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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눈이 부시게' 배우 김혜자라는 존재감

'눈이 부시게'가 가장 빛나던 순간, 김혜자가 있었다

“긴 꿈을 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모르겠습니다. 늙은 내가 젊은 꿈을 꾸는 건지, 젊은 내가 늙은 꿈을 꾸는 건지.” 지난 3월 19일에 방영이 종료된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10화가 끝날 무렵 들려온 이 내레이션의 주인공은 바로 김혜자였다. 아마 <눈이 부시게> 10화를 본 시청자라면 김혜자의 음성으로 전해진 이 언어들이 뜨겁게 데운 마음의 온도를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전까지 <눈이 부시게>는 종종 마음을 잠기게 만드는 구석이 있어도 대체로 경쾌하게 와 닿는 드라마였다. 그리고 10화는 그 결말로 종착하기 전까진 이전의 모든 화 중에서 가장 명랑하게 느껴지는 편이었다. 물론 그 결말로 닿기 전까진 지나치게 과장된 판타지처럼 보여서 당황스럽기도 했다.

노인을 상대로 보험 사기를 치려는 일당에게 반하다 지하에 감금된 이준하(남주혁)를 구하기 위해 김혜자(김혜자)는 다른 노인들을 규합해 구출 작전을 펼친다. 그리고 늙고 쇠약한 노인들이 건장한 건달들을 피해 지하로 잠입하고 이준하를 구해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노인들은 마치 주성치의 영화를 연상시키듯 허무맹랑한 능력을 발휘한다.

이를 테면 시각장애인 노인은 지팡이로 땅을 내리쳐 잠수정의 초음파 레이더처럼 벽 너머의 존재를 감지하는 식이랄까. 그만큼 귀엽고 명랑한 구석도 있지만 9화까지의 흐름에 비해 지나치게 산만하고 과장된 활극을 보는 인상이라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저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0화에서 벌어진 그 모든 사건들이 사실상 치매에 걸린 노인의 망상 속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시청자들이 봐온 김혜자의 일상이 모두 다 질환에서 비롯된 착시임을 알게 된 순간, 모두의 마음에 파도가 치고 결국 여운으로 넘쳤을 것이다.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비애와 공허로 출렁이는 슬픔과 허무의 바다를 각자의 마음으로 느꼈을 것이다.

<눈이 부시게>는 9화까지만 해도 타임슬립 즉 시간여행이라는 설정을 통해 미묘한 긴장을 일으키는 동시에 유머를 구사하는 드라마였다. 참신했다. 시간여행이라는 설정을 노인문제라는 작금의 시대상과 연결하며 탁월하게 동시대 현실을 관통했다. 10화 말미에 밝혀진 반전이 시청자의 마음을 울릴 수 있었던 것도 9화까지의 서사가 노인들의 삶에 대한 공감대를 생생하게 쌓아 올려준 덕분이었다. 그리고 <눈이 부시게>에서 눈이 부시게 극적이었던 바로 그 순간, 배우 김혜자가 있었다.

1941년생 그러니까 올해로 79세. 배우 김혜자는 오랫동안 국민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1980년에 시작해 2002년에 끝난 무려 22년간 방영된 <전원일기>에서 김혜자는 이은심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였지만 시청자들에게는 남편인 김 회장의 아내 혹은 아들인 용식이 어머니로 통했다. 그리고 김혜자를 어머니의 대명사로 연상하도록 만든 건 아무래도 ‘그래, 이 맛이야’라는 유명한 대사로 잘 알려진 조미료 광고였다. 그렇게 김혜자는 한국의 어머니상을 대변하는 배우로 여겨졌다.

지난 2009년 김혜자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그에게 어머니의 대명사로 불리는 것에 대한 생각을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자식들에게는 폐가 되는 엄마일 거예요. 항상 한심한 말이나 하고, 오히려 자식들한테 밥 좀 먹으라는 얘기를 몇 번씩 들으면서 밥도 얻어먹고. 그러니까 제가 대표적인 엄마상이라는 건 어폐가 있는 일이죠. 그냥 제가 그동안 배우로서 어머니 역할을 잘 해왔으니까 그렇게 얘기하는 거죠. 엄마로서 내 생활은 엉터리였어도.”

김혜자는 전형적인 어머니상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고 말했다. 나는 김혜자가 실제로 모성애가 넘치는 어머니가 아니었다는 사실보다도 그렇게 자신이 살아왔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김혜자의 답변이 흥미로웠다. 그만큼 김혜자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배우였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실제로 그 직전 김혜자는 국민 어머니라는 수식어를 배반하는, 남다른 어머니를 연기했던 터였다. 2008년에 방영됐던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에서 말이다.

제목처럼 <엄마가 뿔났다>는 결혼 후 30여 년간 성실한 아내이자 엄마이자 며느리로 살아온 여자의 각성과 일탈을 그린 드라마다. 김혜자가 연기한 한자는 시댁살이를 하며 시누이 뒷바라지에 세 아이까지 키우며 환갑을 넘긴 나이에 가족을 향해 그 모든 의무감에서 벗어나 안식년을 갖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심지어 독립을 선언하며 자신에게 방을 하나 내줄 것을 요구한다. 당황한 가족들 중 일부는 타이르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그 고집을 꺾지 못한다. 오히려 그런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고 지난 세월에 대한 환멸을 느낀다.

“한자는 상당히 선구자적인 면이 있는 엄마죠. 그리고 이젠 그런 시대가 올 거예요. 가족만을 위해 헌신하는 엄마는 점점 없어질 거라 생각해요.” 김혜자의 말처럼 그는 <전원일기>보다는 <엄마가 뿔났다>에 가까운 엄마이고 그 이전에 여성이었다. 시대가 그를 국민 어머니라 칭송하게 만든다 해도 그는 김혜자로서의 삶을 아끼고 사랑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철학과 일치하는 존재를 연기할 기회를 가질 수 있는 배우가 됐고, 인정받았다. 그 누구보다도 배우로서의 삶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저는 직업이 배우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요. 그냥 삶이었지. 제가 연기를 하지 않아서 보이지 않을 때가 오면 그냥 죽었다고 생각하면 될 거예요. 살아있다 해도 제가 연기하고 있지 않다면 그냥 반쪽의 저만 있는 거니까요. 물론 그 반쪽의 삶은 살고 있겠지만 배우로서의 저는 죽은 거죠.” 김혜자는 연기를 사랑하는 배우를 넘어 연기하기 위해 살아가는 배우였고, 배우다. 그럼으로써 여전히 배우로서 형형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작품에 출연한다는 것만으로도 대중의 이목을 끄는, 실로 다시 보기 힘들 마지막 배우일지도 모른다.

<눈이 부시게>에서 김혜자는 바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연기한다. 김혜자를 김혜자가 연기한다. 그래서 ‘그래, 이 맛이야’라는 패러디는 보다 짜릿한 감칠맛을 내는 유머가 되고, 김혜자의 언어와 행동은 우리가 보고 싶었던 배우의 말과 삶으로 전해지는 것만 같다. 나는 2009년 당시 인터뷰에서 김혜자가 죽음에 대해 말할 때 굉장히 인상적이라 생각했다. 김혜자는 종종 김중만 작가의 사진을 영정 사진으로 쓰고 싶다고 말했다. 영정 사진을 준비한다는 건 언제나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처럼 들렸다.

“저는 젊었을 때부터 그렇게 말했어요. 예쁜 사진만 보면 ‘이거 영정사진으로 써야지’라고. 습관처럼 입에 달고 다녀서 우리 애들이 질색할 정도죠. 그런데 저는 항상 언제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살아요. 그리고 언제가 돼도 상관없어요. 저는. 왜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죽음이 그렇게 두렵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오래 사는 게 이상하다니까요. 물론 이런 말 해도 저희 애들은 질색하죠.” 여전히 선하다. 은은한 미소가 번진 표정으로 자신의 죽음과 생의 끝을 덤덤하게 말하던 그 얼굴이. 문득 70대의 나이에 그렇게 여유롭고 낭만적인 기품을 안고 살아갈 수 있는 이의 오늘이란 어떤 것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김혜자는 배우로서 오래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사랑했기 때문에 배우로 살아온 사람일 것이다. 세상에 증명하기 위해 연기를 해온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해서 연기를 해왔다. 그래서 나는 김혜자 같은 배우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언가에 열중해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 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라는 대사를 현실적인 울림으로 전할 수 있는 배우란 언제나 귀하고 중한 법이니까. 무엇보다도 지금의 세상에는 자기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므로. 배우 김혜자가 좀 더 오랫동안 이 세상에 존재하길 바라는 건 그래서다. 이 세상이, 김혜자라는 배우를 보다 오래 만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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