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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3월 29일 13시 47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03월 29일 13시 47분 KST

무신론 진화론자가 개신교 신자와 함께 사는 법

‘어째서 믿느냐’고 따질 게 아니라 ‘왜 믿을까’를 고민하는 게 중요하다.

넷플릭스

무신론자로 커밍아웃했던 순간이 기억난다. 대학에 합격했다고 모친께 아뢰자 모친께서는 “다 기도한 덕분이니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답하셨다. 신앙심이 독실한 양친에게 심려를 끼칠까 숨겨왔던 무신론적 본성이 폭발하고 말았다. “엄마, 그렇게 말하면 열심히 공부한 나는 뭐가 돼! 대학에 떨어진 애들은 그럼 뭐가 되냐고! 기도 안 해서 떨어진 거면 너무하잖아.” 나로서는 나름대로 커밍아웃이었는데, 근 20년이 지난 지금도 양친은 나를 무신론자로 받아들이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어떻게든 벗어나려 발버둥 쳐봐야 부모님의 우주 안에서 나는 무신론자일 수가 없다. 예수님이 이미 무신론을 믿는 나의 죄까지 다 사했기 때문이다.

나와 신념이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건 참 거북스러운 일이다. 가끔 누군가 타로 카드를 꺼내거나 사주를 봐주겠다고 하면 괄괄한 성격답지 않게 동공이 흔들릴 만큼 당황한다. “사주 따위 믿지 않습니다”라고 정색을 했다가는 분위기가 싸늘해질 것이고, 그렇다고 나의 신념에 반해서 “와, 정말요?”라고 답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실 사주를 볼 수도 없다. 생시를 모르기 때문이다. 산부인과에서 태어날 때 준 신생아 카드가 본가의 사진첩에 있긴 하지만, 생시는 외우지 못했다. 시대가 2019년인데 아직도 “어쩐지 성격이 B형 같더라”고 말하는 사람, “손금을 보니 재물 운이 있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도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진짜 강적이 나타났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하는 ‘플랫 어서’(flat earther)들이다. 버락 오바마가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버서’(birther)로, 각종 음모론자를 ‘트루서’(truther)로 줄여 부르는 것과 비슷한 조어다. 플랫 어서들은 북극을 중심으로 다섯 대륙이 펼쳐져 있고 그 바깥을 거대한 바다가 감싸고 있으며, 지금 우리가 ‘남극 대륙’이라 부르는 얼음 땅이 사실은 원반 모양인 지구의 가장자리를 감싸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위로 반원 모양의 거대한 천구가 지구를 감싸고 있고, 태양과 달이 그 사이에서 조명처럼 빙글빙글 돌며 우리를 비춘다. 미시간호를 사이에 두고도 80㎞ 떨어진 시카고의 빌딩 숲이 보인다는 사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은 아무리 들여다봐도 일직선이라는 점이 바로 지구가 평평하다는 증거다. 둥근 지구를 찍은 나사의 사진은 다 가짜고, 달에 다녀왔다는 것도 다 거짓말이다. 농담이 아니다. 이 이론을 믿는 사람의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나서 이제는 <포브스>나 <가디언> 등의 주요 언론이 다루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다큐멘터리까지 나왔다. 이들이 만든 플랫 어스 이론의 홍보 영상 조회 수는 수백만이 넘어간다.

만약 실생활에서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을 만난다면 어떻게 대해야 할까? 내겐 아주 먼 얘기가 아니다. 진화를 굳건하게 믿는 나는 꽤 여러 번 가족들과 부딪혔다. 이성에 반하는 신념을 만났을 때 가장 먼저 이는 감정은 분노고, 곧 격렬한 논증이 이어진다. “창세기에도 안 나오는 공룡 화석은 대체 어떻게 설명할 거냐”며 아이처럼 화를 낸다. 목소리를 높이고 얼굴을 붉힌다. 이런 논증은 대체로 아무런 성과 없이 양쪽 모두 감정만 상한 채 끝나기 마련이다.

플랫 어서들을 다룬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그래도 지구는 평평하다>는 그런 점에서 꽤 교훈적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힘을 쏟지 않는다. 판단하지 않고, 비웃지 않고 차분하게 왜 이들이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지를 집요하게 살핀다. 그리고 이 이론이 그들에게는 ‘탈출구’라고 결론짓는다. 지구가 평평하다는 주장은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단 한 번도 이 세계의 주인공이 되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마음의 안식을 찾기 위해 찾는 탈출구다. 플랫 어스 이론은 99.9%가 믿는 과학에 맞서 싸우는 0.1%의 히어로가 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어째서 믿느냐’고 따질 게 아니라 ‘왜 믿을까’를 고민하는 게 중요하다. 타인의 눈으로 타인의 우주를 바라보는 것이 소통의 첫 단추다. 왜 나의 양친은 창조주를 믿는가? 왜 나의 친구는 손금을 믿는가? 왜 사람들은 사주를 믿는가? 20년 전 내가 만약 대학에 떨어졌다면 모친은 나에게 뭐라고 답했을까? 나는 거의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에게는 하나님만의 섭리가 있다”는 대답으로 내게 탈출구를 제시했을 것이다. 모친은 어째서 아니, 왜 그런 결론에 이르렀을까? 나는 또한 거의 확신하건대, 아마도 이 질문이 내 유일한 탈출구일 것이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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