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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보다 어려운 이름 찾기! 할머니의 진짜 이름은?

괜찮아, 안 죽어

  • 김시영
  • 입력 2019.03.26 17:50
  • 수정 2019.03.26 18:11
ⓒ21세기북스

접수대 앞에 할매 한 분이 서 있다. 접수하는 직원이 신원 확인에 들어간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진료실에 앉아 있는 내 귀에 들리는 대화 내용으로 추측건대 할매는 신분증 따위는 가져오지 않았고, 직원에게 겨우 본인의 이름만 불러준 듯하다. 귀가 어두운 할매한테 이야기하는 직원의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병원 로비에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할머니, 성함이 어떻게 되신다고요?”
“뭐?”
“성함이요! 이름!”

어느 병원이든 접수 단계에서 꼭 필요한 것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다. 전 국민이 동일한 의료보험국민건강보험에 가입되어 있는 상태에서 진료일 현재의 보험 자격 여부를 확인하는 방법은 환자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로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접속하는 것이 유일하다. 그래서 처음 온 환자는 주민등록번호가 반드시 필요하다. 주민등록번호가 있어야만 병원은 보험공단에 접속해 보험 종류와 자격 여부를 확인할 수 있고, 환자는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재진 환자는 이름과 생년월일 정보만 있으면 병원의 자체 데이터베이스로 나머지 정보를 찾을 수 있다.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실시간 보험 자격 확인이 가능한 시스템이다. 자기 이름과 주민번호를 불러주는 게 뭐 그리 어렵고 복잡하고 대단한 일인가 싶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할매들 가운데 상당수가 간단해 보이는 이 일을 참으로 어려워한다.

일단 발음이 문제다. ‘희’라고 하는지 ‘혜’라고 하는지 ‘해’라고 하는지 도무지 구분이 안 되는 딕션으로 자신 있게 본인의 이름을 말한다. 조금 전 우리 직원의 목청을 한껏 높인 할매의 이름은 ‘희자’도 ‘혜자’도 ‘해자’도 아닌 ‘희순’이었다. 게다가 희순은 주민등록상 이름일 뿐, 어린 시절부터 동네에서 희자라고 불렸단다. 아니나 다를까. 접수대 앞에 선 할매는 쿨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준다. 희자라고.

‘발음도 부정확하고 본인 이름도 못 쓰면 그냥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다니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겁 많은 우리 할매들은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리면 지구가 멸망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중요한 것을 절대 집 밖으로 가지고 나오지 않는다.

이 할매, 예전에 우리 병원에 분명히 다녀간 적이 있다면서 자신의 기억을 강력하게 피력한다. 할매가 불러준 이름으로 검색하자 몇 명의 동명이인이 등장한다. 이들 중 과연 누가 이 할매일까? 분명한 신원 확인을 위해 다음 단계인 생년월일을 물어본다.

그런데 이 역시 쉽지 않다. 달과 날짜만 알고 연도를 모르는 경우도 있고 ‘사월 초엿새’처럼 음력 생일로 불러주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쯤 되면 접수 창구 직원의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한다. 가장 근접한 이름과 연결된 보호자(보통은 자녀의 이름)나 전화번호 등을 물어 가며 할매의 정체를 찾아야하는, 본의 아닌 탐정놀이가 시작된다. 그나마 이것 역시 병원에 진료 기록이 남아 있는 경우에나 가능하다. 이전 진료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처음 온 환자의 경우에는 이름과 주민번호 전부를 확인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할머니!!!”

“아, 왜 자꾸 불러싸.”

“주민번호 앞자리 좀 불러주세요.”

접수대 앞에서 벌어진 전투는 아직도 진행 중인가 보다. 그래도 이름까지는 합의를 봤네.

“뭐?”

“주.민.등.록.번.호. 앞자리요!”

“뭐? 암튼 그런 건 당최 모르것고, 나가 34년생이여.”

“할머니, 생일은 아세요?”

“아, 지 생일도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2월 보름. 양력이여! 음력 아녀!”

얼마나 지났을까. 우여곡절 끝에 접수가 끝난 모양이다. 자, 이제 접수대 전투는 대충 종료되었으니 진료실 전투가 남아 있다. 그나저나 빠른 34년생이면 33년생 할머니들과 친구 먹는 건가? 할매가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진료실에 들어오는 동안 잠시 쓸데없는 것이 궁금해진다. 하지만 절대 물어보지 않을 것이다. 그 대답을 듣기 위해서는 불쌍한 내 성대가 두 동강이 나야 할 것이 분명하고, 그녀에게 빠른 34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려면 내 수명이 34분쯤 줄어들지도 모를 일이기에.

* 에세이 ‘괜찮아, 안 죽어’(21세기북스)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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