 필요한 개혁 작업은 난항을 겪어왔다. 또 몇 주 내로 분쟁을 끝내겠다는 포로셴코의 약속과는 달리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는 지난 5년 동안 1만3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유럽 최빈국 중 하나인 우크라이나에서는 낮은 삶의 질과 만연한 부정부패에 대한 불만이 젤린스키 같은 정치 신인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주었다.

분리독립주의자들이 관할하는 우크라이나 동부와 크림반도의 주민 대다수는 투표에 참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투표에 참여하려면 우크라이나 영토 지역에서 별도의 등록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5년 전 러시아의 점령 이후에도 우크라이나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크림반도 일부 주민들은 투표소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기도 했다.

Valentyn Ogirenko / Reuters
코미디언 겸 배우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후보가 대선 선거운동 도중 '코미디쇼' 형태의 유세를 진행하는 모습. 브로바리, 우크라이나. 2019년 3월29일.

 

반-기득권

지난 3월 실시된 갤럽 여론조사에서 우크라이나 국민 중 정부를 신임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9%에 불과했다. 투표로 지도자를 뽑는 국가들 중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젤린스키는 자신의 경험 부족에 대한 서방 국가 정부 관계자들 및 해외 투자자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반기득권 정서를 활용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선거운동은 소셜미디어와 농담 섞인 코미디 공연, 경쟁자들을 조롱하는 스케치와 노래·춤에 크게 의존했다.

″이건 나라를 바꾸고 정치 시스템을 바꾸는 전투다. 정치는 스스로 불신을 초래했으며, 우크라이나 시민들이나 서방 국가 파트너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젤린스키의 정치 컨설턴트 드미트리 라주므코프가 로이터에 말했다.

″부패와의 싸움이 5년 동안 이어졌지만, 우리는 원래대로 되돌아갔다.”

젤린스키의 선거운동은 현실과 TV 시리즈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전략을 구사했다. 젤린스키는 이 TV 시리즈에서 어쩌다가 대통령이 된 고지식하고 정직한 역사 교사를 연기했다.

3월부터 전파를 탄 세 번째 시리즈에는 젤린스키가 연기한 캐릭터가 투옥되자 우크라이나가 올리가르히들과 포퓰리스트, 극우파들에 의해 장악돼 결국 28개주로 쪼개지는 내용이 등장한다. 포로셴코와 티모셴코를 희미하게 닮은 것처럼 보이는 캐릭터들이 극중에서 권력을 잡는다.

”젤린스키는 정치권의 ‘새 인물’에 대한 요구를 상징하며, 젊은층 유권자와 친개혁 성향 유권자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의 애널리스트 아그네스 오톨라니가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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