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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어른답게 행동하자

한목소리로 "우리의 미래를 뺏지 마세요"라고 외쳤다.

ⓒ한겨레

2019년 3월15일, 수많은 10대 청소년들이 세계의 주요 도시들의 거리로 뛰쳐나와 세상의 어른들을 향해 한목소리로 외쳤다. “우리의 미래를 뺏지 마세요. 제발 어른답게 행동해주세요!”

그들이 이렇게 당돌한 말을 하게 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지금 지구사회에 닥치고 있는 가장 두렵고 긴박한 사태, 즉 기후변화에 대한 어른들(특히 정치가들)의 너무나 무책임하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지켜보고 있던 아이들이 이제 더는 참을 수 없다고 거리로 나선 것이다. 이런 단체 행동이 가능했던 것은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고 있음에도 그들 사이에는 인터넷이나 소셜미디어를 통해 약속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이 공동의 행동을 위해 거창한 국제회의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세계의 청소년들은 어른들 몰래 자신들의 장래에 대해 깊이 근심하면서, 더 이상 어른들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도 지지난 금요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 300여명의 청소년이 집결하여, 1인당 화석연료 소비량이 세계 최고 수준급인 한국이 “기후 악당 국가로부터 탈출”할 것을 촉구했다.

ⓒCharles Platiau / Reuters

청소년들이 평일에 학교 수업을 ‘빼먹고’ 시위에 나서는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내가 보기에 청소년들의 행동은 완전히 정당하다. 대규모의 화석연료 소비 때문에 기후변화가 초래되었고, 그 진행 상황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파괴적이라고, 수많은 과학자들이 증언해왔음에도, 오늘날 세계의 주류 사회는 이 엄청난 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끊임없이 미루거나 아예 무시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설혹 미국 공화당이나 트럼프 대통령처럼 기후변화를 누군가의 ‘음모’라고 치부하며 대응 자체가 필요 없다고 뻔뻔하게 말하지는 않더라도, 대부분의 정치·사회 지도층 인사들에게는 여전히 경제력과 군사력의 증강이 중요하지, 기후변화는 부차적인 관심사일 뿐이다. 물론 기후변화에 관한 국제회의가 뻔질나게 열리고는 있으나, 끊임없이 회의만 거듭될 뿐, 회의의 결론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대부분의 정치가, 기업인, 관료, 경제전문가, 학자, 언론인들이 화석연료 사용을 대폭 줄이면 경제가 죽는다는 ―경제성장 시대를 통해서 굳어진― 낡은 사고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사고습관은 거의 모든 지식인들의 일상적인 의식과 거동에서도 드러나 있다. 이는 세계 공통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국의 경우는 그 정도가 매우 심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 한국에서 기후변화나 환경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거론하는 지식인은, 공론장이나 사석을 막론하고, 아직도 희귀종이다. 이른바 ‘진보파’일지라도 대부분의 관심사는 남북문제, 경제성장, 일자리, 노동인권, 복지 등등에 국한되어 있다. 혹간 그들의 대화 중에 환경문제를 누군가가 꺼낸다면 금세 분위기가 싸늘해질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세계의 청소년들은 그들에게는 절체절명의 문제인데도 어른들이 극히 미온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에 크게 화가 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들은 어른들한테 “지금 집에 불이 났는데 대체 뭐 하느냐”고 묻기 위해 등교를 거부하고 거리로 나온 것이다.

이 점을 가장 명확히 하고 있는 것은 스웨덴의 16살 소녀 그레타 툰베리이다. 최근 한국의 언론에서도 소개된 바와 같이, 툰베리는 이상고온이 북유럽까지 덮친 작년 여름부터 학교는 그만두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1인 시위를 계속하며 스웨덴을 비롯하여 선진산업국 정부들이 기후변화에 대한 실질적인 대책을 강구할 것을 간곡히 요구하고 있다. 그는 그동안 두어 차례 큰 국제회의에서 행한 명연설 때문에 세계적인 저명인사가 되었지만, 그의 연설을 주의 깊게 들어보면 어른들의 위선과 거짓을 거침없이 폭로하는 그 명석한 논리와 단호한 자세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툰베리는 나중에 환경운동을 하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할 것을 권하는 사람들에게 “어른들이 무시하는 ‘과학’을 무엇 때문에 배워야 하냐”고 항변하고, 장래에 기후과학자가 되는 게 어떠냐는 주위의 권고에 대해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기후과학이 아니라 기후변화를 멈추기 위한 행동”이라고 단호히 말한다. 툰베리의 이런 말을 들으면서,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늘 현실의 복잡성과 정치의 어려움을 빌미 삼아 끝없이 사태 해결을 미루고 있는 ‘어른들’이 미래세대에 대해 지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죄를 짓고 있는지 새삼 통렬히 깨닫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덟 살에 이미 환경위기를 인지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우울증을 앓고, 심지어는 일종의 자폐증까지 갖게 되었다는 툰베리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아프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개인적인 얘기지만, 왜 사람들이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느냐고, 왜 환경을 걱정한다는 사람들마저 빈번히 항공여행을 하고 육류와 낙농제품을 계속 먹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툰베리의 말을 듣고 있자니 내가 한때 심취했던 철학자 루돌프 바로가 생각났다. 바로는 우리가 땅과 숲과 생명을 살리려면 자동차와 짐승고기를 포기해야 하고, 산업체제 바깥에서 생계를 강구해야 하고, 무엇보다 무기를 버려야 한다고, 그렇게 하지 않는 한, 우리는 ‘사탄’이라고 역설했던 것이다.

수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런 ‘과격한’ 주장은 현대사회에서 받아들여질 리 없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 내적 진실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아직도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전환 없이 이대로 상황이 계속된다면 곧 인류사회가 대파국에 직면할 것임도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생활방식의 변화 이전에 혹은 그것과 병행하여 국가적 (나아가서는 세계적) 차원의 방향전환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아무리 검소한 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대량의 에너지와 물자의 낭비를 강요하는 무역-경제 시스템, 국가적 인프라, 초고층 건물 위주의 도시 구조 등이 혁파되지 않는 한, 모든 것은 헛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문제는 정치”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공공의 정신이 극도로 마비·위축돼 있는 오늘의 정치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고, 그러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또다시 절망감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은 희망이나 절망을 말할 때가 아니라 ‘행동’을 해야 할 때라고, ‘행동’을 통해서만 비로소 희망도 생겨난다, 라고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 툰베리는 말한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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