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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참여 거부’도 강력한 의사 표현이다

ⓒ한겨레

노동조합의 ‘교육위원’은 교육 사업을 기획하고 조합원들에게 직접 강의도 한다. “노동조합 위원장을 그만둔 뒤 교육위원을 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는 노조위원장이 있을 정도로 중요할 뿐 아니라 그만큼의 소양을 갖춰야 감당할 수 있는 직책이다.

대기업 노조에서 일년 동안 20여차례 진행하는 2박3일 교육의 첫번째 강의를 맡았다. 노동조합 조끼를 입고 교육 일정을 진행하는 교육위원들의 가슴에는 세월호 사건을 추모하는 노란색 리본과 일본군 ‘위안부’ 사건의 해결을 바라는 금빛 ‘희망 나비’ 배지가 달려 있었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구호가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었다.

첫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며칠 뒤 다른 교육위원이 전화를 했다. “하 선생님, 그 강의 하시면 안 됩니다. 노동조합 집행부가 회사와 짜고 노동자 계급의식 희석시키려고 진행하는 교육이거든요.”

나는 좀 어리둥절해졌다. “지난번 교육위원들 만났을 때 그런 느낌 별로 없었는데…. 한 조직에서 강의를 부탁하는 교육위원이 있고 그 강의를 하지 말라는 교육위원도 있으니 저로서는 참 당황스럽군요.” 긴 대화 끝에 내가 “판단을 잠시 유보하겠다”고 하자 그이는 자조적 음성으로 쓸쓸히 말했다. “요즘 어용 특징이 구별이 잘 안 된다는 거잖아요.”

교육위원들과 여러 차례 통화를 했다. 처음에 연락했던 교육위원은 “2박3일 일정의 첫 강의를 우리가 왜 하 선생님께 부탁했겠느냐. 첫번째 강의에서 방향을 잘 잡아야 나머지 일정들도 내용을 제대로 채울 수 있기 때문”이라 했고, 나중에 하지 마시라는 부탁을 했던 교육위원은 “노조 집행부가 지금 ‘하종강 선생님 같은 분도 참여하시는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홍보하면서 조합원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선생님이 ‘강의를 거부한다’고 선언을 해주셔야 그 교육에 반대하는 우리들이 힘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여러 가지 경로로 알아보고 난 뒤 나는 다음과 같은 판단을 했다. 첫째, 현 집행부의 성격이 지난 집행부보다 노사화합적이다. 둘째, 집행부 내에서 그나마 강경한 입장을 갖고 있는 교육위원들이 내 강의를 요청했다. 셋째, 교육 프로그램 중 노동운동을 딱 짚어 비난하는 내용은 없으나 ‘자기 계발’과 ‘가족의 행복’을 다루는 시간이 있는 것으로 보아 뭔가 미심쩍다. 넷째, 내가 강사진에서 빠질 경우 더 온건한 내용으로 채워질 가능성도 있다.

새로운 고민이 시작됐다. 나라도 참여해서 강의 내용이 조금이라도 바람직해지도록 노력할 것인가? 아니면 강의를 거부하겠다고 천명함으로써 교육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에게 힘을 실어줄 것인가? 고민 끝에 나는 그 강의를 거부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 의사 표시라고 판단했다. “노동자 의식을 좀 더 강화하는 내용으로 교체할 것을 회사와 집행부에 요구해서 교육위원들 의견이 일치한 뒤 다시 연락하라”고 전했다. 교육을 요청한 이는 “하 선생님이 참여를 거부했다는 것을 무기로 그렇게 해보도록 노력하겠다” 약속했고 교육을 반대한 이는 “고맙다”고 했다. “내가 강의를 거부하면 교육을 저지할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솔직히 그렇게 장담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라고 했다.

며칠 뒤 그 교육위원이 전화를 하더니 “교육 장소로 출발하는 버스 앞에 우리들이 드러눕기까지 했지만 결국 막지는 못했습니다”라고 말하며 목이 잠겼다.

그때 내가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옳았을지 가끔 생각해 본다. 적지 않은 강사료가 보장되는 기회였다는 것이 처음부터 단호하게 거부하지 못한 변수는 아니었을지 반성해 본다. 그것 때문에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았지만 추호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내가 참여했더라면 그 교육 내용이 더 좋아졌을 거라고 장담하기도 어렵다. 교육을 진행하는 사람들이 최소한 자신들의 프로그램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고, 노동자 계급의식을 강조하는 활동가와 외부에서 그들을 지지하는 강사가 우리 사회에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린 것만으로도 당시의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강의를 거부하는 강사가 있다는 것을 무기로 집행부 내에서 교육 내용을 강화하자고 요구했던 교육위원에게 지금도 고맙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참여를 거부하는 것은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강력한 의사 표현 수단이기 때문이다. 참여한 사람들은 참여하지 않는 이들에게 무책임하다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참여조차 거부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무기로 교섭하는 것이 올바른 처신이다. 패배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굴복하면 다시 일어서기 어렵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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